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모스크바를 떠나 브랸스크로 돌아가는 밤, 젊은 검사 코르녜프의 맞은편 자리에 한 노인이 앉는다.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불리는 외다리 퇴역 군인은 한때 레닌에게 직접 탄원하러 갔던 자랑스러운 무용담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코르녜프가 스탈린의 대숙청 아래 억울하게 투옥된 원로 검사 절차 끝의 낙원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스테프냐크의 사연을 품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참이니 공교로운 만남이다. 노인의 격없는 수다스러움은 중앙정부의 거대 절차를 마주할 신임 검사의 긴장을 언뜻 잠재우는 것처럼 보인다. 열차 객실을 배경으로 영화를 순식간에 농민극의 무대로 바꿔놓는 이 장면엔 전환의 유희만큼 쓸쓸한 전조가 짙다. 긴 클로즈업을 목격하는 동안 발생하는 기묘한 지각 덕분이다. 퇴역 군인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 교도소 독방에서 고문의 흔적을 온몸에 새긴 채 코르녜프와 마주 앉아 있던 원로 검사 스테프냐크와 같다. 실제로 배우 알렉산드르 필리펜코가 두 역할을 모두 연기했고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은 장광설의 어느 시점에 관객이 이를 천천히 알아채도록 그저 내버려둔다. 인식은 보는 이들의 몫이다. 둘 중 하나는 유령처럼 느껴지는 1인2역의 현현이 경고인지 농담인지 받아들이는 일까지 오롯이.
한쪽은 혁명의 이상을 믿었기에 감옥으로 끌려갔다. 스테프냐크는 볼셰비키혁명의 산증인이고 전직 검사이며 코르녜프가 참석했던 강연에서 ‘위대한 볼셰비키의 진실’을 역설했던 사상가였다. 그가 옷을 걷어 올려 부러진 갈비뼈와 시퍼런 멍을 드러낼 때, 쇠약한 육체는 과거의 위엄이 끝났다고 알리는데 남자의 입은 여전히 소비에트 법을 향한 신뢰를 말한다. 자신의 투옥을 스탈린 체제의 비밀경찰 NKVD 내부의 사보타주 탓으로 돌리며 체제 자체는 끝내 의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한쪽인 기차 안의 외다리 노인은 여전히 한때의 보존된 영광을 추억하고 있다. 사라진 다리는 외려 자긍심을 부추긴다. 그가 아직 이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이 곧 이상주의의 잔재라는 사실을 그는 알 턱이 없다. 같은 육체를 공유하는 상이한 인물을 통해 <두 검사>는 동일한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수난의 서사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영광의 서사로 남는 아이러니를 논평한다. 간단한 이유인즉슨, 모든 것은 체제가 임의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체주의의 부조리다.
편지를 받은 젊은 검사 코르녜프가 스테프냐크를 접견하기 위해 브랸스크 교도소 안으로 진입하는 시퀀스에서 <두 검사>는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를 참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정적 차이는 방향이다. 브레송의 공간이 탈출을 향해 열리는 곳에서 <두 검사>의 철문과 복도는 안쪽을 향한다. 여러 개의 문이 열릴 때마다 인물은 더 깊은 곳으로 향한다. 모스크바 검찰청에 도착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몇 시간째 딱딱한 의자 위에서 대기하다 잠이 들어도 누구도 개의치 않고, 때가 되면 그는 점점 더 중앙쪽으로 안내받는다. 상부로 향할수록 접견실의 규모는 커지고 따라서 인물은 텅 빈 배경에 놓이지만 실상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마침내 나타난 검찰총장 비신스키는 스탈린 시대에 횡행한 조작 재판의 실제 설계자다. 그의 등장만으로 어떤 관객은 이미 결말을 예감할지도 모른다. 픽션 속 코르녜프는 그 악명을 아직 진단하기 힘들지만 관객만큼은 안다. 이 비대칭의 인식은 비신스키의 거대한 집무실에서 벌어지는 면담을 비극이자 거대한 블랙코미디로 만든다. 짐짓 경청하고, 코르녜프가 원하는 추가 조사를 승인하는 서류를 건네며 돌려보내는 관료의 태도가 모방하는 것은 인간다움이다. 지루한 절차 끝에 주어지는 보상을 경험한 코르녜프는 다시 제 발로 덫을 향해 나아간다.
귀환하는 열차 안, 이제는 1등석에 자리한 코르녜프 곁에 두명의 ‘기술자’가 자리 잡는다. 소비에트 법에 건배를 올리고 기타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코르녜프에게 배정된 NKVD 요원이다. 그들을 마주하면서 코르녜프는 이제 자신의 혼란을 다루어야 한다. 새로운 세대의 검사는 이토록 친절한 체제를 어디까지 의심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는 사이에 첫 장면의 감옥은 다시 나타난다. 같은 철문, 같은 복도, 같은 빛. 달라진 것은 그 안을 걷는 사람이다. 코르녜프가 곧 제2의 스테프냐크가 되는 결말에서 <두 검사>의 카메라는 태연한 시선을 던진다. 체제 안에서 이 충격적인 결말은 지극히 정상적인 절차일 뿐이다. 달리 말해 <두 검사>는 그 끔찍한 정상성이 1937년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시대를 향해 있다. 권위주의가 부활하고 시민의 탄원에 총격이 향해지는 당대의 시스템 앞에서 젊은 검사의 여정은 역사의 교훈이 아니라 동시대적 위기를 가리킨다. 이 현재성은 <두 검사>가 <젠틀 크리처>의 사회적 초현실주의나 <돈바스>의 공격적 블랙코미디를 떠나 직접적이리만치 선명한 동화 구조로 수렴하는 이유도 될 것이다.
<두 검사>는 대안에 관해 어떤 설교나 장담을 남기지 않는다. 관료제의 부패와 인간의 비소함을 보여줄 뿐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은 부조리극의 쾌감 뒤에 남은 쓴맛처럼 삼킨다. 세르게이 로즈니차 감독이 우크라이나 출신의 문호 니콜라이 고골의 영향을 언급한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일종의 냉혹함이다. 고골의 <감찰관> <외투> 등에서 체제를 지탱하는 힘은 소인배들이 수행하는 일상의 악에서 나온다. 이상을 맹신하고, 절차를 준수하고, 서류를 처리하며 때로는 친절하기까지 한 평범한 얼굴들의 집합을 통해 역사는 반복된다. 왜 다시 최초의 감옥인가? <두 검사>는 절차를 성실히 밟은 자에게 약속된 낙원이란 처음부터 이미 거기 있었다는 냉소를 택했다. 그리고 <두 검사>식의 냉소는 현재진행형의 절망 위에서 문득 슬픈 기색을 내비친다. 전쟁터의 한 귀퉁이에서 섬뜩한 가사의 돌림노래를 웃는 얼굴로 따라 부르는 아이들이 여전히 살아가는 나라, 그 속에서 어떤 영화는 탄식처럼 차가워지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