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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ituary] 투박하고 진취적인 몽상가, 임재철 영화평론가(1961~2026)

시기적절한 헤어짐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것은 분명히 너무 빠른 이별이다. 영화평론가 임재철이 3월22일 향년 65살로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국 곳곳에서 영화 강연과 여러 활동을 이어왔던 그이기에, 더욱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부고 소식이다. 국내에서 영화를 즐겨 보거나 영화 이론과 비평에 관심이 있는 이들 모두가 그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신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이름을 알리다가, 퇴사 후 미국 뉴욕시립대학교에서 영화이론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98년에 영화비평지 <필름 컬처>의 편집주간을 맡아 동시대 미국·일본·한국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누벨바그의 계보, 질 들뢰즈의 철학, 디지털 영화미학 등의 굵직한 의제를 담론화했다. 2002년엔 서울시네마테크 대표로서 한국 시네마테크 역사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혔고, 광주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와 예술영화관 필름포럼 프로그래머를 거쳤다.

이 과정에서 페드로 코스타, 장마리 스트로브-다니엘 위예,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알랭 기로디, 스와 노부히로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의 수많은 영화감독을 국내에 소개하고 초청했다. 제1회 광주국제영화제를 찾아 그와 대담을 펼쳤던 페드로 코스타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난 임재철이 영화제 상영작 리스트를 보내준 걸 보자마자 이 사람도 나만큼이나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뭘 꿈꾸면서 이런 프로그래밍을 했지?”

임재철은 해외 영화평론가, 영화기자, 영화이론가와도 많은 인연을 맺었다. 광주국제영화제 등에 초청했던 하스미 시게히코부터, 리처드 포턴(<시네아스트>), 샤를 테송(<카이 에 뒤 시네마>)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사유를 들여왔다. 최근까지는 출판사 이모션북스를 운영하며 <존 포드론>을 포함한 하스미 시게히코의 저작과 V. F. 퍼킨스, 조너선 로젠봄, 레이몽 루셀, 스탠리 카벨 등의 글을 국내에 알렸다. <씨네21>의 ‘프랑스영화 읽기’ 연재나 각종 인터뷰, 대담 기획 등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영화 제작사 이모션픽쳐스를 설립해 <내 청춘에게 고함> <비상> 등의 영화를 제작하고 해외 영화를 수입하기도 했다. 영화에 관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에 뛰어들었던 셈이다.

그는 몽상가였다. 필자의 경험과 지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행동 패턴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1. 갑자기 전화를 건다. 2. 터무니없을 정도의 발상과 계획을 설명한다. 3. 이것저것 일을 시킨다. 박상백 슈아픽처스 대표의 표현처럼 “야생마” 같았던 그는 보통의 질서나 관습적 절차에 얽매이지 않았다. 투박하고 진취적인 강골이었다. 동시에 다정했다. 그가 일면식도 없던 페드로 코스타에게 전화하고, 하스미 시게히코에게 다짜고짜 팩스를 보냈기에 한국의 영화 문화는 이전까지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얻었다. 우리 사회는 가끔 등장하는 몇명의 몽상가에 의해 크게 뒤바뀌곤 한다.

영화와 평생 함께한 그였지만, 영화와 영화비평에 대한 태도는 과시적이지 않고 절제되어 있었다. “영화는 영화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필름 컬처> 1호) “비평을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만큼 한심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생산해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필름 컬처> 4호) 그가 사석에서 하던 말을 빌리자면 “영화 그거 x도 아니야”. 다만 이 단언들은 야트막한 고집이나 비논리적 비난이 아니라 단단한 토대 위에 올려진 첨탑에 가까웠다. 그가 생각했던 영화와 비평이 무엇인지, 그 땅을 다시금 파헤쳐보는 일이 남겨진 이들의 숙제일 것이다. 이에 평소 그를 따르던 후배 영화평론가·연구가들이 모여 그의 방대한 이력과 미발표 저작, 번역물 등을 차차 정리하고 공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니 임재철 선생님, 이제 일 그만 벌이시고 좀 쉬세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추모의 말들

하스미 시게히코 평론가

임재철의 부고를 접하고 나는 “말도 안돼. 말도 안돼”라고 중얼거리며 한참을 흐느꼈다. “말도 안돼”라는 말은, 아흔을 목전에 둔 나도 살아 있거늘 훨씬 젊은 그가 하늘로 떠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아니, 믿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나의 활동을 지지해줬던 더없이 소중한 친우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중앙일보>기자직을 막 그만두고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부임해 있었다. 그의 초청으로 광주에서 존 포드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되살아난다. 또한 서울에서 열린 포드의 <왜건 마스터>상영에 함께하고, 이후 작품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던 밤의 기억 역시 더없이 선명하다. 도쿄에서 열렸던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연사로 참여한 그는 “설사 미조구치나 구로사와가 잊히는 일이 있더라도, 오즈는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굉장한 어구를 남겨주었다. 해마다 연하장처럼 보내오던 그의 이메일이 어째서인지 올해 정초에는 끊겼다. 무슨 사정이 있진 않을지 마음에 걸렸으나 바쁜 일에 휩쓸려 나 역시 안부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어쩌면 그 무렵, 그는 죽음의 문턱을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나는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기회조차 놓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친애하는 재철이여, 머지않아 머나먼 미지의 세계에서 느긋하게 영화 이야기나 주고받지 않겠는가. 다시 만나세.

한상준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1970년대 말 대학생 시절, ‘동서영화연구회’에서 만난 강한섭, 안동규, 전양준, 정성일 등과 영화와 문화와 사회에 관해 맹렬하게 공부했다. 그 후 1980년대 말 <중앙일보>재직 시절 만난 이영기, 임재철, 한창호, 허문영 등과 영화와 음악과 축구와 예술에 관해 재차 열정적으로 대화했다. 특히 임재철은 그 관심 영역의 방대함과 지식의 깊이에 있어서 늘 경이로웠다. 강한섭과의 43년간의 우정의 시간, 임재철과의 38년간의 우정의 시간, 그리고 정성일 등과의 현재진행의 긴 우정의 시간들 덕분에 내 인생은 윤기와 향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시간들에 무한히 감사한다.

금정연 작가

임재철 선생님은 내게 아주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대부분 내가 요청한 적 없는 것들이었다. 국제정치, 축구, 미국·프랑스·일본의 대학 제도, 속류 사회학, 문학, 관계의 역학, 개인주의, 그리고 영화 조금. 그때는 단순히 적적하신가보다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하면 어떤 절박함과 기쁨이 있으셨던 것 같다. 지식을 전수해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지식을 전수하는 기쁨. 하지만 선생님이 내게 가르쳐준 건 지식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게 내게 꼭 맞지만은 않았다고 해야겠지만.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시는 동안에도 선생님은 자신의 사적인 삶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으셨다. 한때 나는 ‘임재철 평전’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건 책을 쓰고 싶었다기보다 선생님을 조금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더 많이 묻고 더 들었어야 했다. 아마 선생님이라면 그런 생각을 뭐 하러 하냐고 혼내시겠지만. 선생님이 번역한 리처드 라우드의 앙리 랑글루아 평전처럼, 누군가가 선생님의 평전을 써야 한다.

박상백 슈아픽처스 대표

임재철 선배님은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채, 야생마처럼 살았던 자유로운 분이었다. 무엇보다 영화에 진심이었고, 쑥스러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정이 많았다. 무모하리만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생각들을 자주 하셨고, 실제로 행동에 옮겨 주변을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다. 스스로 외로움을 자처한 분이기도 했다. 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 같은 일상을 살았으며 영화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축구를 사랑했다. 그래서 축구영화를 제작했고, <지단: 21세기의 초상>을 수입하려 했던 일도 떠오른다. 끝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금동현 영화사연구자

집으로 갈 때면 임재철 선생님은 항상 플랫폼까지 바래다주셨는데 무엇보다 나는 그 따뜻한 모습으로 선생님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은 송덕비를 세우는 게 비평가의 도덕이 아니라고 강조했고 스스로도 기념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의 위대한 정신을 간직하고 기념할 테다. 보낼 준비가 안되었는데 홀로 빨리 가버리신 데 대한 사소한 반항이다. 고매한 정신들과 환담을 나누며 평안하시기를, 그리고 때가 되면 나의 반항을 호되게 꾸짖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