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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기억하겠습니다

때로 영화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당도하는 장소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검사>를 보았을 땐 솔직히 별반 기억에 남지 않았다. 물론 전체주의가 인간을 집어삼키는 보편적 메커니즘을 우화로 승화시킨 훌륭한 영화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제된 형식이 주는 거리감에 밀려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두 검사>를 (타의에 의해) 극장에서 다시 봤을 때, 전혀 다른 무언가로 다가왔다. 느리지만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연출, 침묵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연기, 규칙을 따른 자가 파멸에 이르는 결말까지. 무엇보다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 대한 경고가 귓가를 때렸다.

<두 검사>는 인내의 영화다. 느리고, 엄격하고,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말에 이르러 의도적으로 관객을 좌절시킨다. 모든 숏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하여 프레임 자체를 감옥으로 만들고, 아카데미 비율의 좁은 화면과 탈색된 회청색 톤으로 관객까지 전체주의의 질식 속에 가둔다.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이 체제 안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며, 그 정지된 화면 안에서 느리게 조여오는 공포가 어떤 폭력 장면보다 더 강렬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감옥처럼 답답한 화면에 갇혀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악몽처럼 자꾸 되살아난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그대로이니 달라진 건 나다. 정확히는 바뀌어버린 현실이 스크린 안쪽까지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 국제 정세의 추악한 민낯을 새삼 확인하며 회의감에 휩싸였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익숙함과 망각에 젖어버렸다. <두 검사>를 처음 보고도 치를 떨지 않았으니 확실히 무뎌졌다. 이스라엘의 무도함과 미국의 어리석음으로 범벅이 된 이란 침공을 전해 듣자니 남 일 같았던 <두 검사> 속 상황이 점점 내 일로 번진다. 공포영화가 된다. 문명 말살을 외치는 도덕적 파산을 목도하면서도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트럼프라는 광인이 미국이라는 시스템의 정점에 오른 순간, 그는 이미 불가항력의 무언가, 세계의 비극과 재앙이 되어버린 것 같다.

<두 검사>는 전체주의가 우리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오래된 과거를 빌려 경종을 울린다. 전체주의 그물이, 시스템이, 잘못된 규칙이 자리를 잡고 나면 바꾸기 어렵다.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을 그물이 완성되기 전에, 그물을 찢어야 한다. 전체주의와 반지성주의에 저항하는 가장 큰 무기는 기억이고, 영화는 기억을 나누어 보존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다. 이미 궤도에 올라버린 부조리를 단박에 일소할 순 없을 것이다. <두 검사>의 느린 속도는 어쩌면 정의의 바퀴가 돌아가는 속도와도 같다. 민주주의를 통한 정의 구현의 수레바퀴는 피곤하고 소란스럽지만, 우리가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확실하게 돌아간다.

이번주 <씨네21>에서는 다양한 소란과 걱정, 인내의 목소리들을 담았다. 제주 4·3 사건을 기억하며, 정지영 감독의 생각과 전승민 문학평론가의 글을 여러분에게 띄운다. 저 멀리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기억하며, <힌드의 목소리> 카우테르 벤 하니아 감독의 인터뷰를 전한다. 오늘의 문제들을 기억하고자, 생존 투쟁 중인 예술가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더 많이 의심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인내해야 할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당신을 위한 한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