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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자기를 쓰는 여자의 초상, 김예솔비 평론가의 <물의 연대기>

<물의 연대기>

“기차에서 뛰어내린 다음날 밤, 컴퓨터 앞에 앉은 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첫 번째 책은 억압받은 자들이 해방되듯, 혈전이 풀어지듯 내 몸에서 흘러나와 탄생했다. (…) 낱말이 있었고 내 몸이 있었다. 나는 내 살갗을 뚫고 그 안을 볼 수 있었다. 몸속에 있는 것을 꺼내 글로 써냈다. 책이 탄생할 때까지. 내 살갗이 괴성의 노래를 만들어낼 때까지.” (<물의 연대기>)

<물의 연대기>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면, 이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리디아가 컴퓨터 앞에 앉아 내달리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장면.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무언가를 써내려가다 보면 안쪽으로, 더 깊은 안쪽으로 파고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인다. 거기에 내가 쓰고 싶은 것이 있고, 거의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 잡는 순간 잡히는 건 오히려 내쪽이고 결국 모든 것이 파괴되어버릴 거라는 예감 속에서, 쓰기. 계속 쓰기. 그건 뭔가를 낳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리디아가 낳았거나 앞으로 낳을 것들-체액, 피, 배설물, 돌, 죽은 아기 혹은 살아 있는 아기 중에서 글은 리디아가 제일 오래 품고 있었던 것이다. 글을 쓰는 리디아의 얼굴 위로 각인된 몸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유년의 기억. 피 흘리고, 젖고, 흘려보내고, 다시 차올랐던. 물의 기억. 기나긴 산통 끝에 그녀는 마침내 워드프로세서에 ‘물의 연대기’라고 적어 내려간다. 그제야 리디아는 한층 수월해진 얼굴이다. 방금 자기 몸속에 있던 것을 꺼낸 사람의 얼굴이 그러하듯이.

리디아 유크나비치는 2011년에 자신의 자서전적 소설인 <물의 연대기>를 출간하기 전 1997년에 <그 여자의 다른 입들>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집을 발표했다. 그 소설집의 첫 번째 장의 제목은 ‘물의 연대기’였다. 앞서 말한 영화의 장면에서 그녀가 워드프로세서에 적고 있었던 것은 <그 여자의 다른 입들>의 목차 페이지였던 것이다. 이것이 목차 페이지임을 알 수 있는 까닭은 워드프로세서 화면에 단편 소설집의 다른 장의 제목들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물의 연대기’는 단편 소설집의 첫 번째 장이지만 영화에서는 리디아가 이 장의 제목을 가장 나중에 끼워넣은 것으로 묘사했다. 이런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영화가 영상화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나 일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의 초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의 연대기>가 한 사람의 전기에 대한 소설을 각색한 여타 영화들과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이 장면의 이질감 때문이다. 이 영화가 원작을 독창적으로 각색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챕터의 구성부터 장면의 디테일까지 원작을 매우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하나 <물의 연대기>는 리디아라는 인물에 대한 일대기도, 소설가에 대한 전기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다소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자기 고백적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해부하고, 또다시 그러모으려는 마조히즘적 시도에 대한 영화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 고백적 글쓰기의 형식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자전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거칠게나마 시험해보는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결코 연출자의 자전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연출자는 분명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물론 여기에는 이 영화의 연출자가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점이 그녀의 존재감을 영화 내내 드리우게끔 했을 거라는(부정적인 시선을 포함해서)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나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 샬럿 웰스의 <애프터썬>과 같이 첫 번째 장편영화로 자전적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택한 감독들의 사례들이 자연스레 연상되기도 한다. 이제 막 첫 번째 장편영화를 만든 사람이 데뷔작으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만들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추정들과는 별개로 <물의 연대기>는 여전히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삶에 대한 자서전적 이야기다. 여기에는 부분적으로 스튜어트 자신도 통과했을 거라 짐작되는 공통의 기억과 원체험이 분명 공명하고 있을 테지만, 이 영화에서 결국 리디아는 리디아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공의 인물로서의 리디아와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을 쓰는 (영화 바깥의) 리디아. 사실상 <물의 연대기>는 쓰이는 동시에 쓰는 사람이라는 분신적 자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후자의 리디아는 전자를 창작(내지는 각색)하고, 전자의 리디아는 후자를 전제로 말하고 행동한다. 자서전적 소설에서 ‘자기’란 언제나 회고적이기에 쓰이는 나는 ‘쓰는 나’에 의해 끊임없이 대상화될 수밖에 없다. 언뜻 보기에는 단일한 주체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자서전적 글쓰기는 분열적이고 비선형적으로 출현하고 재구성되는 주체의 모순을 끌어안아야 하는 작업임에 틀림없다. 반대로 말하면 언제나 ‘자기’가 둘로 분열될 가능성에 시달린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일치를 구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더욱. 물론 <물의 연대기>에는 자기 고백적 글쓰기의 그와 같은 특성이 잘 감지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는 분열적 주체를 한 캐릭터의 강렬한 개성으로 수렴시키는 강력한 극영화적 인력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상에서 리디아가 노트북에 ‘물의 연대기’라고 적을 때, 그 순간 리디아는 픽션적 인물에 완전히 속하지도, 자기 고백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퍼포머에 온전하게 귀속되지도 않는다. 이 장면에서 리디아는 픽션적 인물에서 자기 고백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인물로, 그리고 그러한 인물의 이야기를 픽션화하는 자기 반영적 시선으로 유체 이탈한다. 이것은 더이상 리디아(만)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존의 언어로 명명될 수 없었던 이야기(들)에 드디어 하나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 자기 고백적 글쓰기를 시도하는 모든 창작자에 대한 이야기다. 스튜어트 자신도 포함해서 말이다.

<물의 연대기>

‘물의 연대기’는 리디아의 파편적 삶의 행적을 설명하는 묶어내는 말처럼 들리지만, <물의 연대기>가 기대고 있는 모든 영화적 실천들의 계보들을 호명하는 말로 읽힐 수도 있다. 개인의 역사를 넘어 더 큰 계보 속에 위치시키는 작업으로서의 ‘연대기’라는 말이다. 리디아가 캐시 애커와 마르그리트 뒤라스, 에밀리 디킨슨, 엘렌 식수, 에이드리언 리치, 앤 카슨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글 위에서 자신의 단어들을 적어 내려갔듯이 <물의 연대기>는 자신의 몸과 몸의 불화들, 모든 것이 얽힌 빽빽한 물속에 있는 듯한 감각을 토대로 몸과 물의 감각적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의 계보들을 의식한다. 비합리적이고 유동적인 힘으로, 자기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고 경계가 녹아내리는 ‘대양의 느낌’으로서의 여성성은 영화의 오랜 탐구 대상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적 이미지의 구조적 조건으로서 물과 바다를 자주 차용했던 것처럼, 물과 바다는 내면에서 우주적 단위의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몸의 기원적 장소로서 묘사되어왔다. 여성들은 종종 물속에서 뭍으로 쓸려 나왔다. 마야 데렌의 <지상에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떠올려보라.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에서도 에이다는 배를 타고 뭍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에서 뭍으로. 이 벡터는 물을 기원적 장소로 가리키고 있다. <물의 연대기>의 글 위에서 자신의 단어들을 적어 내려갔듯이 <물의 연대기>는 자신의 몸과 몸의 불화들, 모든 것이 얽힌 빽빽한 물속에 있는 듯한 감각을 토대로 몸과 물의 감각적 관계를 탐구하는 영화의 계보들을 의식한다. 비합리적이고 유동적인 힘으로, 자기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고 경계가 녹아내리는 ‘대양의 느낌’으로서의 여성성은 영화의 오랜 탐구 대상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적 이미지의 구조적 조건으로서 물과 바다를 자주 차용했던 것처럼, 물과 바다는 내면에서 우주적 단위의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몸의 기원적 장소로서 묘사되어왔다. 여성들은 종종 물속에서 뭍으로 쓸려 나왔다. 마야 데렌의 <지상에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떠올려보라.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에서도 에이다는 배를 타고 뭍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에서 뭍으로. 이 벡터는 물을 기원적 장소로 가리키고 있다. <물의 연대기>에도 물로 되돌아가려는 충동이 존재한다. 영화가 일종의 전략으로 택한 비선형적이고 파편적인, 거친 장면들의 호흡은 시청각적 문법을 학습한 결과처럼 보인다.

<물의 연대기>의 일화들은 대체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들이 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해변가가 그중 하나다. 리디아는 삶의 순간순간에 그 해변으로 돌아간다. 한때 가족들이 여느 평범한 가족들처럼 해변가로 휴양을 즐기러 갔던 기억은 반복을 통해 왜곡되고 변형된다. 영화에서 해변은 어떤 원체험으로 각인된 상징적 장소이자, 기억으로부터 재구성되어 기이하게 뒤틀린 관념적 공간처럼 묘사된다. 그곳은 불현듯 떠올라 자기 자신을 가라앉히는 유년기의 중력이다. 그 해변에서 리디아는 가족을 둘러싼 상실과 이별을 되풀이하듯이 겪는다. 리디아는 사산한 아이의 유골을 바다에 흘려보내고, 물에 빠진 아버지의 유사 죽음을 본다. 특히 후자의 장면은 소설에서 어린 시절의 일화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 기절한 아버지에게 인공호흡을 하는 리디아는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유년기에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의 죽음을 맛보고 있는 듯한(동시에 그를 살려내는) 장면을 정신분석학적 충동으로 읽어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영화학자 토니 피폴로는 “클로즈업: 심리적 투사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오후의 올가미>와 <지상에서>에서 암시된 정신적 탐구가 부분적으로는 데렌과 그녀의 아버지 사이의 기능장애적 관계에서 비롯된 심리적 긴장과 투쟁이 영화적 형태로 드러난 것이라 주장한다. 특히 피폴로는 <지상에서>의 오프닝에서 데렌이 바다에서 뭍으로 밀려나온 존재처럼 등장하는 것을 아프로디테의 탄생 신화와 연결 짓는다. 우라노스의 거세 이후 바다 거품에서 아프로디테가 탄생했던 것처럼, 이 장면은 아버지의 성적 권력을 제압한 뒤 사랑의 여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상징 구조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또한 <지상에서>에서 체스를 두는 남자를 아버지의 지적 권위에 연결시키고, 데렌이 길에서 만나는 네명의 남성들을 각각 아버지의 분신들로 대응시킨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오두막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죽어가는 남성은 노골적으로 아버지의 거세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물의 연대기>

무언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어내는 건 대체로 즐거운 법이지만, 아마도 피폴로는 1943년 마야 데렌의 아버지가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확신에 가까운 단서를 얻었던 것 같다. 편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나는 거의 암처럼, 아버지의 머리에서 자라난 어떤 존재였다. (…)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거의 병리적인 것이었다. (…) 우리는 거의 서로에게 직접 말할 수 없었고, 항상 방 안에 있는 제삼자에게 말을 건네듯 이야기해야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상 한 사람이었고,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피폴로는 <오후의 올가미>에서 데렌의 분열된 인격들이 충돌하는 것을 아버지-딸 관계에서의 분리되지 않은 동일성, 경계의 모호함과 대응시킨다. 더 나아가 피폴로는 데렌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영화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경계했던 것을 두고 그것이 오히려 방어기제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한편으로 데렌이 자신의 저서 <예술, 형식 그리 고 영화에 대한 생각들의 애너그램>에서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논증 대신 각 요소들이 관계 속에서 조직되는 애너그램적 구조를 제안함으로써 자신이 만드는 영화의 비선형성성의 논리를 (비)형식화하고자 시도했었음을 떠올려보면, 방어기제까지는 아니더라도 데렌이 줄곧 개인적, 정신적 투사(projection)로서의 영화 만들기와 이에 대한 이론화를 동시에 이어가려고 했음은 꽤나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두 작업을 서로를 부정하거나 감추는 위장으로 간주하기보다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서로 다른 층위에서 병행한 작업으로 본다면 어떨까? 자전적이고 정신적인 체험과 그것을 형식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데렌의 영화와 글쓰기 사이에서 나란히, 그리고 동시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영화와 글쓰기의 양립은 개인적 경험을 이론화하고, 이론적 사유를 다시 감각적 형식으로 되돌리는 순환 속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자기 이론적 충동의 수행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로런 포니에가 쓴 <자기이론: 자기의 삶으로 작업하기>는 ‘나’라는 주어를 담론적 공간으로 전유하는 동시대 문학, 예술, 이론의 장르적 경향을 다룬다. 개인적인 것, 사소한 것, 비밀스러운 것을 주관성의 영역 안에 두지 않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과 이론을 가져오는 시도들이 있었고, 이는 지난 10년 사이에 하나의 장르적 경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과 <물의 연대기>는 전적으로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약 8년에 가까운 영화의 제작 기간 동안 스튜어트가 소설 속에서만 골몰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물의 연 대기>에는 사적이고 주변부적인 개인의 일화들에 언어를 붙이고자 한 영화적 시도들, 20세기부터 이어져온 시청각적 표현의 실천을 부단하게 참조한 흔적이 있고, 이 참조점들은 영화의 이론적 갑옷이 된다. <물의 연대기>는 자기 이론의 모티프를 형식적으로 사유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기 이론의 극영화적 초상을 제시한다. 워드프로세서 앞에 앉은 리디아의 얼굴,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쓰는 여자의 초상. 단어 앞에서 숨을 참고, 써내려가고, 다시 참았던 깊은 숨을 내쉬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꺼내면서 쓰는 사람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얼굴. 그것만으로 <물의 연대기>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