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마음을 읽는 일, 삶을 받아들이는 일 - <녹나무의 파수꾼> 이토 도모히코 감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용의자 X의 헌신> 등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처음으로 애니메이션화됐다. 부당한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된 청년 나오이 레이토는 친구의 꾐에 넘어가 회삿돈을 훔칠 계획을 세우지만 이내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때, 초면의 변호사가 나타나 그를 구해준다. 이 구원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시작된 걸까. 변호사가 알려준 곳으로 찾아간 레이토는 어머니의 이복언니이자 대기업 야나기사와 그룹의 리더 야나기사와 치후네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거절할 수 없는 그의 한마디. “월향신사에 있는 녹나무의 파수꾼이 되어주세요.” 영험한 분위기의 녹나무에는 비밀 하나가 있다. 염원을 남긴 이의 생애를 환상 속에 목격하고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것. 다만 두 가지 조건이 붙는다. 가족관계일 것. 둘만의 추억이 있을 것. 녹나무를 둘러싼 미스터리는 다양한 사람과 사연을 마주하며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타인을 이해하길 번거로워하는 세상에서 <녹나무의 파수꾼>은 어떤 질문을 남길 수 있을까. 심도 깊은 소설을 애니메이션의 장면으로 녹여낸 이토 도모히코 감독에게 물었다.

- 일본에서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원작 소설이 처음으로 애니메이션화됐다. 첫 작업인 만큼 작품이 성사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를 설득했나.

감사하게도 애니플렉스에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님과 친분이 두터운 분이 있어서 원활하게 착수할 수 있었다. 오히려 히가시노 작가님이 “이 소설은 애니메이션이 더 잘 어울린다”라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다. 본격적으로 일을 맡은 이후에는 애니메이션 제작팀에 모든 것을 일임하셨다. 어떤 과정에서도 작가님이 ‘노’(No)를 외친 적은 없다. 다만 원작 소설이 워낙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이 있다. 바로 녹나무의 존재감과 그와 관련된 판타지 요소들이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기원 그 자체를 영화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시각적으로 고조시키는 게 중요했다. 원작 소설이 실사영화로 전환되는 순간 등장인물이 구체적인 한 사람으로 국한되는 느낌을 주는데 애니메이션은 그런 제한된 느낌을 피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녹나무의 파수꾼>을 자유롭게 표현해보려 했다.

- 전작 <나만이 없는 거리>, 시리즈 <부호형사 Balance: UNLIMITED>에서부터 함께 발을 맞춰온 각본가 기시모토 다쿠와 이번에도 함께했다. 긴 소설을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담기 위해 더하거나 뺀 지점이 있다면.

가장 먼저 나오이 레이토와 야나기사와 치후네의 이야기를 영화 중심에 두려 했다. 역할이 겹치는 인물들은 과감히 통합시켰다. 원작 소설에서는 사지 가문의 에피소드가 더 길게 펼쳐지지만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만 분량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원작에서 녹나무의 수수께끼를 말하는 인물이 사지 유미였던 터라 그 역할을 주인공 레이토에게 줬다. 대신 유미에게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활약하게 만들어 분량을 늘렸다. 원작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던 레이토의 어머니를 살짝 보여줬던 건 기시모토 다쿠의 아이디어였다.

- 영화 속 주인공 나오이 레이토의 캐릭터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너무나 준수하고 핸섬한 얼굴 덕분에 레이토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따라가게 되는데. (웃음) 레이토가 지닌 미형에는 어떤 특성이 반영되었나.

레이토가 그렇게 잘생겼나? 사실 그럴 의도는 없었다. (웃음) 주인공이라서 어느 정도 멋진 모습이 부분적으로 필요하지만 정확하게는 한심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미움받지 않고 귀엽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캐릭터디자인을 맡은 야마구치 쓰바사와 이타가키 아키코에게 요청하긴 했다. 미모가 있다면 그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게 아닐까. 어머니가 미인이라는 설정이었다.

- 영화 초반 등장하는 장엄하고 원대한 녹나무는 영화의 상징이자 초반부터 극의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시그니처 이미지로 작동한다. 녹나무의 신성함과 미스터리함을 더하기 위해 어떤 지점을 강조했나.

다키구치 미술감독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나 신성함을 신경 썼다. 일본에는 신목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를 신처럼 취급한다. 그 신목이 지닌 거룩한 이미지를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해보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보이는 이끼가 자라난 정도, 빛을 받을 때 나뭇잎의 묘사 방법 등 디테일한 구석이 이를 위한 것이었다. 연출적으로 다양한 시간대의 녹나무를 보여준 것도 각기 다른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다.

- 실제로 <녹나무의 파수꾼>은 다양한 시간대의 실내외 빛을 유려하게 활용한다. 아침 햇살, 늦은 오후의 볕, 흐린 날의 하늘, 샹들리에 조명, 환상 속의 빛까지. 라이팅 작업에서 가장 공들였던 장면을 꼽아본다면.

최근 애니메이션의 그림자는 비교적 심플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그것을 역산해 이용하는 방식으로 라이팅을 설계했다. 이제는 극영화에서도 색보정 작업이 당연한 과정이 돼서 현실의 색조가 사용되는 일이 없는 시대다. 따라서 주인공의 기분과 감정을 반영한 색을 유연하게 설계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변호사와 접견할 때 레이토는 거의 색이 없다. 모노톤에 가깝다. 하지만 녹나무가 있는 장소에 가면서 조금씩 다채로운 색깔을 더해간다. 이 과정을 더 면밀하게 들여다봐주면 좋겠다.

- 굉장한 귀여움으로 마음을 녹이는 존재가 있다. 소쩍새 코노하즈쿠다. 앙증맞은 눈망울이 돋보이는 소쩍새 캐릭터가 완성되기까지는 어떤 논의가 이어졌나.

레이코가 신사 관리소에서 혼자 생활하며 혼잣말이 많아진다. 이 여백을 채우기 위해 레이코가 편하게 말을 걸 수 있는 마스코트가 있으면 자연스러울 거라는 의견이 나와서 받아들였다. 이런 캐릭터는 어중간하게 사실적이면 재미가 없다. 만화적이더라도 완전히 귀여운 디자인이어야 제 몫을 잘 소화한다. 그렇게 <케이온>을 작업한 호리구치 유키코 애니메이터에게 부탁했고 그가 이 제안을 응해줬을 때 바로 승부가 결정났다고 확신했다. 호리구치 애니메이터는 나의 전작 <헬로 월드>를 함께했다. 그가 완성한 코노하즈쿠는 정말이지 너무 귀엽다. 가능하다면 인형으로 만들고 싶다. 만들어줄 분 어디 안 계신가요? (웃음)

-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던 레이토는 어머니의 이복언니이자 자신에게 이모인 치후네를 만나 뒤늦게 제대로 사는 법을 배운다. 제대로 먹는 법, 제대로 입는 법, 제대로 대화하는 법. 가족의 돌봄 속에서 일찍이 배워야 했던 것들을 하나씩 배워간다. 늦을지언정 가족으로부터 삶을 배워가는 레이토의 모습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일본에서도 빈부격차로 인해 레이토 같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아마 전세계가 비슷하지 않을까. 사실 가르치는 역할은 반드시 피가 이어진 가족이 아니어도 괜찮다. 다만 레이토 같은 어린 세대를 이끄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는 세상이길 바랐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바람이 이 관계에 담겼다. 두 사람은 궁극적으로 스승과 제자 관계와 같다. 영화로 비추면 <스타워즈>의 제다이와 파다완 같은 사이랄까. 제다이는 왕왕 길을 잘못 들기 때문에 치후네 또한 의지와 달리 잘못된 길에 들어서곤 한다. 그럴 때면 파다완인 레이토가 그 결핍을 잘 보완해주고 보조해준다. 고독한 인간은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 안심한다. 염원을 받은 상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 이야기 중간에 갑자기 쏟아지는 랩 장면. 다소 당혹스럽기도 했다. (웃음) 레이토의 고뇌를 드러내는 방식이 힙합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의도가 궁금해지는 장면이다.

가난한 사람, 불우한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랩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 래퍼 기쓰네비는 <27세의 리얼>이후 ‘OO세의 리얼’ 시리즈를 계속 만들고 있다. 세상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노래에 쏟아내는 것이다. 랩이 흘러나오는 장면은 그런 느낌을 불어넣고 싶었던 거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O.S.T인 <Hide>(feat. @seezyn)의 느낌을 떠올려 달라

- 아무리 가족이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알긴 어렵다. 타인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함께 있기보다 혼자 있기를 더 선호하는 1인 사회 속에서 염원을 남긴 이의 생애를 바라보게 하는 <녹나무의 파수꾼>은 어떤 의미를 전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렇다. 나도 혼자 있는 걸 선호하는 유형의 인간이지만 이 나이대가 되면 슬슬 인생의 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바라게 되는 것 아닐까. 혼자 살아간다고 내가 모르는 사이 타인의 마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녹나무의 파수꾼>을 보면서 그 마음의 진의가 무엇인지 돌이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저 세상이 따뜻해지면 좋겠다.

<녹나무의 파수꾼>의 장소들

<녹나무의 파수꾼>은 주요 인물이나 녹나무가 등장하는 거대 풍경뿐만 아니라 배경 속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작업했다. 이토 도모히코 감독의 섬세한 가치관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현장 답사를 갔던 영화 속 장소들(제국 호텔, 카페, 라임원, 야나츠 호텔, 야나기사와 저택 등)을 현실과 똑같이 구현하기 위해 디테일을 신경 썼다. 배경 작화 속에서 공간 구현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 배경을 완성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곳은 신사 관리소다. 현장 답사를 할 수 없던 상상의 장소로서 신사 관리소는 그곳에 머무는 레이토를 기준으로 해 이곳에 어떤 사람이 머물고, 평소엔 어떤 루틴을 이어져왔을지 상상을 펼치며 프로덕션을 더해갔다.

사진제공 애니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