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고 타이틀 크레딧이 끝날 때쯤, 프레임 오른쪽 상단이 밝아지며 창이 드러난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옅은 빛은 실내에 드리워진 강한 어둠을 밝히지 못한다. 빛은 빅토르 에리세의 전작 <벌집의 정령> 마지막 장면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던 것과 같은 블루 빛이다. 주인공 아나가 창밖을 바라보며 ‘정령’들을 향해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의 시선을 보내던 바로 그 빛이다. <남쪽>의 역사적 배경은 1957년이다. <벌집의 정령>이 1940년대 스페인 내전 직후, 프랑코 독재정권 아래에서 피비린내 나는 복수와 공포, 억압이 짙게 드리워진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남쪽>은 프랑코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자유를 위해 파시스트 프랑코에 저항했던 공화주의자들의 희생과 투쟁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공포는 노골적인 폭력 대신 일상의 침묵과 망각 속으로 스며든 시간이다.
<벌집의 정령>에서 실내를 지배하는 가장 강렬한 빛은 옐로다. 벌집의 색과 닮은 이 빛은 현실을 외면한 채 체제에 순응하며 침묵하는 폐쇄의 빛으로, 패배감과 무력감이 되어 집 안을 가득 채운다. <남쪽>의 주인공 아구스틴은 옐로의 세계를 떠나 북쪽으로 왔지만,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패배감이 북쪽을 상실과 공허의 ‘블루’로 채운다. <벌집의 정령>에서 블루가 미래의 가능성과 희망의 빛이었다면, <남쪽>의 블루는 망각과 허무로 침잠한 정서다. 빛의 의미가 이동했다. 이 블루 빛은 딸 에스트레야에게 닿는다.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자, 화면 밖에서 엄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엄마,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순간, 에스트레야의 방 안 벽면, 침대 곁으로 미약한 옐로 빛이 천천히 닿는다. 그녀는 침대 밑에서 아빠의 추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꺼내 바라본다. <남쪽>에서 옐로 빛이 다시 등장하는 장면은 아빠만의 공간인 다락방에서, 아구스틴이 에스트레야에게 추를 보여줄 때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늘 다락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에스트레야는 아빠가 홀로 칩거하는 그 다락방을 궁금해한다. 몰래 엿보려 하지만 엄마는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그 방에는 모아둔 힘이 있고, 그 힘이 빠져나가면 안되기 때문에 아빠가 문을 잠그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힘을 잃으면 아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 방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어느 날 아구스틴은 에스트레야를 무릎에 앉히고, 수맥을 찾고 그 깊이를 알려주는 추의 사용법을 가르쳐준다. 배경은 완전한 블랙에 가깝고, 창을 통해 들어온 옐로 빛만이 두 사람을 강하게 비춘다.
<남쪽>에서 어둠은 단순한 ‘없음’의 표현이나 빛을 받는 인물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어둠은 기억이 묻어 있는 잠재된 공간, 잊힌 시간의 층위다. 투쟁과 저항의 역사는 긴 시간 억압되어 어둠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아구스틴은 북쪽에서 그 기억들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문다. 그에게 추는 수맥을 탐지하는 물리적 도구이면서, 스페인의 현대사를 어둠 속에서 끌어올리는 매개이기도 하다. 다락방 안에서 그는 딸에게 사라진 것들의 위치와 깊이를 알아내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인지되려면 배경이 드러나 있어야 한다. 배경은 카메라의 이동을 가늠하게 하는 상대적 기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두운 배경에서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감지하기 어려운, 비효율적인 무빙이 된다. 그런데 <남쪽>에서는 이 어둠 속에서 카메라가 부드럽고 정교하게 움직인다.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지하듯, 마치 손끝으로 더듬듯 어둠의 세계를 쓰다듬는다. 이때 부녀에게 닿는 옐로 빛은 <벌집의 정령>에서와 같은 빛이 아니다. <남쪽>에서 옐로는 어둠과 함께 잊혀가던 것들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유령’이다. 억압의 시대를 통과하며 남은 내면의 화상은 지워지지 않고 노랗게 곪은 채로 남아 있다.
에스트레야는 아빠가 알려준 대로 추를 들고 방 안을 천천히 움직인다. 추가 이끄는 방향을 따라 어둠 속으로 들어가, 옐로 빛이 스며드는 창쪽으로 향한다. 창에 가까워질수록 추가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한다. 유령들의 흔적을 찾아낸 듯, 아구스틴은 그 자리에 멈추라고 말한다. 그리고 창밖에서 들어오던 빛이 점점 줄어들며 방 안은 어둠으로 완전히 덮인다. 이 다락방의 옐로는 어둠에 잠겨 있던 기억이 다시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순간의 빛이다. <벌집의 정령>에서 폐쇄와 억압, 체념의 옐로가 <남쪽>에서는 망각을 거부하는 ‘기억의 빛’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 빛은 이후 영화에서 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이후 아구스틴 주변으로 블루 빛이 더욱 짙게 드리우고, 그 안으로 점점 스며든다. 그가 붙잡으려 했던 기억들 역시 서서히 사라진다.
에스트레야는 아빠의 책상에서 ‘이레네 리오스’라는 이름이 빼곡히 적힌 봉투를 발견한 뒤, 아빠가 극장에 들어가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다. 그녀는 아빠가 보러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이름도 ‘이레네 리오스’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아구스틴은 ‘라우라’라는 여인에게 편지를 쓴다. 숨어 지내는 그녀가 배우의 이름을 예명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 아구스틴은 에스트레야와 함께 호텔 식당에서 식사한다. 그 자리에서 에스트레야는 아빠에게 이레네 리오스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는 영화를 기억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구스틴은 과거를 점점 망각하며 기억의 감각마저 잃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한다. 폐쇄된 사회는 고통의 역사를 망각하게 하고, 자기 존재의 기원마저 잊게 만든다. 아구스틴은 망각의 블루를 끝내 건져내지 못한 채 색이 빠진 상태에 도달한다. 이제 더 이상 옐로도, 변이된 블루도 그에게 닿지 않는다. 길가의 잘 보이지 않는 구석이 그의 마지막 장소가 된다. 고통마저 잊힐 때 남는 것은 텅 빈 마음뿐이다. 삶을 붙잡을 감각조차 사라진다. 망각은 외부의 폭력에서 비롯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본능이기도 하다. 단순한 패배라기보다 기억을 유지할 힘이 소진된 상태다. 프랑코 체제하의 스페인은 개인에게 ‘기억하지 말 것’을 끊임없이 강요했다. 그 강요된 침묵 속에서 오래 버티다 보니 결국 자신의 고통을 지탱하던 핵심적인 기억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영화의 초반으로 돌아가보자. 침대 위에 앉아 아빠의 추를 들고 있던 에스트레야의 장면. 그 장면은 아구스틴의 죽음을 내포하고, 동시에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영화는 시간의 선후를 뒤집어 이 장면을 먼저 배치한다. 이때 그녀의 뒤에 닿은 옐로 빛은 과거에 짓눌린 유령이자, 아빠의 마지막 잔존으로 남은 기억의 빛이다. 에스트레야는 아빠의 소지품에서 남쪽행 기차표를 발견한다. 그녀는 남쪽으로 향하려 한다. 아빠는 망각 속에서 오래 버티다 결국 무너졌지만, 그가 품고 있던 기억은 딸에게 전이되었다. 그녀는 아직 그 기억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기억을 향해 남쪽으로 움직인다. 결국 <남쪽>은 망각에 맞서는 영화다. 망각에서 기억으로 이동하는 영화다.
빅토르 에리세가 31년 만에 만든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기억의 저항은 필름이 사라진 디지털 시대, 형광등의 블루 빛 아래서 다시 태어난다. <벌집의 정령>(1975)에서 집 밖에만 머물던 블루는 <남쪽>(1983)에서 아구스틴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망각의 색이 되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에서 그 블루는 마침내 안으로 들어온다. 영화 속 시간으로는 72년, 에리세의 생애로는 5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영화감독 미겔은 20년 전 촬영 중 사라진 배우 훌리오를 찾아 나선다. 그가 머무는 모든 공간에는 블루가 자리한다. 필름 보관소의 형광등, 소품 창고의 벽과 문,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까지. 사라진 것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마다 블루가 깃든다.
다만 그는 그 빛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둠 앞에서 행동하지 못했던 <벌집의 정령>의 어른들, 블루 속으로 침잠해간 아구스틴과 달리 그는 끝내 찾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50년 전 블루 빛 앞에서 ‘정령’을 기다리던 소녀 아나는, 70여년의 시간을 건너 이제 ‘영화의 정령’을 찾는다. 사라진 배우를 따라간 끝에 미겔이 도착한 곳은 <남쪽>의 인물들이 그토록 그리워했지만 결코 닿지 못했던 스페인의 남쪽이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놓인 요양원. 그곳에서 그는 기억을 잃은 훌리오를 발견한다. 남쪽의 따스한 옐로 햇살이 스며드는 공간에는 블루의 문과 창이 함께 어우러져 상처와 회복, 기억과 망각의 평형을 이룬다. 훌리오는 미겔을 기억하지 못한다. 미겔은 사용되지 않는 오래된 극장을 빌려 미완성으로 남은 훌리오 주연의 영화를 상영한다. 스크린 위로 잊혔던 장면들이 다시 빛으로 투사된다. 영화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두 남자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그들의 얼굴 위에 반사된 블루 빛이 가득 번진다.
영화는 필름 위에 기억을 새기고, 그 기억을 보존한다. 빛은 인간에게서 물질로 옮겨가며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형태로 남는다. 그 빛은 고통의 역사 속에서 사라진 모든 것들을 기억하며 스크린 위에서 다시 빛난다. 빅토르 에리세는 빛의 전이를 통해 스페인의 역사를 필름 위에 기록하고, 세편의 영화를 하나의 빛의 서사로 남겼다. 잊히지 않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