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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스위치를 켜고 끄다가

스위치를 켰다, 껐다. 이걸 잘해야 오래 간다. 슬픔엔 역치가 있는 법이라 주변이 온통 괴롭고 어려운 소식뿐이라도 내내 괴로워만 하면서 살 순 없다. 전쟁의 화마 속 매일 불의, 부당, 부조리한 뉴스로 넘쳐나지만 다들 묵묵히 오늘을 살아간다. 그 앞에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하게’ 따위의 말을 쉽게 붙이는 건 무례하고 둔감한 짓일 것이다. 슬픔이 자신을 완전 집어삼키기 전에 치열한 마음으로 스위치를 끄고, 일상을 버티고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버틴다’는 선택을 한 모든 이들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무너져가는 세상 또한 그렇게 모인 일상의 힘을 기둥 삼아 간신히 꼴을 유지한 채 버티는 중이다.

다들 스위치를 끄는 신호나 의식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최근 내가 택한 방식은 출퇴근길에 음악을 크게 듣는 거다. 너무 멀다고 투덜거렸지만 습관이 된 뒤엔 하루 2시간 남짓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랜덤 플레이로 무작정 듣다 보니, 미지의 존재와 예상 밖의 만남을 통해 좁은 지도가 한뼘 넓어지는 즐거움이 있다. 물론 유행이 한참 지난 알고리즘에 걸려 답답한 인간이 될 때가 더 많은 건 비밀도 아니다. VANNER의 <폼>을 듣고 좋다며 주변에 추천했다가 이미 5년 전 노래란 걸 안 뒤론 플레이리스트 노출을 봉인시켰다. 우즈가 군대에서 부른 을 반복해서 듣고 소식을 찾아보다 이미 제대한 지 한참 지났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적도 있다. 성시경, 나얼의 <잠시라도 우리>, ITZY의 <THAT’S A NO NO>등 기준 없는 알고리즘에 휩쓸려 종잡을 수 없는 시간대를 걷고 있는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최근 한 가수가 추가됐다. 나만 알고 싶지만 실은 나 빼고 모두가 공유 중인, 인디계의 신성 한로로다.

혹자에 따르면 인디 음악계 ‘3대 봄’이 있다고 한다. 우효의 <청춘>, 새소년의 <난춘> 그리고 한로로의 <입춘>. 가만히 들어보니 이들은 봄을 마냥 아름답다 노래하지 않는다는 점이 닮았다. 포근한 멜로디와 속 깊은 노랫말로, 곧 피어날 싹이 얼마나 혹독한 겨울을 버텨냈는지를 먼저 살핀다. 그렇게 어제의 아픔과 내일의 불안을 인정한 다음에야 오늘의 봄을 향한 응원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린다. 마음을 움직인다. 잡지쟁이의 기쁨 중 하나는 종종 이렇게 마음을 움직인 이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만날 기회가 생긴다는 거다. 우즈가 영화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에 출연해 표지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번주 한로로가 신보를 들고 <씨네21>의 문을 두드려주었을 땐, 오늘도 잘 버틴 스스로가 기특해 (아무도 해주지 않는) 칭찬을 해주고 싶어졌다.

‘아슬히 고개 내민 내게/ 첫 봄인사를 건네줘요/ 피울 수 있게 도와줘요.’ 감히 성시경의 ‘이윽고’ 이후 최고의 삼음절 가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입춘>의 ‘아슬히’를 듣고 또 듣는다. 스위치를 켠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4월16일이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도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여러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건 모독이다. 한 사람이 죽은 사건 여러 건이 일어났다, 가 맞다”던 한 영화인의 말은 백번 지당하지만 고통의 얼굴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는 건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열심히 스위치를 켰다 끄길 반복하며, 오늘을 버텨본다. 미처 내 시야에 당도하지 않은 비극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

추신. 이번주 마지막 원고를 보내온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를 읽으며 거울을 보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글쓰기란 자기 혐오와 반성에 최적화된 행위인지 모른다. 스스로 부끄러워한다는 건, 곧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기도 하다. 그 부끄러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가이드가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3년 동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