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 질런홀 감독의 <브라이드!>를 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이야기보다 이미지다. 사건의 흐름이 한데 모이지 않고 줄거리도 손쉽게 뽑아내기 어렵다.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떤 갈등이 이어졌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관을 나와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다시 소환된 신화 같은 캐릭터들, 농밀한 공기와 색채, 음악이 만들어낸 볼륨, 집요하게 클로즈업되는 얼굴, 그리고 춤이라 해도 될 만한 몸의 움직임과 힙한 코스튬. 마치 이야기를 이해하지 않아도 좋으니 장면을 체험하고 즐기도록 유도하는 듯하다. 관객은 서사를 따라가다 말고 감각의 흐름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 지점에서 플라스틱 시네마(Plastic Cinema)라는 개념을 불러와 이름 붙여 볼까 한다. 일상언어에서 플라스틱이라는 말은 흔히 인공적인 재료를 의미하지만, 원래는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뜻에 가깝다. 미학의 역사에서 이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왔는데 그리스어 플라세인(plassein)에서 유래한 이 말은 ‘형태를 빚는다’는 뜻을 포함한다. 본래는 형태를 만들고 변형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미술사에서 조각이나 건축, 설치 작업 등을 플라스틱 아트(Plastic arts), 즉 조형예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료를 다루어 새로운 형상을 조직하는 예술이라는 뜻.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영화 역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에 머물지 않고 빛과 색, 몸과 공간으로 형태를 빚는 조형예술로 이해할 수 있다. 의미보다 감각을, 서사의 완결성보다 장면의 조형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영화. 관객은 줄거리를 잇고 사건을 해석하는 대신 장면이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자극적인 디자인으로 영화를 경험하게 된다. 영화관이 전시관이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이야기의 재료를 다루는 방식을 보자. 이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서사들을 가공이 가능한 재료로 취급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져온 모티프는 고전 서사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기보다 그 이야기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를 화면에 옮겨와 새로 배열한다. 익숙한 신화는 영화의 형태를 빚는 재료가 되고 서로 다른 시대의 감각이 작품 안에서 충돌하며 낯선 이미지의 질서를 만든다. 이 태도는 재료를 다루어 새로운 형상을 조직하는 조형예술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영화 속 시대 분위기 또한 조형 전략의 하나다. 대공황기 미국을 떠올리게 하는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에서 그렇다. 거리 풍경과 쇼 무대 같은 공간, 위험을 낭만으로 소비하는 정서, 범죄조차 하나의 볼거리로 대하는 태도는 당시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신화적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 시기의 문화 환경은 역사적 사건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범죄 서사를 낳았고, 보니 파커와 클라이드 배로 같은 인물들을 현실과 다른 스타일의 전설로 자리 잡게 했다. 보니와 클라이드를 연상하게 만드는 아이다와 프랑켄슈타인 역시 체제의 바깥에서 보란 듯이 활보하며 폭력과 범죄를 퍼포먼스처럼 펼쳐 보인다. 사랑과 반항, 쇼맨십이 뒤섞인 모습은 낭만적 범죄자 신화가 지닌 화려한 볼거리를 다시 살려낸다. 범죄는 이미지로 기억되고, 패션과 포즈, 장면의 분위기가 서사를 대신한다. 이 특징은 개별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죽은 아이다(제시 버클리)가 새 생명을 얻고 다시 움직이는 순간, 조명은 얼굴을 극적으로 강조하며 피부에 그려진 검은 무늬를 비춘다. 인물은 화면에 배치된 조형 요소로 기능하고 관객은 얼굴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를 접한다. 색과 장식물로 가득한 공간에서 파격적인 코스튬을 한 인물이 춤을 추듯 움직이는 장면은 과장된 몸짓을 아름답게 만들며 거기에 음악이 더해지면서 인물들의 행위는 펑키한 퍼포먼스가 된다. 이야기의 진행보다 화면의 리듬과 형태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장면은 서사 진행과 무관한 상태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완결된 이미지로 남는다.
얼굴의 검은 무늬가 공유돼 세상에 퍼져나가는 사건은 어떤가. 여성들이 똑같은 표식을 얼굴에 그려넣으면서 검은 무늬는 패턴을 이루고 브랜드가 된다. 정치적 메시지를 서사 논리라는 튼튼한 바탕 위에서 전개해나가는 게 아닌, 조형적이고 파편적인 반복을 통해 전달하므로 관객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중요한 순간을 목격했다는 기분에 먼저 사로잡힌다. 무슨 뜻인지는 좀더 생각해봐야겠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담긴 것만은 확실하다는 심증. 그러는 사이 의미심장해 보이는 다음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생각할 시간은 더 주어지지 않는다. 동일한 표식이 확산되는 과정은 연대의 증표라기보다 스타일의 전염처럼 보이며 관객은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시각적 패턴의 힘을 먼저 느낀다. 이 영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거나 어쩌면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전달하고픈 마음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조형미에 몰두하느라 챙기지 못한 무게를 싣기 위하여 여성에 대한 억압과 해방, 규범과 욕망 같은 사회적 코드를 삽입했으나 진짜 삶에서 나온 서사로 구체화할 생각까지는 없어 보인다. 피부에 물든 검은 무늬처럼 그저 영화의 겉에만 프린트된 사회적 포즈, 또는 유행처럼 소비되는 캐치프레이즈 스티커를 붙이는 행위일 뿐. 검은 무늬는 결국 개인의 상처에서 출발해 집단의 스타일로 확장되지만, 다시 태어난 아이다가 어떻게 다른 가치를 만들며 생을 전개해나가는지는 구현하지 못한 채 피상적인 제스처에 머문다. 이 과정에서 메시지는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로 진행된다.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다음 장면이 도착하는 흐름. 어떻게든 의미를 연결해보려는 피로감에도 영화가 내미는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끝까지 붙잡게 되는 이유는 한결같이 유지되는 묘한 생동감 때문이다. 몸이 반응하는, 이해가 아닌 감각의 대상.
이 영화의 충만한 감각은 그래서 아름다운 동시에 공허하다. 장면이 빛나는 대신 중심 메시지로 수렴되지 않는다.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들이 숨 가쁘게 이어지며 불안하게 떠 있는 세계. 이야기의 완결성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발생하면서 영화는 조형에 치중한 창작물에 가까워진다. 이는 전략의 결핍이기도 하고 아이다의 몸속에서 용암처럼 분출돼 빠져나간 검은 물, 즉 전생이 있던 자리를 구체적인 후생의 서사로 채우지 못한 공허함이기도 하다. 감각적 충만함과 공허함이 공존하는, 서사의 약점을 감각의 힘으로 전환한 조형물. 감독이 너무 많은 말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딱히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그저 감독이 평소 꿈꾸고 상상한 세계를 뇌 바깥으로 끄집어내 눈으로 확인하려는 지극히 사적인 욕망의 결과물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되지만, 탄탄한 서사가 있어야 할 자리를 형태와 이미지가 차지하는 구조의 영화이기에 조형예술의 범주쪽으로 옮겨놔보는 것이다. 관객이 여러 개의 아름다운 장면을 경험한 뒤 하나의 의미 있는 이미지로 묶어낼 수 있을 때 감각 중심의 영화는 스타일 실험을 넘어 비로소 영화로서의 가치와 깊이를 얻을 수 있다. 이를 한데 묶는 끈은 역시 튼튼한 서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