<씨네21> 창간 30주년 특별 연재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의 네 번째 키워드는 ‘생태 변이’다. ‘20세기의 기억’, ‘인간의 조건’, ‘통과하는 공간’에 이어 21세기 전후로 영화산업과 비평의 생태계 곳곳에서 나타난 변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영화 매체 안팎의 환경이란 시대에 따라 변모하기 마련이고, 모종의 돌연변 이를 배출하기도 한다. ‘생태 변이’의 첫 글은 국제영화제 체제에 대한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 머의 분석과 제언이었다. 이번주엔 ‘트롤링으로서 영화비평’이란 주제를 들고 온 자칭 ‘전문적 불평분자’ gkd가 2010년대와 2020년대 무렵 한국을 중심으로 영화비평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감지했다. 작금의 영화문화, 영화비평이 잃은 보편적 언어에 대한 지적이다. 이후엔 21세기에도 집단창작의 충동을 느끼고야 마는 영화 연출가들의 경향, 영화평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비평적 용어와 수사의 되새김질이 연재될 계획이다. 영화 안팎의 생태는 항시 유기적 변이를 요구한다. 만드는 이들·트는 이들·보는 이들·비평하는 이들 등 모두가 이 생태 변이에 가담하는 주체로서 연재에 동승해주길 바란다.
트롤링으로서 영화비평
비평이 잃어버린 보편성, 과대망상의 필요.이건 별로 좋은 제목이 아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사실 나는 영화평론가라기보다는, 평론가를 빙자한 전문적인 불평분자 혹은 준전문적인 어그로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분란의 냄새를 맡고 쫓아다니는 트롤로 인식되어왔고, 나 또한 그런 의견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런 이유로 <씨네21>이라는 오래되고 지루한 매체가, 분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한 논쟁의 즐거움을 위해 나를 섭외했다고 판단한다. 먼저 제안한 주제에 대해선 한마디하고 싶다. 21세기 영화비평 모델. 21세기 영화비평에 대해서 가장 쉬운 판단은 그것이 민주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별점, 알고리즘, 밈화된 사고, 인스타 매거진, AI… 이걸 뒤섞으면 21세기 영화비평에 대한 글 한편이 뚝딱 나온다. 물론 내가 다른 자리에서 언급한 ‘저속한 작가주의’가 있겠고, 저스틴 창이나 A. S. 함라, 닉 핀커톤 같은 영화평론가들이 있겠지만, 그들을 다루는 것은 근래의 비평 문화에 대한 부분적인 통찰만 제공할 뿐이다. 그리고 독자에게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글은 아닐 터다.
그렇게 우회하며 말하기보다는, 2010년대와 2020년대를 잇는 연결고리를 노골적으로 다루는 편이 낫다. 21세기적인 비평을 과거와의 비교에서 찾기보다는, 동시대의 흐름을 요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특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질문의 방향을 뒤바꾸자. 요 근래 한국의 영화문화는 변화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정도”에 와 있다. 무비랜드, 라이카 시네마, 그리고 각종 영화 공간들에서는 여태 듣지 못했던 아방가르드 영화감독(혹은 작가?)과 그동안의 영화문화에서는 접할 수 없던 고전영화들이 다양하게 상영되고 있다. 다양성 영화라는 용어에 쏟아졌던 비난에 불구하고 용어의 창안자가 지닌 혜안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변화는 트럼프 당선 이후, 페미니즘이 사회 전반에서 갖고 있던 긴장이 눈에 띄게 느슨해진 이후에 발생했다. 2017년부터 시작된 이 흐름을 20대 통째로 통과한 내게, 페미니즘은 마치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논적처럼 느껴졌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소리 소문 없이, 쓰러진 논적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착잡해진다. 정치적 올바름의 검열을 피하려고, 일종의 암호화된 코드를 넣던 게 어제 같은 데 말이다. 우리는 왜 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화한 아트하우스 중심의 영화 관람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마치 집단적인 기억상실에라도 걸린 것처럼 모두 영화 형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시간을 통과해오며, 듀나와 박우성 평론가가 로만 폴란스키를 두고 벌였던 논쟁은 특히 인상적으로 남았다. 논쟁이 지적으로 생산적이었는지와는 별개로, 그것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페미니즘이 영화사 혹은 관객이라는 질문을 보편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하나의 표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두 평론가가 정확한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박우성 평론가의 글은 영화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내게는 더 이상 평가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폴란스키가 없다면 영화사의 일부, 적어도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어떤 흐름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이는 우리가 영화사의 한 흐름을 통째로 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치 독일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그 가해자들을 연구해선 안되는가? 이 논리는 내게 여전히 괴상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화의 역사라는 보편적 토픽을 향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특정한 대상에 대해 표하는 주장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토픽을 제기하는 일은 비평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다.
한편 영화는 한때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보편적 토픽이었다. 2003년에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에 대해 최근의 역사적 평가는 다소 박하다. 수직계열화라는 산업적 저주가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박찬욱과 봉준호 같은 작가주의 감독과 대중영화의 동거가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영화산업에 분명한 이정표가 된 시간이었다. 영화가 제 몸을 부풀리는 일은 그것이 담을 수 있는 토픽의 수를 늘려가는 일이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의 영화들에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를 그리려는 욕망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미우나 고우나 한국영화를 하나의 사회적 토픽으로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인민, 민족주의, 혹은 남성성(소년성)에 대한 시민의 욕구를 대리한 것이기도 했다. 이제 관객은 한편의 한국영화를 보면서도 가치에 대해 논쟁할 수 있었다.
비평 역시 이 게임에 뛰어들었다. 나는 지금도 한국 최고의 영화평론가로 불리는 정성일과 허문영의 가장 인상적인 글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고 생각한다(정성일의 <해안선>과 <외출>에 대한 비평, 허문영의 홍상수 비평과 소년성에 대한 글들이 그렇다). 그들은 산업이 사회와 관객의 감각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저널리즘 비평은 이런 조건 속에서 가장 빛난다. 우리가 말하는 ‘비평의 위기’란 어쩌면 산업에서 비평이 멀어져버린 풍경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그런 점에서 한국 영화산업의 동향과 분리된 채 영화평론가라는 자리에 놓였던 내가 트롤이 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오늘날 비평은 서울 중심으로 상영되는 ‘다양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보도자료에 가까운 형식으로 기울어 있다. 지금처럼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한국영화에 축복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축복은 동시에, 영화가 한때 감당하던 보편성을 내려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저속한 작가주의를 포함해 영화의 비천함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결국 보편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와 겹친다. 인간의 욕망은 대체로 형편없이 진부하고, 영화비평의 오래된 논쟁들 역시 이 진부함에서 반복적으로 시작되어왔다. 폴린 케일이 쓴 <쓰레기, 예술, 그리고 영화들>은 영화비평에서 트롤링의 고전적 사례다. 그녀는 영화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영화는 우리가 선택한 저렴하고 손쉬운 표현 방식이다. 집을 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음울한 예술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그 저렴함 덕분에 대중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사랑과 죽음 같은 가장 진부한 것들을 발견한다. 나는 이 비천함이 곧 진부함과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은 결국 이 진부함과 관계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
2010년대 페미니즘의 부상 이후, 관객과 독자의 의식은 영화와 문학이 지녔던 진부한 보편성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 영화 전반에서 남성적 주체의 보편성을 거부하는 제스처가 이어졌고, 그 정점이 2022년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설문에서 샹탈 아케르만의 <잔느 딜망>이 ‘역대 최고의 영화’로 선정된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위대함과는 별개로, 나는 이 선택이 영화사의 기존 정전을 재평가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의 역사 자체를 특수하고 개별적인 분과들의 집합으로 분해하겠다는 정치적 확언에 가까웠다고 본다. 큐레이션이라는 이름 아래 예술사의 남성적 시선을 거부하는 시도들은 그렇게 새로운 정전(혹은 대안적 정전)으로 제안되었다.
이 역사적 풍경에 대한 스케치는 미국 문학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콤팩트 매거진>에 실린 제이콥 세비지의 <사라지는 백인 남성 작가>는 남성 밀레니얼 작가들이 2010년대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고 말한다. 이 글은 어떤 정체성을 애도하기보다는, 문학장에서 함께 사라진 특정한 목소리와 진부함의 감각에 주목한다. 이 논리가 한국영화계에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2020년대 초반 독립영화 신에서 남성감독들이 다시 화두로 호출되는 현상은 흥미롭다. 이정홍, 박세영, 정재훈 같은 이름들이다. 나는 이들의 영화를 직접 평가하기보다는 이들을 둘러싼 평가의 언어에 더 관심이 있다. ‘에너지’, ‘감각적 자극’, ‘형식적 실험’, ‘과감한 스타일’ 같은 표현들이 이전의 정치적 수사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10년 전과 달리 그들의 남성적 주체성은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비평에서 어휘사전을 몇번이나 바꿔왔다. 자크 라캉과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을 경유하며 이론적 용어가 범람하던 시기가 있었고, 신유물론을 비롯한 철학·미디어 이론이 트렌드가 되던 때도 있었다. 이론이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영화는 점점 신념의 문제가 되었고, 정치적 올바름은 영화 관람의 감각을 제약하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영화에서 진부함이나 보편성을 발견하는 일은 어느 순간 죄악처럼 취급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비평의 어휘사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따져보면, 하스미 시게히코를 중심에 놓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한국 영화광들에게 미친 영향은 사회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읽는 태도와 깊게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주체’나 ‘저항’, ‘돌파’로 불리던 것들은 이제 ‘숏’과 ‘운동’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그 과정에서 실제 집단으로서의 관객과 사회는 비평에서 점점 지워졌다. 나는 이 흐름이 영화 환경의 ‘미세화’와 맞물려 있다고 본다.
우리는 관객이 과포화된 비평과 관객이 사라진 비평 사이를 이동해왔다. 지금의 비평은 10년 전보다도, 한때 나에게 ‘사회’와 거의 동의어처럼 보였던 페미니즘의 시대보다도 기능이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나는 페미니즘이 영화사에 던진 질문의 많은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보편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호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적어도 그 시기의 영화를 다루는 비평은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하나의 문화적 주기가 소진된 뒤, 아트하우스 전성기라 불리는 지금의 비평에서 ‘사회’라는 항은 거의 망각되었다고 본다. 정치에서 형식과 매체 연구의 시대로 이행한 이후, 영화비평은 더이상 사회와 길항하는 게임에 들어가지 못한다. 영화는 사회를 향한 질문이 아니라, 형식이 얼마나 정교하게 닫혀 있는지를 평가받는 대상으로 읽힌다.
이러한 이행은 한국의 영화 관람 문화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관객이 하나의 보편적 집단으로서 영화의 역사에 응전할 수 있었던 문화적 국면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속한다. 그게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를 하나의 서사로 본다. 보편적 대상으로서의 영화, 그것을 향한 파괴, 그리고 영화문화의 미세화라는 흐름이다. 미학적으로는 타당해 보일지 모르지만, 영화가 움직여온 저변의 동력이 ‘고통’이었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다. 그것이 그 문화적 주기를 실제로 밀어붙인 힘이기도 했다. 보편성을 담보하는 고통, 진부하다고 여겨지는 고통의 목록은 영화가 결국 관객이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일정한 제약과 검열의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관람 문화에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다. 적어도 그 시기에는 보편성을 둘러싼 충돌과 질문이 존재했다. 지금의 영화문화는 그 질문을 영화라는 폐쇄회로 내부로 봉합해버린다는 점에서 분명 퇴행적이다.
지금 한국 곳곳에서 훌륭한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말도 덧붙여야겠다. 훌륭한 영화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과대평가되었다. 이 말은 상업영화를 다시 비평의 중심에 올리자는 제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를 동시대의 맥락으로, 지금의 영화문화에서 상영되는 ‘다양한 영화’들을 보편성의 언어로 다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가 더는 주류문화가 아닐 때조차 비평은 그 게임을 과대망상에 기대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트롤로서 궁금한 건 이런 거다. 이 영화들을 통해 도대체 뭘 원하는데? ‘훌륭하다’는 말은 됐고, 당신은 이 영화로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케이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우리 다음은 어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