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와 <국화꽃 향기>의 공통점은? 접점이라고는 없이 서로 멀어 보이는 두 한국영화는 모두 김희재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일찍이 충무로에서 활약하기 전부터 그는 만화 스토리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시나리오작가 입봉 이후에도 스토리 컨설팅 전문기업 올댓스토리를 설립하고 소설을 출간하는 등 늘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투신했다. 이어 김희재 작가가 도전한 이야기는 뮤지컬이다. 그는 꼬박 3년, 어쩌면 그 이상을 매달려 2024년 11월,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인내의 결실인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의 초연 무대를 올렸다. 그리고 2026년 4월, 초연의 호평에 힘입어 더욱 원숙해진 <스윙 데이즈_암호명 A>의 두 번째 시즌을 같은 극장에서 기약 중이다.
- 처음엔 올댓스토리에서 유한양행의 독립운동 콘텐츠 제작을 도우면서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비화를 접했다고.
당시 유한양행의 스토리 커뮤니케이션 컨설팅을 진행 중이었다. 유일한 박사의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대중에게 널리 알릴 방법을 고민하던 중 그분의 정신을 담은 뮤지컬 콘텐츠를 광복절 때마다 유튜브 채널 ‘유일한의 청년독립단’에 업로드했다. 유일한 박사의 애국심, 공동체를 향한 헌신과 정직 등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가치를 <새벽이 온다> <위국헌 신> 등의 클립에 담은 것이다. 그중 유일한 박사가 OSS(미국 전략사무국, CIA의 전신)의 지하 항일투쟁계획인 냅코 프로젝트에 특수공작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죽음을 각오하고 항일무장투쟁에 몸을 던졌는데, 이 사실을 유일한 박사가 살아 있을 땐 아무도 몰랐다고 하더라. 이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하고 싶었다. 처음엔 내가 영화계에서 주로 활동했으니 영화화를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특정 인물이 한 차례 영화화되면 같은 이야기가 또 만들어지기 어렵지 않나. 1천만 관객이 든다고 해도 개봉 후 시간이 지나면 옛 영화 취급을 받고 말이다. 유일한 박사의 이야기가 낡은 이야기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무대는 최소 2, 3년에 한번씩 업데이트가 가능하고, 넘버 하나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뮤지컬이어야 했다.
- 소재로 삼은 인물에 매료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유일한 박사의 인격에 가장 강하게 사로잡혔다. 왜 우리는 그가 미국에서 귀국해 기업을 경영하다 노환으로 돌아가셨다고만 기억할까. 냅코 프로젝트가 종전으로 인해 무산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일한 박사가 무장투쟁을 결심했을 때 나이가 50살이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뒤로한 채 식민 치하의 조선에 들어오고, 굴지의 CEO가 50대에 조국을 위해 무장투쟁을 결심했다는 실화가 놀라웠다. 유일한 박사는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언제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모든 걸 남기고 홀연히 떠나는 분이었다. 어떤 일에 위험 요소가 99.9%고 실행에 옮겨야 할 이유가 0.01%라 해도, 그는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달려갔다.
- 유일한 박사를 모티브로 한 일형 외에도 베로니카, 호메리, 펄벅 등 여성 캐릭터에게도 저마다 대의가 있다. 특히 베로니카가 일형의 자아처럼 기능하는 점이 흥미로운데.
독립운동사를 살피면 여성 독립운동가가 정말 많은데, 베로니카라는 17살 여성 투사의 이야기를 20년도 전에 써둔 적 있다. 서로 다른 두 성별이 부딪칠 때 생기는 격렬한 정서가 크다. 아무래도 그 시대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지 않았겠나. 일형만큼 강인한 여성의 목소리가 내면에 울려 퍼진다면 더 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곡가인 제이슨 하울랜드 또한 베로니카가 여성이어야 하는 이유를 한번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긴 것 같기도 하다. <스윙 데이즈_ 암호명 A>는 노아로 표상되는 다음 세대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책임 의식을 설득하기 위해서도 여성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 “더 이상 어린 친구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어”, “전쟁이 나쁜 건 아이들을 소모품으로 쓰면서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등의 대사가 ‘다음 세대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에 포함되나.
당연히. 50살의 한국 남성이 왜 전쟁 한복판에 뛰어들었을까. 아버지 내지는 기성세대로서 지닌 책임감이었다고 본다. 유일한 박사는 다음 세대에 무언가를 심지 않으면 이전 세대의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신념으로 산 분이다. 그 가치관이 각 인물들의 성격에 묻어나길 바랐다. 큰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전쟁의 조짐으로 전세계가 근심 중이다. 콘텐츠를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일형의 눈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똑똑히 마주하고자 했다.
- 일형이 냅코 프로젝트에 동참하기로 결심한 지점에서 작품이 끝난다. 관객에게 익숙한 극의 구조에선 캐릭터의 각성 이후가 스펙터클로 펼쳐지지 않나. 물론 냅코 프로젝트가 종전으로 인해 무산된 역사를 바꿀 순 없지만, 그럼에도 인물의 결단으로 작품을 끝맺는 점이 신선하다.
<실미도>를 쓸 당시에도 같은 딜레마에 봉착했다. <실미도>의 대원들도 결국 전투 한번 못 나가보고 끝나는 결말을 맞았으니까. 당시 강우석 감독님에게 들은 바론 내가 <실미도>를 쓰기 이전 이미 여섯명의 작가를 거쳤는데 그중엔 가상 역사로 결말이 나아간 버전도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재미를 위해서 절대 왜곡되어선 안되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역사적 인물이 결단을 내렸을 때, 그다음 궤적에 섣불리 상상을 덧붙이는 건 한 개인의 선택을 희석하는 꼴이다. <스윙 데이즈_암호명 A>는 일형의 결단이 서사의 클라이맥스여야 한다는 명확한 판단이 있었다. 이 클라이맥스에 관객이 함께 올라타 울림을 느낄 수 있도록, 냅코 프로젝트가 무산됐어도 관객이 일형의 각오에 설득될 수 있도록 스토리를 구성해갔다. 헌신은 결코 안전지대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을 희생했는지, 그 결기를 극으로서 증명한다면 이후 역사에 대해선 관객 몫으로 돌리는 편이 맞았다.
- 초연 당시 커튼콜에서 작품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엔딩크레딧의 형태로 띄웠다. 당신의 아이디어였나.
김태형 연출의 제안이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냅코 프로젝트의 지원자들이 정말 많다. 모두 우리 작품의 부제처럼 암호명으로 불렸고, 보안문서가 공개되어서야 존재가 밝혀졌지만 그들의 이름을 몰라 보훈 대상으로 추서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암호명’의 상징성이 크다. 주연배우들 이외의 앙상블이나 스태프들에겐 스포트라이트가 골고루 가지 못하는 게 현실 아닌가. 이름이 정말 중요한 뮤지컬이라면, 호명의 기회가 적은 이들의 이름까지도 비추는 길이 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도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