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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클로징] ‘팔란티어 선언’을 주의하라

미국의 거대 데이터 기업 팔란티어가 22개 항목의 선언문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AI 무기화는 불가피하니 더 속도를 올려라”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지켜내야 한다” “징병제 부활이 살 길이다” “실리콘밸리는 이제 국방부의 일부이다” 등. 노골적이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많은 이들이 이를 “파시즘”이라고 몰아붙인다. 피터 틸과 알렉산더 카프와 같은 자칭 천재 기업가들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는 더욱 불편한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이러한 “기술 파시즘”이라는 것이 일부 인사들의 일탈적인 과대망상을 넘어서서 현대의 산업 자체에 내재한 역사적 경향이라면?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파시즘은 민족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 보수주의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러한 산업문명에 본질적으로 장착된 필연적 “혁명”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사실 대의제민주주의도 자유시장경제도 18세기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것들이라서 19세기 이후의 산업문명과는 기묘한 동상이몽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폴라니는 그리하여 산업사회의 현실에서는 이 두 가지 제도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파괴적인 “이중 운동”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 결과 작동을 멈추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산업사회는 결국 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다 포기하면서 아예 계몽주의가 낳은 일체의 가치를 부인하는 “혁명적” 운동을 낳게 되었으니 그것이 파시즘이라는 것이었다. 폴라니의 논지에 함축된 중요한 열쇳말이 하나 더 있다. 거대한 기술혁신의 물결이다. 만약 이것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파시즘 운동은 기존 체제와 가치의 전면 부정이라는 폭력적 허무주의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혁신의 물결에 올라탄다면 파시즘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산업사회라는 미래의 비전을 장착한 강력한 정치 프로젝트로 거듭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2차 산업혁명으로 열린 ‘자동차와 비행기와 탱크의 세상’이라는 기술의 미래주의와 결합하면서 파시즘은 일부 불만분자들의 준동이 아니라 산업가와 중산층과 노동계급과 지식인들까지 끌어당기는 강력한 이념이 될 수 있었다.

100년이 지난 2020년대의 세계는 이 두 가지 점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대의제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라는 지난 30년 동안의 지배 이념은 전 세계 곳곳에서 무너지고 충돌하면서 무수한 사람들의 불만과 분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AI와 로봇을 앞세운 폭발적인 혁신은 편리함을 무기로 80억 인구를 흡수하고 있으며 최신 기술에 기반하여 작동하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세상의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팔란티어를 연구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기술 파시즘”(techno-fascism)이라는 말은 그래서 어쩌면 이번 팔란티어 선언을 이해하는 데 꼭 맞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고 의심했던 팔란티어라는 기업 수뇌의 세계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분노하고 비판을 퍼붓거나 감동하여 동조를 보내기 전에, 현대 산업문명의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이 굵직한 벡터 하나를 꼭 유념할 필요가 있다. 파시즘은 지나간 악몽이 아니라 산업문명이 존재하는 한 무한히 반복되는 영겁회귀일지도 모른다. 이 선언문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다시 한번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