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냉장고를 노려보고 있다. 조금 전 릴스 알고리즘으로 알게 된 몇 가지 초간단요리들을 식단표에 막 추가한 참이다. 나는 지금 골똘하게 생각 중이다. 이연복 셰프가 알려준 양배추 돼지고기볶음에는 돼지고기 앞다리 살 대신 냉동실에 있는 훈제 삼겹살을 넣으면 되겠군. 드디어 냉장실에 굴러다니는 양배추 조각을 소진하게 되겠어. 어제 교회 다녀와서 류수영 배우의 레시피를 따라 만들었던 고등어 무조림은 물이 많아서 망했지. 무조림만 따로 건져서 정호영 셰프의 참치 무조림으로 진화시켜보자. 실패했다고 다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어제는 동생을 따라 동네에서 멀지 않은 교회를 처음 방문했다. 오전 9시30분 예배인데도 주일에 교회 가는 일이 몸에 설어서인지 집에서부터 이상하게 뚝딱거리다 결국 택시를 타고 예배 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교회 간다고 요새 유행하는 포엣 코어 스타일로 옷차림에 신경을 썼는데 택시에서 내리는 나를 본 동생이,
“어디 가나 조센진!”
“왜? 무슨 조센진?”
“자네 지금 완전히 독립군 같다. 이러다간 바로 발각이야!”
우리는 함께 낄낄거리며 이미 찬양이 시작된 예배실로 몸을 숙이고 들어간다. 사순절 기간 중 종려주일이라며 목사님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설교를 진행하신다. 그 모습이 어딘가 귀엽고 연극처럼 보여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배리어프리 공연처럼 무대 앞쪽 양옆에 커다란 모니터가 자리하고 있어서 찬송가 악보며, 성경 구절이며, 설교 말씀의 핵심 등이 그때그때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마음은 냉장고와 같다. 비우지 않으면 썩는다.’
찰칵! 거의 사탄의 장난인가 싶을 정도로 설교 내내 딴생각이 들었는데 순간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찍었다. ‘냉장고’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그러자 곧이어 모서리가 살짝 무르기 시작한 냉장실 안의 빨간색 파프리카가 눈앞에 두둥실 떠오른다. 소비기한이 위태로운, 개봉하지도 않은 1리터 우유가 두팩이나 우뚝 서 있다. 이름 모를 인스타 공구에서 뜬금없이 사들인 레토르트 곰탕 봉지들이 있는 냉동실의 풍경도 펼쳐진다, 어머님의 건너 건너 지인 중 누군가가 낚시로 건져 직접 손질해 지인에게 얼려 보낸 것을, 또 그 지인이 어머님에게 보낸 것을, 또 어머님이 우리 집으로 나눠 보낸 갈치 조각 뭉치가 어른거린다. 냉장고에 이어 팬트리와 찬장에 쌓여 있는 실온 재료들도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다. 아, 이 마음의 짐들! 짐 진 자가 지금 여기 있나이다, 주님. 나에게 너무나 타자인, 갑작스럽게 우리 집에 침입해서 부엌을 점령하고 교회에 앉은 내 머릿속까지 점령한 이 게걸스럽고 왕성한 타자들. 나는 조바심에 차 시간 날 때마다 이것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최후의 방어선에 서서 홀로 칼로 적군을 베어내는 장수의 심정으로 식재료를 다룬다. 식재료들을 기간과 양과 방식 면에서 맞춤하게 소비할 때의 도파민을 좋아하지만, 그 쾌감의 본질은 이 음식을 먹는 내 몸을 살리고 남을 돌보는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처리하고 해치우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 초조하고 통제적인 마음이다. 이제 보니 나는 음식을 만들고 먹으면서 음식과 함께 불안과 통제를 씹어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냉장고 앞에 쭈그려 앉기 전에는 광주 엄마 집에서 가져온 오래된 짐들을 정리 중이었다. 내가 갓난아기 시절에 입었다는 배냇저고리, 어린 시절 사진들,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림일기, 졸업 앨범들, 상장, 임명장, 성적표, 수료증들- 세상에, 친구들에게 받은 자잘한 편지며 쪽지들은 다 버리고 성적표를 보관하고 있었다니, 그걸 또 서울까지 가지고 오다니, 나란 사람의 인정욕구란 정말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대학 시절 연극동아리에서 공연했던 대본들과 팸플릿들, 교수님 코멘트가 적힌 출력된 리포트 서너개, 낱장으로 찢은 고3 시절의 일기 몇장 등등. 이 짐들이 갑자기 우리 집에 와 있는 이유는, 얼마 전에 엄마가 딸들을 소집해 당신 집에 남아 있던 어린 시절 짐들을 각자 정리해 가져가게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씨네21>에 썼던 ‘Mortality,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이라는 글을 읽으시고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싶어. 더 가볍고 간단하게 살고 싶어.
이미 습기와 곰팡이로 삭을 대로 삭은 짐들 속에서 대학 시절 리포트 출력물을 발견했다. 스스로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해서 남겨뒀는지 교수님의 코멘트를 마음에 새기려고 남겨뒀는지는 모르겠다. 2학년 때 수강했던 동양의 고전 수업에 제출한 ‘<맹자>가 갖는 현대적 의의와 우리 세대적 관점에서의 재고찰’이라는, ‘~적’이 남발된 제목의 리포트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교수님 코멘트가 적혀 있다.
‘고민과 사유의 흔적이 담겨 있는 글이라서 좋았습니다. 문장력도 속도감 있고, 호소력도 있는 데서 느낄 수 있듯이, 무척 좋군요.’
반면 역시 2학년 때 들었던 문학개론 수업의 리포트는 소설 <삼포 가는 길>과 <서울, 1964년 겨울>에 대한 감상문 같은데, 표지에 적힌 교수님의 코멘트는 각각 다음과 같다.
‘너무 정서적, 상투적’
‘좀더 자기 이야기를….’
과거 언젠가 중요한 것을 선별해 이 상자를 꾸릴 때 리포트들을 버리지 않고 남겨둔 것이 재미있었는데, 이번에도 미진한 과제를 돌려받은 마음으로 26년 전 리포트를 서울까지 가지고 왔다. 딱 한권 보관되어 있던 다이어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것이었는데, 버리려고 뒤적거리다 몇장 적혀 있던 일기를 읽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1998년 5월10일 일기에는 게으름에 대한 자책에 이어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서른쯤에 참여한 웹진 <연극in> 편집위원 소개글에는 ‘내일부터 잘 살아야지’라고 쓴 것이다. 그로부터 또 10여년이 흐른 지금도 늘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제까지 잘못 살았으나 후회는 접어두고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살자는 생각. 짐을 뒤적거릴수록, 세상에! 여기저기 적혀 있는 글의 형식도 내용도 사고하는 방식도 지금의 나와 똑같다. 정말이지 별반 다르지가 않다. 고3 시절로부터 거의 30년 가까이 흘렀는데 이상하게도 글이 그대로다, 내가 그대로다. 30년간의 시련, 이별, 상실, 실패 등등이 나를 조금도 성장시키지 못했단 말인가. 그간의 사랑, 우정, 깨달음 같은 것들 역시도 나를 조금도 옮겨놓지 못했단 말인가. 좀더 나은 인간이 되어보려고 책도 읽고 공연도 보고 영화도 보고 심지어 연기도 하는데…. 주여! 꽉 차서 비워지지 않은 냉장고처럼, 묵은 짐들을 끌어안은 채 습기차고 삭아버린 종이 상자처럼, 이제 저는 썩을 일만 남았습니까?
막내가 욕실에서 나오며,
“엄마, 수건도 싹 버리고 느낌 있는 걸로 사서 바꿔. 수건이야말로 얼마 하지도 않는데.”
“나중에 ◦◦(언니 아들)이 다 키워놓고 우리 집에 복귀하면 그때 싹 바꾸려고 했지.”
“엄마! 내 글 읽고 심경에 변화가 있다더니 아직도 6년 뒤 이야기를 해? 수건을 6년 동안 쓸 거야? 다 버려. 버리고 엄마 마음에 좋은 것들로 하나씩 새로 채워.”
“… 그럴까? 근데 뭘 사야 되냐?”
“인터넷 들어가 봐. 좋은 거 많아. 엄마 눈에 좋을 걸로 직접 골라 버릇해야지.”
“그래, ◦◦만 들어가도 수건 얼마나 많은데… 아니다, 그냥 내가 사서 보낼게.”
“오메! 역시 막둥이밖에 없구먼!”
둥그렇게 둘러앉은 관객들 한가운데서 이윤정이 숨을 쉰다. 폐로 갈비뼈로 등으로 겨드랑이로 골반으로 허벅지로 오금으로 발바닥으로, 숨을 끝까지 들이마시고 바닥까지 내뱉는다. 호흡에 따라 작게 들렸다 떨어졌다 하던 몸은 점점 흔들리고 휘어지더니 때로는 호흡이라는 행위를 하는 몸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계를 넘어 변형된다. 고통스러울 만큼 몸 안 구석구석을 밑바닥까지 깡그리 훑어낸 날숨이 길게 이어진다. 반대로 들숨은 공간 구석구석 관객들의 신체 구석구석을 가차 없이 있는 힘껏 빨아들인다. 말 그대로 몸 안으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들숨이 목구멍을 통과하며 진동하더니 진동은 곧 미세한 소리가 되고 반복될수록 짐승의 신음처럼 짙어진다. 썰물 같은 날숨과 밀물 같은 들숨으로 넘실대는 호흡이 거듭된다. 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 개관 특별전_SeMA 퍼포먼스 <호흡>(3월12일~4월12일)의 일환으로 공연된 이윤정 안무가의 <나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숨쉰다>이다.
이쯤이면 됐겠지, 싶은 순간을 지나쳐 호흡은 혹은 호흡으로서의 몸은 더, 더, 나아간다. 힘으로 밀어붙여서는 담이 걸리거나 뼈에 금이 가거나 목구멍이나 폐가 손상되기 쉬워 보일 정도로 격렬하게 확장되거나 수축하는 순간도 있는데, 아마 퍼포머는 지속적인 탐색과 훈련을 통해 강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몸 스스로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추동하는 방식을 터득한 것 같다. 몸은 스스로 자신을 열고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과감하게 더 깊고 넓고 때론 더 구석진 곳까지 나아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에 앉아 있는 관객들 주위로 몸 사이사이로 구멍들 속으로 공기가, 물이, 파도가 드나든다. 관객의 몸이 서서히 흔들린다. 척추에 힘이 풀리고 고개가 기울어진다. 휘어지고 돌아가다 다시 세워지고 다시 무너진다.
사람이 호흡을 멈출 수는 없으니 이윤정이 수행하고 있는 것은 그저 호흡의 한 방식, 호흡은 곧 생명이니 생명의 한 방식, 생명은 곧 삶이니 결국 자신이 믿고 의지하고 훈련하는 삶의 한 방식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뱉고 다시 처음의 처음의 처음을 맞이하고 끈질기게 구석의 구석의 구석까지 채워보려는 방식 말이다. 비우고 채우는 60분간의 수행 동안, 이윤정의 몸은 제목처럼 ‘여기에서 모든 것을 숨 쉬면서’, 여기 모인 모든 타자와 연결되면서 전혀 다른 존재로 변모해간다. 퍼포머 몸 안의 모든 기관과 근육과 세포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고, 이 공간과 시간 안의 그 어디도 이윤정의 들숨과 날숨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호흡과 함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삶의 축적과 함께 시시각각 다른 존재로 새롭게 경신된다.
무모하지만 나는 정말 우리 집 냉장고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비워볼 생각이다. 다만 지금까지처럼 해치우는 대신, 마주해보고 싶다. 왜, 어떤 연유와 관계와 태도와 방식 때문에 하필 이 음식들이 지금 이곳에 있는지, 왜 그들과 내가 이토록 타자처럼 느껴지는지를 구석구석,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씹어 삼켜보고 싶다. 그러고 나면 평생을 반복해온 뭉툭하고 의례적인 ‘오늘부터 다시 시작’과는 조금 다른 처음의 처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수건들을 버리기 전에 그 수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엄마에게 왔는지 잠시라도 들여다보면 좋겠다. 그러고 나면 그것들 대신 어떤 수건을 쓰고 싶은지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엄마한테 이 글도 보내줘야지! 일단 숨 한번 깊게 쉬고, 오늘 저녁 식사를 위해 양배추 돼지고기볶음을 만들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