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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과거의 기록을 디딘 오늘 - 모은영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2026년 3월, 뜻밖에 반가운 소식이 영화계를 찾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자료원) 원장직에 모은영 전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위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모은영 원장과 자료원 사이에는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여년의 시간을 자료원에서 보내며 시네마테크KOFA의 다양한 기획전을 꾸려왔다. 관객에게 기억될 때 빛을 발하는 오랜 영화들을 그러모으며 그는 영화와 관객의 거리를 가깝게 했다.

그렇게 극장을 찾은 사람들은 시나브로 영화 아카이빙의 일부가 되었다. 그 뒤로 또 다음 10년 동안 모은영 원장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지난해에는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시간을 쌓으며 영화적 경계를 넘나들었다. 취임 후 한달. 그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또 앞으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을까. 자료원의 내일을 고민하는 모은영 원장은 역설적으로 과거를 현재화하고자 했다.

-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자료원에서 근무하고 10여년 만에 돌아왔다. 자신이 기억하는 자료원과 달라 보이는 부분이 있을 듯하다.

익숙하고 낯설다. 그건 아마도 내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인 것 같다. 4층과 지하 1층, 극장만 오르락내리락 할 때와 복도 맨 끝 원장실에 앉아 업무를 볼 때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다르다. 오랫동안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내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고 재미있게 꾸려갔다면 지금의 자리에서는 전체를 보는 시야를 키우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꾸려줘야 한다. 자료원은 공통의 목표가 뚜렷한 집단이기 때문에 긴 호흡으로 합의점을 맞춰나가는 문화가 중요하다. 조직적으로는 지난 10년 동안 많이 안정화된 것 같다.

- 취임 이후 한달여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한달 동안 팀 구성원들을 만나 현재 우리에게 시급한 현안들에 대한 상황을 전달받고 히스토리를 계속 트래킹했다. 예산 문제부터 국립영상박물관, 파주 보존센터까지 눈앞에 주어진 미션만 한가득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안건을 허덕이며 쫓아간 것 같다. 정보를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방향을 맞춘 정도다. 직원들에게는 최근 이렇게 말하는 중이다. “그동안 너무 평화로웠죠? 이제 시작입니다!” (웃음)

- 자료원이 눈앞에 두고 있는 현안들을 하나씩 짚어보자. 먼저 부지를 찾고 있는 국립영상박물관은 어디까지 왔나.

이제 연구·용역에 들어간 상태다. 부지 확보 중이기 때문에 완전히 시작 단계라 할 수 있다. 김홍준 전 원장이 일찍이 엄청난 공을 들여놓았다. 부지도 여러 군데 찾아다니며 예산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까지의 사업을 내가 이어받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논의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경험과 이야기를 구술로 수확하는 것이다. 영화와 영상, 대중문화 전반까지 다양한 분야를 합쳐 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이 문화적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힘을 발휘하는 시점인 만큼 모든 시간을 정리하고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따라 국립영상박물관은 일종의 랜드마크로서 모든 사람이 편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자 광장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물론 그 용도를 지금 정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워낙 장기 프로젝트인 만큼 앞으로 방향을 구체화해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장면이 있다면, 그곳에서 시상식이 열리는 역동적인 상상을 하곤 한다.

- 영상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국립영상박물관을 건립하는 목표도 결국 자료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료원이 1974년 설립된 이후 50여년이 지나는 동안 아카이빙과 보존·복원의 전문 조직이 됐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의 인프라가 구축되고 소프트파워가 마련된 경우는 손에 꼽는다. 그간 자료원이 쌓아온 노하우와 역사로 많은 역할을 도맡을 수 있을 듯하다.

- 국립영상박물관의 가칭은 ‘K콘텐츠복합영상관’이다. 앞에 붙은 K자에서 글로벌시장을 겨냥한 목표가 암시된다.

글로벌시장을 두루 보는 건 문화적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문화는 단순히 영화 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체화하는 모든 과정에 가깝다. 어린 시절 일본 만화를 보며 자란 세대가 50~60대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일본을 가깝게 생각하고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고 김밥과 라면이 궁금해진 어린 친구들이 한국에 여행 와 친숙해지는 생애주기적 문화 경험을 체감하면 좋겠다. 그 중심에 국립영상박물관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칭 K콘텐츠복합영상관이 붙여진 듯하다.

- 물리적으로 저장공간이 거의 꽉 찬 파주 보존센터를 보완하는 것도 자료원의 시급한 미션이다.

현재는 리모델링으로 공간을 마련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자료센터를 신축하거나 확충하는 방식으로 넓혀나가려 한다. 공간만큼 핵심적인 게 아카이브 방식이다. 지속 가능성을 위해 친환경 에너지를 이용한 그린 아카이브로 활용하고, 보존·복원 방식 또한 자동화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교육 기능도 병행해야 한다. 이곳에서 이뤄지는 복원 기술이 다음 세대에 계속 전수돼야 하기 때문이다. 파주 보존센터는 필름을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왜 우리는 아직도 필름을 이야기할까. 단순히 레트로한 감성 때문에? 추억으로? 그게 아니라 보존 과정에 있어 아직까지도 디지털보다 필름이 훨씬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필름의 보존력을 대체할 수 있는 매체는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필름을 다루는 기술까지도 교육적 차원에서 함께 이어가야 한다.

- 국립영상박물관부터 파주 보존센터, 유실 작품 수집까지 취임과 함께 거대 프로젝트들이 주어졌다. 초임 원장에게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왔을 것 같다.

부담스러웠다. (웃음) 이걸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고민이 컸다. 10년 만에 자료원에 와서 보니, 나의 취임이 상징하는 바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세대교체의 의미라든가, 자료원 전 직원이 원장에 취임한 점이라든가, 역사적 상처에서도 그렇고. 그래서 더더욱 3년의 임기를 잘 치러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커졌다.

- 수집, 복원, 아카이브는 결국 시간과 기술, 예산 문제로 귀결된다. 특히 예산적 측면에서 중요성을 크게 느낄 텐데.

예산은 늘 어려운 문제다. 자료원 본연의 사업 예산도 매년 줄어들고 있다. 최근의 사회상 자체가 시간에 따른 구조조정을 계속 요구한다. 새로운 제작 지원이 생긴다고 가정하면, 제작 지원 형태는 과거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료원은 필연적으로 변화하기가 어려운 조직이다. 조직 본연의 업무와 일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고, 달라져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시대상으로 보면 과거의 것들이 계속 청산되고 조정돼 없어져야 할 대상이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된다. 그래서 일반적 기준에서 우리가 하는 업무 방식은 예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앞으로 예산 편성에 있어서 자료원의 특성과 차별점이 더 많이 이해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특히 문화유산을 다루는 맥락에서 이를 이어가기 위한 관심과 투자, 지원이 필수적이다.

- 영화산업 내에도 두드러지는 변화가 있다. 팬덤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콘서트 실황영화, VR영화가 일정 분량 이상의 스크린을 배급받고, 이제는 산업 전반적으로 AI영화 제작을 적극적으로 독려한다. 자료원이 수집·보존하는 대상 범주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영화뿐만 아니라 숏폼, 쇼츠 등 뉴미디어까지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이 크다. 앞으로 할 일이 정~ 말 많다. 다만 이런 기준 정립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수집 정책에도 공식적으로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방침을 세워야만 한다. 자료원 설립 기준 자체가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정책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수집의 범위를 얼마큼 지정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수집할 것인지, 어떤 명목으로 정의할 것인지 등 다각도의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아카이빙은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시간과 예산이 배로 들기 때문에 더더욱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

- 시네마테크KOFA에서 5월부터 새로운 기획전이 열린다. 홍상수 감독 데뷔 30주년을 맞아 전작을 조명하는 자리다. ‘홍상수 전작전: 인트로덕션’에서는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개봉예정작 <그녀가 돌아온 날>까지 총 36편을 상영한다. 이 기획전이 특이한 게 워낙 작품 수가 많아 작품당 딱 두번씩만 상영하더라. (웃음) 다작하는 감독 홍상수라 가능하고, 이 모든 것을 보유한 자료원이라서 가능한 기획이다.

김홍준 전 원장이 있을 때부터 기획된 전작전이다. 지금까지 이런 자리를 훌륭하게 만들어왔지만 앞으로도 자료원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한국영화에 대한 재정의를 현재화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창기 영화를 큐레이션하여 상영한다고 하면 ‘저때는 저랬구나’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그 시기에 나온 연속된 작품을 보면서 시대 분위기상 왜 이런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땐 어떤 시도를 가치 있게 여겼는지 등을 피부로 체감하게 된다. 기획전을 준비하는 이유가 단순히 ‘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여서는 안된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이 영화가 왜 필요한지 사회적 분위기를 돌아보고 각자의 결핍을 채울 수 있게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싶다. 전작전도 그렇다. 한 감독의 생애를 따라가는 굴곡 있는 작품 변화를 보다 보면 그를 중심으로 흘러간 시대상과 가치관의 변화를 알 수 있다.

- 자료원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객에게 필요한 태도란 무엇인까. 아카이빙의 실천을 관객이 어떻게 행할 수 있을까.

영화에 담긴 시간을 몸소 체험하는 태도가 있으면 좋겠다. 일종의 보물찾기와 같다. 영화사의 보물을 발견하고 그 안에 담긴 시간과 맥락을 들여다보면 좋겠다. 과거의 영화와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아왔는지 영화를 통해 발견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면 좋겠다.

- 3년은 길고도 짧다. 이 임기를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너무 많은 걸 하지 않으려 한다. 주어진 시간 안에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현명하게 처리해가고 싶다. 나 다음에 오실 원장님이 우리가 자료원에서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일을 펼치고 싶다. 또 작게는 3년의 시간을 거쳤을 때 나를 포함해 나와 함께해준 사람 모두가 성장해 있으면 좋겠다. 그것만큼 기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