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평] 상상적 우애를 위한 장소, 김예솔비 평론가의 <오, 발렌타인>

<오, 발렌타인>

모든 견고한 것들의 추락에는 반드시 어떤 굉음이 따른다. 물리적으로 실체를 가진 것들뿐 아니라 권위, 제도, 사상, 그러니까 그 모든 달콤한 것들의 상징적인 추락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굉음을 들으려 하지 않을 때, 그 추락은 망령 비슷한 것이 되어 추문으로 떠돌게 된다. 누군가는 여전히 건재해 보이는 실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추락 자체를 부정할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는 저게 보이지 않나요? 반면 들리지 않는 굉음에 대해 증언하려는 사람은 보이는 것 너머가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를 재편해 새로운 감각적 현실을 창안하기. 이를 위해 기이하고 열정적인 망상을 동원하기. 이것이 영화가 현실에 관여해온 방식이 아니던가요.

기이하고 열정적인 망상을 동원하기. 이것이 영화가 현실에 관여해온 방식이 아니던가요. 후자의 문장에서 ‘영화’의 자리에 영화 대신 ‘미술’을 가져다두어도 의미에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이하고 열정적인 망상’이라는 표현과 좀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쪽은 영화다. 가상이 현실과 다른 현실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리는 일인 반면 망상은 그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분탕질하는 음모론자의 꿈에 가깝다. 영화의 망상이란 무언가가 쇠락하고, 추락하고, 희미해지고, 추해지는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위상 변화를 감각적 차원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모든 표현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홍진훤 작가의 <오, 발렌타인>은 기묘하게도 이 망상의 역사와 긴밀하게 엮인다. 물론 이 영화는 단채널 영상 설치 작업이었던 <더블 슬릿>을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는 장편영화의 포맷으로 공개한 것으로, 그 시작은 미술관이었던 작업에 가깝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블랙박스와 화이트큐브 사이에 있는, 소위 ‘미술관 영화’의 불확정적인 존재론이 아니라 <오, 발렌타인>이 시(청)각적으로 다루는 문제가 영화라는 매체가 오랫동안 시달려온, 그리고 적극적으로 배포해온 망상과 상당 부분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추락, 실추, 낙하라는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운동과 이를 실체화하려는 영화가 지닌 오랜 망상의 흔적들을 건드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지하자면 <오, 발렌타인>은 실체가 없는 추락과 그 굉음을 추적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중심축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하청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분신했던 박일수 열사의 투쟁이고, 이 투쟁을 기점으로 분기한 세계에는 분명 견고한 것의 실추가 내포되어 있다. 전작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민주화운동 세대가 복원하고자 했던 영광의 시간들과 비정규직 및 이주민노동자 투쟁의 역사가 담겨 있는 미디어 ‘참세상’ 아카이브의 저화질 영상 사이를 오가며 특권화된 시간에 균열을 가하고자 했다면 <오, 발렌타인>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신화를 한편에 두고 현대중공업의 하청노동자였던 박일수 열사가 불을 지핀 21세기 초입 비정규직 투쟁 전체의 논쟁사를 다룬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민주노조 운동의 핵심 현장 중 하나였던 울산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은 점차 관료화되었다. 당시 하청노조의 핵심 관료였던 조성웅의 증언,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었지만 이미 자본화된 노동의 인격적 표현”이라는 말은 정확히 그 지점을 겨냥한다.

<오, 발렌타인>

<오, 발렌타인>은 이런 표현에 대해 적나라한 지시성을 지닌 이미지를 호출하는 대신, 지극히 사진적인 방식으로 상상(망상)을 부추기는 몇 가지 이미지들을 동원한다. 그중 하나가 설악산의 흔들바위다. 설악산 국립공원 신흥사 사찰 앞에 있는 흔들바위는 밀면 흔들리기는 하지만 결코 추락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흔들바위는 이렇게 등장한다. 한 등산객이 흔들바위를 밀고 있다. 그가 전력을 다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거대하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앞서 ‘지극히 사진적인 방식으로’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장면은 ‘거대하다’라는 목소리 없이도 성립한다. ‘거대하다’는 목소리는 이미 시각적인 차원에서 자족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을 반복해서 부연하는 것에 가깝다. 목소리는 이미지에 부딪힌 뒤, 어디에도 접속하지 못한 채 표류한다. 말하자면 공허한 음성이 되는 것이다. 홍진훤은 이 장면을 지극히 사진적인 방식으로 구현함으로써 이미지와 사운드의 접속을 끊어내고, ‘거대하다’는 말에 공허함을 부여한다. 이것이 영화가 거대한 바위를 추락시키는 방법이다.

이토록 사소한 장면 하나로 영화 전체의 논리를 읽어내려는 건 과장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이미지와 사운드를 (비)결합시키는 방법은 영화 전체에서 실체화하려는 추락의 정체와 긴밀하게 닿아 있다. 이를테면 ‘절대 추락하지 않는 바위’라는 상징에서 견고함이 아니라 이 견고함을 신화화하려는 충동을 읽어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대로 이 바위가 만일 추락하게 된다면, 그 신화가 무참히 무너질 거라는 불안이 내재해 있다. 홍진훤은 무언가를 추켜세우고 신화화하는 일이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한다. 결국 이 이미지와 진정으로 연결되는 것은 ‘거대하다’는 탄식이 아니라 모두의 추락을 꿈꾸는 패배의 목소리 전체다.

우연 그 이상은 아니겠지만 공교롭게도 설악산을 주요한 무대로 삼는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에는 추락에 대한 암시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장면 1. 친구들과 강릉으로 여행을 간 지숙은 카페에서 자신에게 고백하고 투신자살을 시도했던 고등학교 동창에 대한 일화를 들려준다. 장면 2. 지숙이 화장실에 간 사이 모텔방에 혼자 남은 남자는 충동적으로 베란다를 넘어 난간에 매달린다. 장면 3. 케이블카를 타고 설악산 봉우리에 오른 상권 일행은 낭떠러지를 걷는 남녀를 보며 신기해한다. 장면 4. 서울로 올라온 상권은 신문을 보다가 여행지에서 스쳤던 여자가 설악산에서 추락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추락의 공포는 삶의 도처에 널브러져 있다.

고소공포증을 겪는 사람들은 사실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내리고자 하는 충동이 강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공포심이 생기는 거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추락이 두려운 것은 한편으로 추락을 너무도 갈구하기 때문이다. 홍상수가 영화에 추락을 끌어들인 것은 단지 죽음을 묘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뛰어내릴 수 있다는 충동이 뒤통수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의 취약한 형상을 빗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자기파괴적 우화가 감지될 수 있게끔 만들기 위해 영화는 높은 곳을 요구한다. 한편 21세기 들어 비정규직 투쟁의 현장 또한 점점 높은 곳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크레인을 점거하고, 망루에 올랐다. 홍진훤은 사진 연작 <승리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는다>에서 고공 농성을 다룬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고공 농성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 즉, 가시성의 투쟁만 남은 모든 투쟁의 최전선이다. <멜팅 아이스크림>에 이어 <오, 발렌타인>에서도 고공농성은 점점 치달아가는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면서 스스로 최전선을 구현한다. 거대한 것이 쓰러지는 굉음을 듣기 위해서는 취약한 존재들이 임사(臨死)를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가시화할 수밖에 없는 자기파괴적 우화를 통과해야 한다.

<오, 발렌타인>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가 세로 방향, 즉 수직으로 움직이는 운동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력하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한계 때문에 영화는 다른 표현 장르보다 더 쉽게 추락이나 실추 같은 것을 이야기의 차원에서 주제화하려는 경향을 띤다고 주장한다.(<영화의 맨살>) 영화가 추락이라는 운동을 이야기적, 형상적 차원에서 표현해내기 위해 분투해왔음은 로버트 올트먼의 <긴 이별>같은 영화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사립 탐정 필립 말로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건 영화의 테마곡인 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자주 가는 재즈 바에서, 행인의 흥얼거림에서 이 테마곡이 반복된다. 말로는 함정에 걸려들었지만 정작 그는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거리를 헤맨다. 영화는 그의 추락을 한없이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제목처럼 하나의 기나 긴 여정으로 늘어뜨린다. 마피아 조직이 말로의 집에 쳐들어왔을 때, 말로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나선형 계단을 타고 도망친다. 로버트 올트먼은 주어진 운명으로 향해 추락하면서도 그로부터 도망치려는 하드보일드의 이중구속을 드러내기 위해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나란히 둔다.

물론 하스미 시게히코가 말한 ‘수직에 대한 무능’이라는 영화의 한계를 의식하면서 부러 대응하려는 연출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위의 사례를 통해 말하고 싶은 하나의 가설은, 영화가 수직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화면에 수평을 도입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오, 발렌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서 상징적인 추락을 지시하기 위해 흔들바위의 이미지를 동원했던 것처럼 홍진훤은 영화 전반에 수많은 기념비와 탑, 크레인의 이미지를 불러들인다.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홍진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근을 세우는 일이다. 홍진훤은 그 과도한 가시성을 폭로하며 상상적 추락을 도모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쓴다. 하나는 높은 것(탑)이나 거대한 것(고래)을 촬영한 스톡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화면에 수평을 도입하는 것이다. <오, 발렌타인>은 화면을 둘로 나누는 스플릿 스크린의 형식을 차용한다. 언뜻 보았을 때 이 분할화면은 상호 조응하는 두개의 축을 교차시키기 위한 장치처럼 여겨진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에는 박일수 열사의 투쟁을 회고하는 조성웅우창수라는 두명의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산에서 시를 짓고, 한 사람은 늪에서 민중가요를 부른다. 이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인과관계로 단단히 얽혀 있는 것도 아니다. 한편으로 이 영화에는 분열된 노동운동이라는 두축이 있고, 박일수 열사의 분신과 그 후라는 두개의 시간의 축이 있다.

이 영화가 투쟁의 현장을 다루는 방식은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그때 거기’의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미지로 현재화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 영화는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끊임없이 어떤 담론적 배치 안에 놓아두고, 다른 이미지들과 관계 맺게끔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지와 사운드간의 몽타주다. 우창수조성웅의 구술,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을 담은 아카이브 영상,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기록들 사이에서 관계는 사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동시에 발생해야 한다. 이 영화의 분할화면은 박일수 열사를 기념비로 보존하거나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유동적이며 불확정적인 의미의 관계망 속에서 계속해서 현재화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이 분할화면을 오해하는 방식 중 하나는 나란히 출현하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어떤 대립항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투쟁은 자본에 맞서 반자본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이 스스로를 내파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가깝다. <오, 발렌타인>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 항으로서 자연을 제시한다. 자본과 반자본의 적대 구도를 무한히 반복하는 대신, 그 적대 자체를 무력화하는 이미지로서 말이다.

<오, 발렌타인>

<멜팅 아이스크림>이 극장에서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홍진훤은 극장의 선형성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계하는 마음을 내비친 바 있다. 그는 전시장과 극장의 관람 경험 사이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권력과 힘의 구조를 재편하고자 한다. 다만 “극장은 관객의 수동성을 극한으로 키우고, 연출자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씨네21> 1548호)는 그의 말에는 약간의 반문을 붙이고 싶다. 물론 이 말은 전시장과 극장 사이의 힘의 구조를 염두에 둔 발언일 테지만 여전히 <오, 발렌타인>을 극장에서 보는 것은 예기치 못한 감흥을 자아낸다. 가령 이 영화를 일종의 버디무비로 받아들일 한 관객의 망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적어도 나의 경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창수조성웅의 뒷모습이 나란히 비쳐질 때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상적이고 들뜬 방식의 우애를 상상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물론 동일한 이상이 아닐 것이다. 하나 두 사람은 다시 시작점에 서 있고, 그 뒷모습에는 박일수 열사의 기억을 비롯한 투쟁의 기억들이 축적되어 있다. 영원히 평행하지도, 영원히 교차하지도 않을 세계에서 비정한 거리를 두 사람이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