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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x cross] 공동체를 향한 피루엣, 영화 그리고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스티븐 돌드리 감독

스티븐 돌드리의 대표작은 의심의 여지없이 <빌리 엘리어트>다. 그는 영화 그리고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아버지다. 영화가 거둔 눈부신 성취 이후, 돌드리는 영화의 핵심 제작진인 각본가 리 홀, 안무가 피터 달링, 그리고 엘튼 존과 협업해 2005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만들어 세상에 공개했다. 역경을 딛고 꿈을 향해 비상하는 탄광촌 소년의 이야기는 토니상에서 10관왕을 차지하는 등 또 한번 전설을 썼다. 한국에서도 이 뮤지컬은 2010년 초연 이래 세 차례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올해 4월12일부터 7월26일까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네 번째 한국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이를 축하하고자 스티븐 돌드리 감독이 생애 처음으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와 <씨네21>이 일대일로 만나 나눈 대화를 전한다.

-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빌리 엘리어트>를 최초로 본 엘튼 존이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뮤지컬 각색을 제안했다고.

처음엔 엘튼 존의 열의가 그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몇년 후 엘튼이 영화의 각본가 리 홀과 함께 넘버 창작에 돌입하더라. 그제야 모두가 이 아이디어에 진심이란 걸 알았다. 지금은 영화보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조금 더 선호한다. (웃음) 이 스토리는 소년과 공동체 모두를 동등한 비중으로 다룬다. 영화가 주인공 빌리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뮤지컬에 이르러 공동체의 서사가 보다 분명해졌다.

-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당신의 장편영화 데뷔작이었다. 당시 당신의 무대연출 경력을 근거로 기자나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무대적’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았나. 예컨대 광산 노조와 전투경찰의 대치 속에서 빌리(제이미 벨)가 피루엣을 완성하는 점프컷은 뮤지컬에서도 유사하게 구현됐다.

그런 비평이 꽤 많았다. 한데 뮤지컬의 서사는 영화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대사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감정을 노래로 표현하니까.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노래로 못다 한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한다. 결국 춤으로 서사를 직조하는 일이 이 뮤지컬의 가장 큰 과제였다. 당신이 언급한 넘버 <Solidarity>는 15분에 달한다. 마을의 어른들은 온통 파업과 시위에 정신이 팔려 있고, 빌리는 그 틈을 타 몰래 발레 수업에 참여한다. 빌리는 어려운 발레 동작에 성공하지만 결국 아버지로부터 권투 교습 대신 발레 교습을 다녔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이처럼 춤을 경유해 내러티브의 도약 지점을 설정한 후 관객들에게 명료한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오랜 기간 워크숍을 거쳤다.

- 더 잼의 <A Town Called Malice>가 흐르는 동안 제이미 벨이 분노의 탭댄스를 선보이는 장면은 뮤지컬의 1막을 매듭짓는 <Angry Dance>가 됐다. 빌리로 분한 어린이 배우가 5분이 넘도록 홀로 무대에 남아 격분하며 고난도의 안무를 소화해야 하는데.

무대는 영화처럼 편집하거나 컷을 분할할 수 없다. 교묘한 편집이 불가능하므로 영화보다 훨씬 더 가혹한 육체적 요구가 따른다. 그래서 관객은 어린이 배우가 한계치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된다. 공연이 개막해서야 이 작품이 어린이 배우가 감당하기엔 벅차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영국 최고의 현대 무용수가 된 리암 모어가 런던 초연의 1대 빌리였다. 그가 프리뷰 공연 당일 무대 위에서 구토를 해 막을 내려야 할 정도였다. 결국 작품 전반의 난이도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 뮤지컬은 영화에 비해 윌킨슨 부인과 빌리의 이별 장면에 긴 시간을 할애한다. 각색 과정에서 빌리의 앞날에 좀더 긴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까. 영화 속 윌킨슨 부인(줄리 월터스)은 냉랭하지만 필요한 말만 하고 돌아섰다.

하나만 전제하고 들어가자. 나를 포함해 제작진 일동은 줄리 월터스를 사랑한다. 음…. 줄리가 영화에 왜 출연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일동 폭소) 진짜다. 아주 작은 독립영화에 그런 대배우가 기꺼이 출연하다니! 줄리는 이 영화가 얼마나 잘될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예산도 턱없이 적고, 감독이라는 작자는 영화 연출을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초짜였으니까. 나도 나를 못 믿던 때다. (웃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딱 열흘이었다. 열흘 안에 윌킨슨 부인의 장면을 최대한 완성해야 했다. 6개의 신을 단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줄리와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대사와 장면을 줄여나갔다. 줄리는 정확히 열흘 뒤에 차기작 촬영을 하러 떠났다. 결론은, 만약 시간이 더 있었다면 뮤지컬처럼 대사가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웃음) 줄리는 본인이 춤추는 장면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현장에서 열심이었다.

- 그래도 줄리 월터스는 이 역할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줄리는 영화가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을 때도 영화의 완성도를 사전 시사한 후 영화제 참석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줄리뿐만이 아니다. 누구도 영화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았다. 배급사였던 유니버설 픽처스는 홍보에 큰 예산을 투입하지 않았고, 칸영화제는 공식 상영을 딱 한 회차 배정했다. 그런데 칸영화제 일주일 전 열린 기자시사에서 작품에 대한 입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그 일주일간 영화를 향한 기대감이 믿을 수 없이 고양됐다. 유니버설 픽처스의 임원들 속이 어땠겠나. 공개 전엔 이 작은 영화를 어떻게 배급할지 골머리를 앓았는데, 기대치 않았던 반응이 터지자 새로운 고민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넘버 중 (2021년 공연 사진).

- 작품을 사랑하는 관객들이 공통으로 건네는 감상이 있다. 꿈을 향해 비상하는 빌리가 아니라 소년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갱도 아래로 한없이 내려가는 아버지 재키와 형 토니가 더 눈에 밟힌다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죽음의 상징에 다름 없는 숏이다. 내겐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처럼 다가온다. 작중 광부들은 사양산업 속에서 죽어가고, 이들의 공동체도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봐도, 영국은 제조업이 붕괴되고 탄광 산업이 사라지면서 수많은 광부 공동체가 붕괴됐다. <빌리 엘리어트>는 버려진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와중에 비루한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아낸, 기적과 같은 소년 빌리가 있다. 달콤쌉싸름한 이야기다.

- 2026년 현재는 ‘빌리 엘리어트’가 탄생할 수 있는 구조일까.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양극화가 점점 극심해지는 시대에 오로지 재능과 가능성만으로 한 소년이 꿈을 성취하는 이야기는 과거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발레에 한정해 말하자면, 또 영국의 상황에 국한해 전하자면, 가능하다. 내가 가장 자부하는 일이 뭔지 아나. 영화와 뮤지컬이 나온 이후 영국 발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계급의 소년들이 발레를 배우고 있다. 다양한 아웃리치 프로그램의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왕립발레학교는 노동자계급 공동체를 직접 찾아가 소년들을 발레의 세계로 이끄는 아웃리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물론 이는 발레계의 특수한 성과다. 제도적 기반이 존재해야 비로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 작품 속 탄광촌은 노동조합의 형태로 온전히 결속된 공동체였다. 직업에 대해 자부심이 넘쳤고 노조원은 서로를 지지했다.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만 노조가 강성한 현실을 원치 않았다. 모두가 알듯 대처의 우파 정부는 반노조 정책을 펼쳤고, 지금 영국엔 제조업이 전무하다. 칼과 세탁기, 자동차 등 그 어느 것도 영국에선 생산되지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한국은 여전히 제조업 중심 국가가 아닌가. 노조 또한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영국은 금융업을 제외하곤 대표 산업이 없고, 노조가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다.

- 영화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는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십시오”(To look life in the face)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는 <디 아워스>의 세 여성은 물론,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한나 슈미트(케이트 윈슬럿)나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에게도 통하는 구절이다. 당신의 영화 속 주인공은 삶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통과한다.

내가 회피형 인간이라 그런가, 고통이나 갈등을 초연하게 직면하는 인간 군상에 언제나 깊이 이끌렸다. 그러나 고통은 회피해도 낯섦은 동경한다. 나는 뼛속까지 연극인이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제작사 워킹 타이틀의 에릭 펠너가 <빌리 엘리어트>로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해보겠느냐며 물었을 때 수락한 이유는 단 하나, 영화를 만들 줄 몰라서였다. 그렇게 늘 새로운 자극에 끌린다. 탐구심이 강하며 다종다양한 일에 쉽게 들끓는 성미를 살려 여기까지 왔다.

- <빌리 엘리어트>를 영화와 뮤지컬로, 엘리자베스 2세의 이야기를 연극 <디 오디언스>(60년 동안 12명의 총리와 매주 비공개 회담을 가진 엘리자베스 2세의 이야기다.-편집자)와 시리즈 <더 크라운>으로 매체를 달리해 다루었다. 이외에도 매체를 바꿔 다시 만나고픈 인물이 있나.

나를 입봉시킨 워킹 타이틀의 에릭 펠너는 이 뮤지컬을 다시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건넸다. 그렇게 좋은 아이디어인지 모르겠다. (웃음) 연극 <디 오디언스>를 연출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작가 피터 모건과 함께 <디 오디언스>를 TV시리즈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았다. 진지한 생각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 로스앤젤레스로 가 “돈도 많이 들고, 우리 둘의 요구 조건도 다 맞춰야 할 거예요”라며 관계자들에게 으름장만 놓고 올 참이었는데 넷플릭스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더 크라운>이 시작됐다.

- 최근엔 OTT 시리즈와 연극 연출에 주력 중이다. 예정된 차기작이 있나.

<더 크라운>의 새 시즌을 준비 중이다. 엘리자베스 2세 치세로부터 훨씬 과거를 다룰 예정이다. 또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의 프리퀄 연극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도 조만간 실행에 옮기지 않을까 싶다. 구상 중인 차기작은 이외에도 다양하다. 지난해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와 함께 연극 <교토>를 런던 무대에 올렸다. 교토의정서 체결을 둘러싼 협상극인데 이를 TV시리즈로 개작하고자 한다. 영화도 한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본토에서 벌어진 항공전을 소재로 한 영화 연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단 한번도 SF영화나 TV쇼를 만든 적이 없지만 하나씩 도전하며 역량을 확장해가고자 한다.

- <빌리 엘리어트>는 여전히 많은 국가의 영화관에서 재개봉을 하고, 거듭 뮤지컬 무대에 오르고 있다. 작품이 가진 고유의 힘을 실감하나.

이 이야기가 여전히 수많은 이들과 공명한다는 사실이 기쁘다. 자기 발화를 시도하는 어린이가 가족과 맞부딪히며 분투하는 이야기는 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일 터다. 이 기회에 공동체 문화를 재조명하고 싶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공동체에 소속되기를 열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는 인공지능혁명 시대일수록, 시장이 더이상 장년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 탈공업화시대일수록, 우리에겐 예술이 필요하다. 예술의 가치야말로 공동체에 근거하고, 그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야기로부터 예술이 탄생한다.

빌리를 찾아라!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되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배우들.

탭댄스, 발레, 애크러배틱 등 춤에 재능이 있는 어린이. 신장 150cm 이하 변성기 이전의 2013~16년 출생자.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한국 프로덕션이 ‘빌리’를 뽑기 위한 오디션에 내건 자격 요건이다. 물론 빌리가 될 어린이 배우라면 노래도 연기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해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어린이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작품 속 빌리처럼, 제작진 역시 어린이 배우의 ‘가능성’을 중점에 두고 빌리를 찾아 나선다. 어린이들은 발탁 이후에서야 비로소 빌리가 된다. <빌리 엘리어트>의 프로덕션은 ‘빌리 스쿨’을 통해 어린이 배우들에게 노래, 안무, 연기를 총체적으로 지도한다. 스티븐 돌드리는 이 과정이 “아주 긴 헌신을 필요로 하지만 공연 한편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라고 말한다. “‘아, 정말 훌륭한 배우가 되겠구나’ 싶은 아이가 있어도 당장 기술이 부족하다면, 우리와 함께 몇년 동안 시간을 보낸다. 때로는 다른 역할에 먼저 투입한 다음, 공연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훈련을 병행해 기회를 도모하기도 한다. 톰 홀랜드가 그랬다. 처음엔 마을 소년 중 한명인 톨보이로 시작했는데, 빌리 스쿨에서 특훈을 지속하며 탭댄스 실력이 늘었다. 이후 빌리의 친구 마이클로 무대에 섰고, 결국 빌리 역까지 거머쥐었다. 그렇게 3년이 넘도록 우리와 함께했으니 가족이라고 말할 수밖에. 공연 자체를 놓고 보아도 <빌리 엘리어트>팀은 가족이나 다름없다. 한국 공연을 보라. 80대의 박정자 선생부터 8살의 배우까지. 남녀노소가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추는 일은 가족이 되지 않고선 해내기 어렵다.”<빌리 엘리어트>를 무대에 올리는 대부분의 국가는 빌리 스쿨을 운영한다. 이번 한국 공연의 빌리(김승주, 박지후, 김우진, 조윤우) 또한 50주간의 빌리 스쿨(월~토 4시간 내외의 탭댄스, 발레, 애크러배틱 등의 신체 훈련)과 13주의 공연 리허설을 거쳐 무대에 오른다. “영국의 경우 기숙학교가 따로 존재한다. 신체 훈련과 노래 연습은 물론, 교과 수업까지 지도한다. 입학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한 어린이의 삶 전체를 통째로 책임지는 셈이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아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거나,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조치하진 않는다. 빌리 스쿨은 각 국가의 현실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영된다. 양육자의 부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린이 배우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다른 도시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등의 결단이 따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신시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