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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블라디보스토크, 잃어버린 편도 티켓, 이병현 평론가의 <휴민트>

<휴민트>

박건(박정민)은 마지막에 살 방도를 묻는다. 관객은 그 유언을 조 과장(조인성)을 통해 전해 듣는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지인이 이 대목을 두고 재미난 해석을 하나 건넸다. 요지는 이렇다. 박건의 말이 채선화(신세경)와 함께 더 살고 싶어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공포에 떠밀려 그저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을 내뱉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총에 잔뜩 맞았으니 아프기도 할 테고….” 그 자리에서는 다들 피식 웃고 넘겼다. 나도 웃었다. 너무 단순하고, 그래서 더 엉뚱하게 들렸으니까.

그런데 웃음이 가라앉고 나니 질문이 바뀌었다. 이 해석은 왜 즉각 ‘말이 안된다’고 치부되었을까. 동시에 왜 누군가는 하필 그런 가설을 떠올렸을까. 어쩌면 <휴민트>가 그런 엉뚱함을 허용할 만큼, 한 가지 장르 규칙으로는 단단히 묶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대사 하나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어떤 야심으로 장르를 끌어다 섞었고 혹은 어디에서 그 야심이 멈췄는가에 있다.

<휴민트>는 겉보기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춥고 건조한 겨울을 닮은 냉전 스파이물톤이다. 그러나 핵심 서사는 듀나의 지적대로 호스티스 멜로에 가깝고, 그 이야기를 굴리는 방식은 흡사 옛 홍콩 액션영화처럼 질주한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알고 보니 제이슨 본이었는데, 그 사람이 ‘경아’(<별들의 고향>)를 구하기 위해 쌍권총을 휘두르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이 부조화는 분명 뜻밖의 재미를 낳는다. 분단국가라는 위태로운 현실을 배경으로 그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종횡무진 활약하는 액션 히어로. 이건 대리만족을 주는 즐거운 오락물이 될 수 있는 소재다.

적어도 류승완 영화라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법하다. 류승완의 가장 일관된 작법은 ‘뻔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장르를 섞는 감독이 아니라, 장르를 경유해 다른 데로 빠져나가는 데 골몰하는 감독이다. 많은 한국영화가 무거운 현실을 다루다 곧장 상투적으로 굳어버리는 지점에서, 그는 장르의 추진력을 빌려 그 현실을 뻔뻔하게 가로지른다. 그 실험은 자주 어처구니없는 쾌감을 낳는다. 물론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가 어떤 때는 <모가디슈>처럼 현실을 설득력 있게 경유하고, 어떤 때는 <군함도>처럼 과녁을 맞히지 못해 반감을 사는 것도, 바로 그 ‘안 뻔해지려는’ 추진력의 양면일 것이다.

여기서 <모가디슈>를 잠깐 떠올리는 건 의미가 있다. <모가디슈>는 분단영화 중에서도 남북이 공통 목표를 향해 협력하는 내용을 다룬 계열로 분류되는데, 이 계열 영화가 관객을 설득하는 방식은 결국 인물간 교류가 구축되며 신뢰가 쌓이고 일종의 ‘한민족 정서’가 형성되는 과정에 달려 있다. <모가디슈>에서는 깻잎을 떼어내는 것 같은 친숙한 행위가 차곡차곡 쌓이며 관객이 그 정서에 무리 없이 안착하도록 만든다. 반면 <휴민트>의 느슨한 전작 <베를린>은 이런 장치를 거의 쓰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남북한 관계자는 아예 공동 목표라는 것이 부재한 것처럼 보이고, 인물은 각자 개인적인 동기로 움직여 결말에 나타난 둘 사이 우정이나 연민에 갸우뚱해졌다.

그렇다면 <휴민트>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영화는 <베를린>에서 따로 놀던 첩보물의 냉기와 멜로드라마적 사연을, <모가디슈>로 증명한 ‘공통 목표’ 공식을 끌어와 한데 묶어보려 한다. 장르적 배합만 놓고 보면 꽤 매끄럽다. 문제는 그 성취가 다음 걸음으로 나아가기보다, 우리가 이미 이전 작업에서 확인했던 궤도 안에서 정리되고 만다는 점이다. 류승완 특유의 장르 혼합 실험은 더 능숙해졌지만, 그 실험이 무엇을 새로 발견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선명하지 않다.

오해하지 말길. 흥행 부진과 무관하게 <휴민트>는 앞서 말했듯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난 감독을 특징짓는 불균질한 장르 실험 덕분에 러닝타임 내내 ‘돈/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재밌는 영화가 맞다. 분명 번득이는 순간도 있다. 관절 통증을 유발하는 우지끈한 계단 신(<베를린>의 유리 천장이나 <베테랑2>의 남산 계단이 떠오르는), 자동차 드리프트 총격 신, 서부극이 떠오르는 대담한 정문 진입 신 등은 각자 뚜렷한 색깔을 갖고 있다. 의도를 잘 알 수 없는 뮤직비디오 같은 방탄유리 상자 장면을 제외하면 각각의 액션신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짜였다는 점도 좋다. 그러나 나는 류승완에게서라면 잘 짜인 액션 세트피스가 주는 감탄 그 이상을 바란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더 무리했더라면 어땠을까? <군함도>처럼 노골적인 반감을 사더라도, 하다못해 <베테랑2>처럼 어리둥절한 안티테제를 내세워서라도, 적어도 어딘가 먼 곳으로 가려는 욕심을 류승완에게서 보고 싶다. 나는 그가 중견이 된 지금도 여전히 안주하지 않는 감독이라는 사실이 귀중하고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타깝지만 ‘한국영화 르네상스’ 이후 별다른 동력을 찾지 못하는 우리 영화계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추진할 수 있는 여력이 그와 그의 동세대 감독에게 남아 있다고 봐서다.

바로 여기서 영화의 한계가 도드라진다. 최소한 이 영화가 류승완의 신작이라면 내가 기대하는 ‘안 뻔함’은 둘 중 하나다. 그것이 전작과 다른 방향으로 확실히 질주하거나 같은 공식을 쓰더라도 다른 정서 구조를 발명해 전작의 낡음을 넘어서는 것. 그런데 <휴민트>는 그 둘 모두가 아닌 지점에 머문다. 스파이물의 외피를 두른 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베를린>과 크게 다르지 않고, 총격전 액션이 발전한 것을 빼면 전작과 차별점이 희미하다. 하나 있다면 이번 작품의 남한측 인물인 조 과장은 먼저 나서서 죄 없는 여자를 구하려 한다는 정도인데, 이것은 <베를린>의 남한측 인물 정진수(한석규)보다는 설득력 있는 설정이지만 오히려 “내 애는 아니잖아”라고 ‘쿨’하게 내뱉던 정진수와 대비돼 영화를 더 낡아 보이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 탓에 극 중 채선화라는 인물은 핍박 받는 민족을 은유하는 전형적인 ‘여성-국가 알레고리’로 소비되고 마는데, 이는 전작의 련정희(전지현)가 차지했던 위치를 더욱 강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겪는 수난(두 작품 모두에서 ‘백인’으로 묘사되는 포식자가 행하는 성착취)은 곧 분단이 낳은 비극이자 침해당한 ‘영토화된 여성의 신체’로 취급되며, 두 남성 스파이가 마치 잃어버린 국토를 수복하듯 이 신체를 구원하려 뛰어드는 구도는 <깃발없는 기수>에서 허윤이 ‘양공주’를 보며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우리 같은 엽전들”이라는 대사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여기에서는 분단이라는 현실, 국제 정세라는 현실, 혹은 지금의 한국 관객이 체감하는 어떤 현실을 장르로 가로지르며 다른 감각으로 갱신하는 시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전작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다음 목적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이동이었다. <휴민트>는 그 이동의 약속을 되살리기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종착점 삼아 이미 봤던 궤도를 한번 더 밟는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실패보다는 우리가 기다렸던 것이 알고 보니 장거리 편도가 아닌 단거리 왕복운동이란 사실을 확인한 시시함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