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지난 3월15일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즌바움이 쓴 글의 제목에서 어떤 결기가 감지된다. 83살의 노논객은 “몇년간 직장을 잃은 평론가 수를 보면 죽음에 접어든 직업임을 알 수 있다”면서도 “30살 이하인 사람에게 물어보면 황금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며 환경 변화에 따른 세대간 인식 차를 날카롭게 통찰했다. <시카고 리더>의 칼럼으로 기획된 이 글은 모종의 이유로 지면에서 반려된 뒤 본인의 블로그에 올라갔는데, 덕분에 더 손쉽고 편하게 읽어볼 수 있어 한명의 독자로선 좋았지만 또 다른 지면의 데스크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선 생각이 많아졌다. 오늘날 정형화된 지면들은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반대로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들은 폭넓은 사유와 토론의 장을 제대로 제공하고 있는가.
거창하게 ‘영화비평에 대한 정의’까지 살필 것도 없다. 지금 당장 궁금한 건 하나다. 영화는 여전히 ‘감상과 비평’이라는 리액션을 필요로 하는가. 독자가 사라지고 필자만 남은 시대. 아무도 읽지 않지만 무언가 쓰고 말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시대에도 영화를 글로 쓰고, 읽고, 공유하는 작업이 유의미한 형태로 이어질 수 있는가. 일단 층위를 구분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겠다. 전통적인 영화잡지와 지면, 오래된 전문가들, 비평의 깊이에 몰입하는 이들이 사라지는 것과 영화를 읽고 쓰는 일이 중단되는 건 별개의 일이다. 시대가 바뀌어 그저 형태와 출력값이 변화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 형태가 꼭 종이여야 할 근거와 필요 또한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겉모습이 바뀌어도 변해선 안될 필요조건이 있다. 각자의 생각을 어떻게 나누고 공유할 것인지의 문제. 다시 말해 토론과 담론의 장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한때 그 광장을 영화잡지들이 담당했고, 지금도 장소가 좁아졌을지언정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조너선 로즌바움은 이 글의 서두에 자크 오몽의 문구를 인용하여 토론을 강조한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혼자가 아니다. 우호적인 방식으로 당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동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 리뷰를 쓰는 것보다 시네클럽 토론을 이끄는 것을 훨씬 더 선호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국내 유일 영화 주간지로서 <씨네21>이 해야 하는 일 역시 단지 영화에 대한 감상과 정보에 그쳐선 안된다는 다짐과 함께 매호 제작 중이다. 우리에겐 더 많은 연결이 필요하다.
며칠 전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적이 온다>(2025)를 본 뒤 새삼 주변이 달라 보인다. 노년의 교수가 실체 없는 ‘적’을 상상하며 무너지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연결을 끊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존재의 말로를 관찰한다. ‘적’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알맹이 없이 빈곤한 자들은 초라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적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기에 누군가를 적으로 설정하여, 가냘프게 꺼져가는 자신의 심지에 혐오의 연료를 땐다. 그렇게 홀로 불안에 곯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공포의 포자를 퍼트려 마침내 종말을 향해 행진한다. 요란하고 뻔뻔하게. 우리 사회, 아니 세계는 지금 적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그린 지옥도로 점철돼가고 있다 그럴수록, 설사 구태의연해 보일지라도 우리에겐 더 많은 연결이, 동료가, 광장이 필요하다. 그것이 종이 잡지가 멸종해가는 2026년, <씨네21>이 영화를 읽고 쓰는 잡지의 일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올해도 개편을 맞아, 작지만 좁진 않은 광장의 울타리를 새롭게 단장했다. 31주년의 첫걸음, 소박한 진심과 깊어지는 고민을 담아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