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평] 선택의 힘과 무게를 곱씹으며, 김소희 평론가의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2023, 이하 <우리에게는>)는 견뎌야 하는 영화다. 감독 파올라 코르텔레시가 연기한 주인공 델리아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어머니다. 그녀의 하루는 남편의 폭력으로 시작된다. 단지 남편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나 아침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고개가 꺾일 정도로 세게 따귀를 맞는다. 이후에도 델리아를 향한 부당한 폭력은 이어진다. 혹자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묘사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이탈리아에서 여성참정권이 보장된 첫해인 1946년을 배경으로 삼는다. 하지만 델리아가 남편 이바노(발레리오 마스탄드레아)에게 지속해서 폭행에 시달리는 묘사는 영화 속 배경과 동시대에 공개된 영화에 견주어도 과도한 면이 있다. 가령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에서 안토니오는 아내 마리아에게 의지한다. 안토니오가 일자리를 얻는 데 자전거가 필요하자, 마리아는 사용하던 이불보까지 모조리 걷어 전당포로 향한다. 둘은 가난하지만, 다정한 부부다. 물론 관객이 안토니오의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가 충분히 옳은 사람이어야 했다.

<우리에게는>이 당시에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인물을 중심으로 삼아 재현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가정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삶을 조명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는 폭력을 언급하는 한편, 이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와는 거리를 둔다. 관객은 폭력을 인식하는 동시에 폭력에만 초점을 두지 않도록 권유받는다. 델리아의 상황을 가혹하게 묘사한 이유는 시대적 배경에 따른 정밀한 묘사이기보다는 서사의 필요에 따른 묘사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델리아의 비참한 삶은 그가 자식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의 새출발을 선택한 데도 비난할 수 없게 만든다. 아니, 제발 아무나 붙들고 떠나기를 염원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예상된 결말을 비틀어 미래를 위한 선택을 기재한다. 러브 레터처럼 보였던 종이는 여성의 투표를 위한 종이다. 유예된 여성참정권에 관한 이야기는 일종의 반전처럼 제시된다.

이러한 반전은 가정폭력 묘사에 관한 의문을 불러온다. 델리아를 향한 이바노의 폭행은 결말의 통쾌함을 위한 초석처럼 보였으나, 결말 이후에도 폭력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투표권을 행사한 뒤에도 델리아는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이 있는 가정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녀는 전보다 더 큰 폭력을 당할 수도 있다. 마지막 장면의 통쾌함은 개인적인 선택에서 정치적인 선택으로, 개인의 선택에서 연대하는 선택으로의 이동이 주는 반전의 쾌감일 뿐이다. 결국 델리아의 선택은 내일을 위한 고결한 희생과 같지 않은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반전의 통쾌함으로 해소되지 않는 우려가 남는다.

폭력, 그 무의미의 의미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결말을 중심으로 돌아보면 델리아가 겪은 부당한 폭력의 의미를 전환적으로 되새기게 된다. 만약 델리아가 다른 남자와의 도피를 선택했다면 폭력은 그 선택의 중대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투표권을 행사하는 선택은 남편의 폭력과 뚜렷한 인과관계로 묶이지는 않는다. 선택은 어제의 원인보다는 내일의 결과에 초점을 두는 행위이므로, 그 시선은 이바노보다는 딸 마르첼라(로마나 마조라 베르가노)를 향한다. 투표권이 생기거나 투표권을 행사한다고 해서 당장 아내를 폭행하던 남자의 행동을 교정할 수는 없다. 다만 선택은 행동의 원인이라는 중심 자리에서 남편의 폭력을 박탈한다. 남편을 원인의 자리에서 소거하는 것, 그것이 영화의 결말이 지니는 통쾌한 연대감의 한 원인일 수 있다. 이를 보여주듯 마지막 장면에서 이바노는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허둥대다가, 결국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스스로 밀려난다.

남편의 폭력은 델리아가 선택하는 이유라기보다는 선택에 훼방을 놓는 방해물에 그친다. 투표하는 행위는 간단할지라도, 투표소로 향하는 동선은 간단치 않다. 델리아의 동선은 남편에게 보고해야 할 사항이며, 투표를 위한 이동 역시 마찬가지다. 델리아가 남편과 상의하는 이상, 그녀의 행동에 남편의 승인 여부가 개입하게 된다. 남편에게 들킬세라 내내 전전긍긍하던 델리아의 행동은, 투표에 남편의 승인을 기재하지 않기 위한 분투로 읽힌다. 한 사람의 몫으로 존재하는 투표의 의미는 델리아의 온전한 선택으로 지켜진다. 투표하러 가는 날의 힘겨움에 관한 묘사는 여성이 참정권을 얻기까지 겪어온 어려움에 관한 은유다. 사건의 정점에는 돌봄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임에도 여전히 권위적인 시아버지의 존재가 있다. 델리아의 시아버지는 투표를 앞둔 순간 사망한다. 여기에서 장례식은 그녀의 동선을 제약하고 집에 묶어두는 사건이다. 델리아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 갈 자유를 제약하는 것, 그것이 영화에서 강조된 폭력의 정체다. 델리아가 걸어 나가는 걸음에 따라 화면비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타이틀시퀀스는 그녀의 동선이 세상의 변화와 조응함을 드러낸다.<우리에게는>은 코미디를 표방한다. 영화의 장르적 색채는 폭력 묘사와 불편한 동거를 지속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바노가 델리아의 뺨을 때리는 순간, 경쾌한 음악이 흐르며 뮤지컬로의 전환이 이뤄진다. 델리아는 잠시 얼굴을 가격당한 채로 멈춰 있다가 탁자에 놓인 빗을 집어 들며 천연덕스럽게 동작을 이어간다. 묘사된 장면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듯 보이는 뮤지컬적 채색은, 기대와는 달리 불쾌함을 강화한다. 폭력 장면을 순화하려는 의도가 도리어 저항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델리아가 뺨을 맞는 장면으로 극을 열기에 관객은 무방비 상태에서 가격당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 충격은 관객이 인물과 일체화된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뺨을 맞는 동작은 네오리얼리즘을 요약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비토리오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에서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지 못한 안토니오는 다른 이가 세워둔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다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힌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맞는다. 비장한 곡조를 내면화한 배우들의 얼룩진 얼굴은 상황이 주는 모욕감을 강화한다. 가해자는 조직으로 움직이며, 위선적인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가린다. 반면 도둑질에 내몰린 피해자인 안토니오에게 행인의 눈을 가릴 조력자가 없다. 대신 무력한 목격자로 아들 브루노가 존재한다. 남자의 사연을 알지만, 도울 수 없는 관객의 상황을 브루노는 대변한다. 뺨을 맞는 동작이 상기하는 다른 작품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백인 추장>(1952)이다. <백인 추장>에는 <우리에게는>과 닮은 듯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신혼여행차 로마를 방문한 반다에게는 남편 이반이 모르는 꿍꿍이가 있다. 반다는 이반 몰래 종이를 꺼내 보며 미소를 띠는데, 그 종이는 ‘백인 추장’ 역으로 유명한 배우 리볼리에게 받은 러브 레터다. 반다는 이반 몰래 리볼리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나선다. 결국 리볼리와 만나는 데 성공해 꿈같은 하루를 보내지만, 그 대가는 처절하다. 반다 역시 따귀를 맞는데, 그의 뺨을 때린 건 남편 이반이 아닌 리볼리의 아내 리타다.

<우리에게는>은 <자전거 도둑>의 견뎌야 하는 현실 혹은 <백인 추장>의 도피하는 환상과 현실로의 복귀와는 다른 길을 택한다. 영화에는 춤이 있다. 춤은 현실과 환상의 한가운데에 있다.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기어이 춤을 발굴하는, 일상에 발붙인 춤이다. 춤은 주로 폭행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이바노의 폭행은 델리아와 이바노가 추는 이인무로 승화된다. 이러한 묘사는 델리아에게는 가혹한 측면이 있다. 델리아가 자신을 향한 폭력에서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춤의 공모자라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인무는 자기 풍자적인 희화화의 일종으로 상류층의 사교 문화에 대응하고 이를 풍자하는 현실의 춤이다. 이인무를 추는 장면은 핀 조명으로 전환되며 무대극처럼 꾸며진다. 폭력의 과정은 집 안의 숨죽인 아이들과 창문 너머의 마을 여자들에게 중개되며 이 춤의 공모자가 단지 두 사람이 아님을 드러낸다. 다자간의 춤에 초대된 이들 중에는 아마도 배석이 그리 달갑지 않을, 카메라 너머의 관객도 있다.

립스틱을 지우는 행위 역시 일종의 춤으로, 상반된 의미 속에 드러난다. 한번은 남성이 여성의 얼굴에서 립스틱 자국을 강제로 지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다른 한번은 여성들이 스스로 립스틱 자국을 지운다. 마르첼라의 약혼자는 립스틱 자국을 지우며 마르첼라가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음을 표시한다. 여성들은 투표용지를 봉할 때, 봉투에 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화장을 지운다. 수건과 스카프, 무엇도 없다면 델리아처럼 손등으로 쓱쓱 지운다. 여기에서 립스틱 자국을 지우는 행위는 남성의 통제가 아닌 자기통제의 행위로 바뀐다. 립스틱을 강제로 지우는 사회에 대응하는 방식은 립스틱을 바르는 데만 있지 않다. 립스틱을 지우는 행위가 꼭 사회의 억압을 내면화한 자의 선택인 것도 아니다. 립스틱 지우기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변화하는 의미망에 놓인다. 모든 행위에 의미를 덧씌우는 관습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지만, 그 의미를 품고도 최대한 가벼워질 수 있다.

뒤바뀐 자리에서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춤은 폭력을 삼킨 외침과도 같은 강렬한 얼굴의 춤으로 향한다. 델리아는 그가 투표장에 다다랐을 무렵부터 흐르던 외화면 음악 중간에 끼어들어, 가수의 허밍에 맞춰 입을 꾹 다문 채 노래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가 영화 내부의 연기자일 뿐만 아니라 바깥의 연출자이기도 함을, 영화의 감흥을 깨지 않고도 유머러스하게 표시하는 순간이다. 역사적인 투표가 이뤄진 현장에는 딸 마르첼라와 남편 이바노 역시 배석해 있다. 두 사람은 러브 레터를 위장한 종이의 다른 수신자이기도 했다. 이바노는 서스펜스의 실행자로 델리아의 행동을 중단하기 위해, 마르첼라는 델리아의 행동을 독려하기 위해 그곳에 도착한다. 델리아와 마르첼라가 눈물과 웃음이 공존하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은 내일이 어제에 건네는 다른 시간대의 응원처럼 보인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인용되는 안나 가로팔로의 말이 드러내듯, 러브 레터가 결국 투표를 위한 서류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투표 종이는 여전히 러브 레터다.

투표를 위한 장소 가운데에는 2층 높이에 난 좁은 문으로 향하는 작은 단상이 놓여 있다. 사람들은 양쪽으로 뻗은 계단을 올라 문을 통과해 투표소로 향한다. 침묵과 저항의 마지막 춤도 이 단상에서 펼쳐진다. 이는 결혼식 주인공을 위한 작은 무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래 단상에 올라야 했을 이는 마르첼라다. 편지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영화의 주된 서사이자, 델리아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마르첼라의 혼인이었다. 투표 장면은 예고된 결혼식을 대체한다. 이를 토대로, 영화의 결말은 킹 비더의 <스텔라 댈러스>(1937)의 변주로 읽힌다. 스텔라의 딸 로렐은 상류층 남성과 결혼을 앞둔 상태다. 자신의 천박함이 로렐의 앞날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스텔라는 의도적으로 딸과 멀어진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스텔라는 자신이 삭제된 결혼식을 담장 밖에서 지켜보다가 은밀한 비밀을 자랑스레 간직한 채 홀연히 떠난다. <스텔라 댈러스>에서는 딸의 결혼을 위해 지신을 소거했던 어머니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의 델리아는 딸을 결혼으로 내모는 대신 공부를 지속할 자금을 주고, 특별한 예식을 위한 단상에 자신을 올린다. 이 결혼식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삶을 위탁하는 방식이 아닌, 변화된 삶을 위한 즉흥극이다. 마르첼라는 무대 바깥에서 델리아를 지켜보지만, 이는 소거가 아니라 자리바꿈이다. 결혼하는 딸을 지켜보며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 어머니는 단상 위에 있고, 딸은 단상 아래에서 감격에 겨워 어머니를 올려다본다. 인생의 끝이 그렇듯 이야기의 끝은 종종 결혼식이거나 장례식이다. 중단된 결혼식과 갑작스러운 장례식을 지나, 관객에게조차 비밀스럽게 지켜진 투표 의식은 그 사이의 다른 길을 연다. 투표함의 작은 틈은 내일이 비쳐 드는 좁은 틈이다.

애석하게도 영화가 그린 내일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 <공화, 돌봄, 녹색>의 공저자인 안숙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무급 노동으로서 돌봄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짚었다. <우리에게는>은 델리아의 동선을 따르는 가운데, 일하는 여성이 당하는 부당한 상황과 가난의 의미를 부지런히 수집한다. 가정 내에서 돌봄의 가치가 훼손당하듯, 바깥에서도 돌보는 여성의 일은 박한 취급을 받는다. 이는 우산 가게에서 근속한 델리아가 신입 남성보다 낮은 급여를 받는 상황으로 단적으로 드러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성별 임금격차 1위라는 불명예를 유지해온 한국을 비롯해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돌봄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가 영화 속 ‘내일’의 일부임을 인정한다면, 그리하여 우리에게도 아직 내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