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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피아노 이야기

오랫동안 사랑하던 공간이 없어지던 그날 새벽, 작은 술집에 모인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뒤풀이가 있었습니다. 빈 맥주병들 사이로 그는 조용히 제게 물었습니다. 사월씨 작업실에는 피아노가 있어요? 네, 미디가 되는 마스터 키보드가 있어요. 아니, 그거 말고 진짜 피아노 말이야. 그걸 왜 물어보시지? 의아해하다가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 사라진 대화였습니다. 며칠 후 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공간을 정리하면서 거기에 있던 업라이트피아노를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옮기는데 좀 번거로울 수도 있겠지만 이 피아노가 누구에게 갔을 때 가장 좋은 선물이 될까, 했을 때 네가 떠오른 거지.”

레벨 0밖에 되지 않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검을 받게 된 마법사의 기분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느냐 한다면 전혀 그런 쪽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많은 음악가의 공연에서 매만져졌을 그 피아노를 제가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습니다. 저에게 생긴 일을 동료 몇에게 털어놓자 마법사 후계자로 임명된 것 같은 분위기의 축하와 응원을 받았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피아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필 저를 떠올려준 그의 마음을 영광스럽게 받겠다고 다짐했지요.

입양한 아이가 나에게 오고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설렘으로 작업실 대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막상 정리하다 보니 끝도 없이 짐을 비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처분하면 좋을 것 같은 물건들은 테라스에 내놓고 간이 창고도 정리한 덕분에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넓어졌습니다. 바닥을 쓸고 닦고 환기를 하니 흰 커튼이 빈 공간을 어루만지듯 흔들거립니다. 제가 봐도 새로운 악기를 맞을 준비로 공간이 완벽해졌을 때, 차창 밖으로 내려다본 주차장에는 어느새 도착한 피아노가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사다리차도 설치가 안되는 5층이라 양해에 양해를 구했지만 더 걱정되었던 건 어떤 설치 기사님에게라도 한 소리 듣곤 했던 좁은 복도였습니다. 복도의 폭과 피아노의 길이를 맞춰보긴 했지만 너무 아슬한 느낌이긴 했습니다. 혹시 안 들어가면 어떡하죠? 하면서 기사님은 제 작업실 문을 드릴로 떼냈습니다. 제 몸이 짐이라도 될까 작업실의 가장 구석에 조그맣게 선 채 여쭤봤습니다. 그런데 진짜 피아노가 안 들어가면 어떡하죠? 일단 해봐야죠. 그게 저희 일인걸요. 의자가 먼저 도착하고 분해된 윗뚜껑과 앞판, 건반 뚜껑이 차례로 계단을 올라와 작업실 벽에 무심히 세워졌습니다. 다음으로 건반 현을 치는 해머가 달린 부분인 액션이 작업실에 들어왔을 때, 그건 큰 동물의 갈비뼈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어떤 자태일지 모를 무시무시한 본체가 도착할 것입니다. ‘피아노다… 진짜 피아노가 오고 있다….’

고등학생 때, 석식 시간이면 집으로 돌아와 혼자 밥을 챙겨 먹고 입시 미술학원에 갔습니다. 학원에 가기 전 약 40분 동안, 절반은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고 나머지 절반은 피아노를 쳤습니다. 연주하는 곡은 딱 세곡이었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의 삐걱 버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애니메이션 주제곡의 자기 마음대로 버전, 시이나 링고의 <마루노우치 새디스틱>의 마조히스틱 버전…. 미술학원에 다니지 않았다면 학교에 남아 야간자율학습이라도 해야 했기에 이 오후의 잠깐은 원래 저에게 허락되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까만 업라이트피아노 앞에는 흰 셔츠에 해리 포터가 맨 것 같은 넥타이를 매고 네이비색 조끼를 입은 교복 차림의 제 모습이 비칩니다. 긴 머리에 까만 뿔테 안경도 쓰고 있네요. 그렇게 귀중한 자유 시간이 생겼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피아노를 쾅쾅 치고 있었던 것은 나름의 반항 같은 거였을까요, 아니면 사실은 그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요. 이후 진학한 대학교와 맞지 않았던 저는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을 서성이게 되었고, 결국 음악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뿔테 안경 여고생이 몰래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고 만 것이죠. 어쩌면 저는 그애를 다시 업라이트피아노 앞에 앉혀놓고 싶었던지도 모릅니다.

계단에는 카펫을 깔고, 피아노에는 이불을 덮고 네명의 건장한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하나, 둘, 셋, 으쌰! 하고 힘을 써서 피아노를 들어 올리면 겨우 계단 한칸. 좁은 계단참에 걸려서 그마저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아직 1층의 반도 오르지 못했는데 운반 기사님들은 몇십분을 오도 가도 못하고 있습니다. 기사님, 이거는 아닌 것 같아요. 고객님, 그래도 여기까지만 해보겠습니다. 여기까지 해보고 안되면 진짜 결정을 하시죠.

코앞으로 다가온 따릉이 반납 시간에 쫓겨 자전거를 타고 주차 장소를 향해 갑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저 피아노 못 받았어요. 아니 왜요? 피아노가 복도에 안 들어가서 돌려보냈어요. 불쑥 찾아온 봄공기 속에 자전거 페달을 밟으니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가질 수 없는 걸 욕심낸 것 같아서 부끄러워요.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게 왜 부끄러워요. 피아노도 사월한테 오고 싶었을 거예요. 피아노도, 저를 떠올려준 마음도 받지 못한 작업실의 빈 공간은 이상하리만큼 커다랗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