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예능프로그램의 최전선엔 모은설 작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 시리즈, <무빙>을 넘어 디즈니+ 한국 오리지널 최고 흥행작이 된 <운명전쟁49>, 지난해 SBS 연예대상 작가상을 품에 안은 <우리들의 발라드>등 모은설 작가가 제작진과 치열하게 고민하고 반문하며 구축한 세계관과 프로그램들이 국내외에서 화제성을 견인하고 있다. KBS에서 작가 경력을 시작한 모은설 작가는 JTBC, OTT 플랫폼으로 시대 변화에 맞춰 차츰 커리어를 확장시켜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해도 방송작가 일을 택했을 것”이라는 모은설 작가는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다음 스텝을 기획하며 또다시 새로운 영역을 개척 중이다.
- <흑백요리사> 시즌3 준비로 한창 바쁘겠다. <우리들의 발라드> 시즌2도 제작이 확정됐다고 들었다.
<우리들의 발라드> 시즌2는 지난주부터 회의를 시작했고 <흑백요리사> 시즌3도 상반기 촬영에 들어가기 전 최종 점검 중이라 이 일이 가장 바쁘긴 하다. 그 밖에도 하반기의 신규 프로그램을 1~2개 준비하고 있다.
-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다발적으로 기획하는 게 일반적인 방송작가의 업무 풍경인가.
연차가 쌓이기도 했고 그간 프로그램을 많이 겹쳐 해온 편이긴 하다. 처음엔 힘들다고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장르의 프로그램을 번갈아 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고 생각이 유연해질 때가 많아 오히려 이 방식을 선호한다.
금기를 깬 서바이벌게임
- 최근에 공개된 <운명전쟁49>부터 이야기해보자. 점술가의 점사를 믿나.
전혀 믿지 않았다. (웃음) <운명전쟁49>를 기획한 건 <흑백요리사> 이후 또 다른 서바이벌을 기획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였다. 막내 PD랑 대화하다 종종 남자 친구와 점을 보러 간다는 이야길 들었다. 불확실성이 높은 시대에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운명에 관해 듣는 데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거기서부터 출발했다. 나는 내가 납득하지 못하면 프로그램을 시작하지 못한다. <운명전쟁49>는 앞선 사례도 없는 기획이라 사전에 수없이 회의를 거쳤다. 많은 대중이 사주, 점에 관한 불신이 크다는 걸 알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성공을 위해선 확신을 줄 필요가 있었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두고 정답을 맞히는 형식의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 점술가들의 1:1 대결에 대한 주목도가 높았다. 무당들은 자신의 점도, 서로의 운명도 보지 않는다는 금기를 깨는 접근이라 더 그랬던 듯한데.
서바이벌프로그램에선 새로운 스타의 출연이 중요하다. 시청자가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프로그램은 성공하기 힘들다. 출연자들의 특성을 보여주며 주목도를 가장 높이기 좋은 구조가 1:1 대결이다. 앞서 말한 무당들의 불문율을 우리도 전해 들어서 점술가들이 서로 상담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혹시 싸움이 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양한 사연이 쏟아져 나왔다.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신내림을 받았으며 유년기에 무당이 돼 친구 하나 없었던 과거를 들려주고, 자기 자식 역시 무당이 될까 두려워하며 오열하곤 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지만 그들의 삶에 관해 들으며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되더라. 그게 서바이벌프로그램의 힘이 아닌가 싶다.
- 사례자들은 점술가들 앞에서 힘든 과거를 드러내야 했다. 섭외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점술사들이 지닌 능력 안에서 프로그램의 구조를 짤 수밖에 없었다. 사전 인터뷰를 거쳐 최종 라운드에서 49재처럼 망자를 위로하는 추도제를 하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사례자를 찾을지 고민하다 소중한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분들을 떠올렸다. 다방면으로 수소문해서 몇몇 분들을 찾아뵀고 이것을 서바이벌프로그램의 유희 거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망자를 보내주고 싶은 마음을 잘 기록하고 위로하겠다고 설득한 뒤 허락을 받았다.
- 점술가들이 사례자들의 정보를 잘 맞히다보니 제작진이 사전에 정보를 건넨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제작진이 서바이벌프로그램에 절대 개입할 수 없다. 공정성에 관한 기준이 상당히 엄격한 시대이고 <흑백요리사>를 통해 시청자들의 날카로운 반응을 크게 체감한 상태였기에 어떤 개입도 없었다. 우린 구조만 설정했을 뿐이고 플레이어들이 해줘야 하는 영역이 많아 항상 긴장한 채 현장에 임했다. 첫 촬영 때 49명의 출연진에게 전부 개인 카메라를 붙였는데 사례자의 사진만 보고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말들에 소름이 돋았다. 읽어낸 정보가 너무 디테일해서 운명사자(패널)들도 촬영 때마다 놀랐다. 나는 여전히 사주, 점을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운명전쟁49>를 마치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정도까진 생각이 변화했다.
- <운명전쟁49>가 <무빙>을 제치고 디즈니+ 한국 오리지널 작품 가운데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인기에 힘입어 타 국가에서의 현지화 버전 제작도 확정됐다고.
해외에서도 직관적으로 와닿는 기획이라는 걸 일찍이 확인한 일이 있었다. <운명전쟁49>의 디즈니+ 한국 지사 승인이 난 뒤에도 아시아, 미국 지사의 승인이 필요했다. 최종적으로 미국 지사를 설득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런데 ‘점술사들이 출연하는 서바이벌이다, 사람들의 운명을 읽을 것이다’라고 하자마자 바로 제작 승인이 났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기뻤다.
- 이런 경우 아이템을 기획한 작가로서 보람이 크겠다.
정말 뿌듯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제작 환경에선 작품 IP 권한이 작가에게 돌아오진 않는다.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작가협회와 여러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현장이 예측의 영역을 벗어날 때
- <운명전쟁49>가 전에 없던 유형의 서바이벌프로그램이었다면 <흑백요리사> 시리즈는 요리 서바이벌이라는 측면에선 이미 익숙하다. 차별화를 위한 고민이 컸겠다.
처음 내가 받은 기획안은 ‘무명 요리사 100’이었다. 무명 요리사 100명이 출연해 최후의 승자를 가리고 백종원씨가 심사를 본다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선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재미를 위해 여경래, 정지선, 최현석 셰프 등 잘 알려진 유명 요리사들도 섭외했고 대신 유명, 무명 셰프의 출발선을 달리했다. 유명-무명의 구도를 ‘계급’으로 바꿔 ‘요리 계급 전쟁’이란 타이틀을 붙이고 ‘흙수저’라는 표현에서 출발해 ‘흑수저, 백수저’라는 셰프간 그룹을 지칭할 용어를 만들었다.
- 흥행을 예상했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첫 녹화 현장에서 작품의 힘을 느끼긴 했다. 사실 계급을 나눈 건 셰프들간에 갈등이 생기고 치열하게 싸우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니 흑수저들이 백수저를 존경하며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섰다는 것에 기뻐하고 백수저들은 흑수저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발견하고 그들을 응원했다. 예상과 달리 대화합의 장이 된 것이 놀라운데 그 오묘한 기운이 좋았다. 그 분위기를 잘 전달한 게 결과적으로 성공 요인이 됐다.
- 리얼리티쇼는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에 따라 생각지 못한 그림이 자주 연출되겠다.
그래서 출연자 선정이 정말 중요하다. <흑백요리사>는 자리 채우기용으로 섭외한 사람이 한명도 없다.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게 ‘철가방 요리사(임태훈 셰프)’였다. 중식 셰프가 이미 많아서 더 추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거의 마지막에 인터뷰한 그에게서 자신의 요리를 선보이고 싶다는 갈망과 진정성이 느껴졌다. 결국 그를 100번째 자리의 주인으로 결정했다.
- <흑백요리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생존과 탈락을 발표할 때다. 후덕죽 셰프 같은 업력이 오랜 분들도 심사위원이 자기 요리를 먹을 땐 동공이 흔들린다. 생존, 탈락을 발표하기 전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침묵이 감도는 그 찰나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 <흑백요리사>는 셰프들의 생업과 관련돼 탈락했다고 이들의 실력이 폄하돼서는 안됐다. 편집 방향도 그렇게 정했고 섭외할 때도 “여기 출연한 걸 자랑스럽게 해드리겠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 우승자 외에도 탈락한 셰프들의 식당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소리를 듣고 약속을 지켰다는 자부심이 컸다.
‘격이 다르다’는 평가가 뒤따르도록
- 지금까지 해온 수십개의 프로그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을 꼽을 수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백요리사>다. 지상파 방송국에서 위클리 프로그램만 하다 이런 롱텀 콘텐츠, 시즌제 프로그램을 한 게 처음이다. 한주만 늦어도 방송을 묵혀서 재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사람이라 촬영과 공개 시점이 크게 차이나는 프로그램을 만들며 걱정이 컸다. 다행히 정말 잘됐고, 전세계에서 피드백이 온다는 건 완전히 다른 기쁨이더라. <흑백요리사>를 끝내고 휴가를 갔을 때 비행기 옆자리에서, 외국 식당에서 <흑백요리사>를 보고 이야기하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예능프로그램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 국문학 전공에 한때 기자 지망생이었다고. 방송작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대학교 4학년 때 언론 고시를 준비하던 중 KBS에 있던 선배가 자료 조사 아르바이트에 관해 알려주었다. 동기부여 목적으로 방송국에 갔고 열심히 일했다. 당시 PD들이 좋게 봐줘 프로그램을 맡게 됐고 그렇게 등 떠밀리듯 작가가 됐다. 기자가 되지 않더라도 작가로서 충분히 재밌게 일하며 직업적 보람을 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처음 일을 시작한 당시와 현재의 업계 환경에선 어떤 변화를 체감하나. 숏폼의 시대에 롱폼 예능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우려한 바도 있었는지.
정말 많다. 예전에는 시청률 10~20%가 안 나오면 PD들이 고개 숙이고 다녔다. 지금은 소비할 콘텐츠가 워낙 많아 지상파에서도 시청률 3%를 넘기기 쉽지 않다. 또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시대다. 시청자들의 눈이 높아 시즌1이 잘됐다고 시즌2의 성공이 보장되진 않는다. <흑백요리사><운명전쟁49>모두 오랜 기간 준비하고 300~400명의 제작진과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대규모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의 자랑스러운 이력이 되게끔 모든 프로그램이 기본 이상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원래 개인주의적인 성격인데 방송 일을 오래 하면서 점점 책임감이 강해졌다.
- 그럼에도 도전적인 시도를 많이 한다. 1020세대가 발라드를 부른다는 <우리들의 발라드>는 자칫 무모해 보였지만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유사한 걸 하면 시청자들이 보지 않는 건 물론이고 비판도 가해진다. 계속 사람들이 뭘 궁금해하고, 다음에 어떤 기획을 하면 좋을지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이 괴로우면서도 즐겁다.
- <흑백요리사> 시즌3에 관한 힌트를 들려준다면.
식당간 팀전으로 바뀌면서 전폭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흑수저, 백수저로 나눠 백수저는 처음부터 이름을 공개하고 흑수저는 닉네임으로 부르는 형식은 유지할 것이다. ‘초격차’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흑백요리사>만큼은 아예 격이 다르다는 말을 들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열심히 준비하겠다.
방송작가의 시선방송작가의 자질
어쩌면 먼 미래엔 <환승부부>를!
“항상 다양한 콘텐츠들을 챙겨보는데 즐겨보는 것 중 하나가 연애 프로그램이다. 러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결국 사람 본연의 밑바닥까지 전부 드러나기 마련이라 흥미롭다. 시청자로선 <환승연애>와 <나는 SOLO>모두 즐겨보고 각자의 미덕이 있다고 여기지만, 작가로서 만들어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환승연애>에 가깝다. 제목에서부터 어떤 포맷인지 명확히 드러나고 시즌1, 2가 처음 공개됐을 무렵엔 출연자들의 구조 역시 다른 방송들과 달라 신선했다. 이후로 정말 다양한 컨셉의 연애 프로그램들이 나오지 않았나. 그래서 이혼한 부부들을 데리고 <환승부부>정도는 해야 시청자들의 도파민을 터트릴 수 있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한 적도 있다. 차마 부끄러워서 그것까진 못하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새로운 컨셉의 연애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다.
자주 돌아다니고, 꼼꼼히 기록하고
“휴대폰에 프로그램별로 파일을 전부 따로 만들어놨다. 많이 보고 돌아다니며 참고할 게 있거나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써두고, 체크한다. 가령 전시를 보다 좋은 레퍼런스를 발견하면 기록해뒀다 나중에 세트에 반영하는 식이다.”
방송작가는 세상일에 밝아야 할까?
“반드시 밝지 않아도 잘할 수 있다. 확신이 설 만큼 자기만의 뾰족한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대중과 맞닿아 터질 수만 있다면 누구나 한방을 만들어낼 수 있다. 방송작가로서 반드시 필요한 자질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좋은 사람이긴 해야 할 것 같다. 다수와 협업하는 직종이다보니 합을 맞추는 팀원들이 중요하다. 그래서 내 의도를 잘 전달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끔 중간에서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중요하다. 또 일하다 일어나는 갈등 상황을 현명하게 해결하고 어루만져주는 게 필요해서 기왕이면 작가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