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부터 약 5년 동안 경기도 화성 일대를 배회하며 강간과 살인을 저지른 진범의 정체가 2019년, 33년 만에 밝혀졌다. 그의 이름은 이춘재. 이미 별개의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그의 실명이 세상에 알려진 순간, 영구 미제의 상징이었던 비극이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이라 재명명됐다. ENA 새 월화드라마 <허수아비>는 이 실화를 모티프 삼아 가상의 마을 강성으로 시선을 옮긴다. 학교폭력의 트라우마를 안고 강력계 형사가 된 태주(박해수)와 어린 시절의 가해자이자 이제는 사건을 함께 수사해야 할 검사가 된 시영(이희준)의 관계를 축으로, 드라마는 연쇄살인이라는 압도적인 악과 마주한 평범한 이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 세계를 함께 그려낸 박준우 감독과 이지현 작가를 만나 작품의 이모저모를 물었다.
- <그것이 알고 싶다> <궁금한 이야기 Y> 등 시사 교양 연출가로 쌓아온 감각이 드라마 기획으로 이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번 작품의 최초 기획 의도와 발화점은 무엇이었나.
박준우 2021년경 SBS에서 두편의 드라마 연출을 마친 시점이었다. <닥터탐정>은 산업재해를 다루었고, <모범택시>의 에피소드 또한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 많았다. 실제 사건을 각색해 극으로 다루는 감각들을 익혔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윤리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사건의 단편적 자극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사건을 통해 그 시대를 관통하는 서사를 그려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 <모범택시> 시즌1 후반부에서 호흡을 맞췄던 이지현 작가를 다시 파트너로 낙점했다. 이지현 작가가 가진 강점은 무엇이라 판단했나.
박준우 <모범택시> 당시 작가 교체라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며 이지현 작가가 합류했다. 당시 극이 초반에 비해 무거워졌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묵직하게 담아내는 이 작가의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다. 특히 장르물에서 악역의 대사를 구축하는 감각이 탁월하다. 이번 작품에는 이춘재를 모티프로 한 ‘이용우’라는 악인이 등장하는데, 이 캐릭터를 극의 기둥으로 세우는 난제를 이 작가라면 해결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범인이 허수아비 행세를 하며 피해자를 노린다’라는 으스스한 설정 역시 이 작가의 아이디어다.
- 감독으로부터 집필 제안을 받았을 때, “이 이야기는 내가 써내려갈 수 있겠다”라는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나.
이지현 실화를 다루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처음에는 고사했다. 그러다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였던 두 인물이 형사와 검사로 만나 공조한다’라는 설정을 떠올리며 실마리가 풀렸다. 증오하는 대상과 손잡아야 하는 심리적 딜레마가 극적 긴장감을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며 집중하고 싶었던 것은 애도하는 마음이었다. ‘만약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이 사람들은 얼마나 선하고 평범한 일상을 누렸을까’를 되물었다. 악인에 의해 어그러진 평범한 이들의 삶을 위무하고, 시청자와 함께 그 시절을 온전히 애도할 수 있다면 이 글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허수아비’라는 제목이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준다면.
박준우 <살인의 추억> 당시 제목을 고민하던 봉준호 감독에게 박찬욱 감독이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를 제안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형사들이 범인이 지나다닐 법한 길목에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적어놓았던 문구다. 나 역시 그 문구가 좋아 제목으로 생각했으나 모두의 만류로 무산됐다. (웃음)
이지현 허수아비는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논밭에 서 있다. 범인 역시 인간의 탈을 썼으나 본질은 인간이 아닌 존재다. 극 중 태주가 범인을 향해 “인간 같지 않은 놈이 인간 행세를 하며 살고 있다”라고 일갈하는데, 연쇄살인마라는 낯선 존재를 가장 잘 형상화하는 단어가 바로 ‘허수아비’였다.
- 8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과 공권력의 폭력을 동반한 강압수사 등 시대의 공기를 가감 없이 담아냈다. 연출가로서 시대극에 대한 갈증이 있었나.
박준우 미국의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처럼 실제 사건을 통해 현대사를 조명하는 시리즈물을 좋아한다. <허수아비>로 80년대를 다뤘다면, 향후 90년대와 2000년대의 상징적인 범죄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 현대사의 이면을 훑어보는 범죄 시대극 기획을 이어가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 사건을 조사하면서, 각본과 영상에 꼭 녹여내고 싶었던 실제 사건의 디테일이 있었나.
이지현 범죄 방식에 대한 고증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수위 조절에도 공을 들여야 했다. 살인 현장의 리얼리티가 시청자의 거부감으로 이어지지 않으면서도, 사건의 비정함은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자가 누군가의 가족이었다는 점을 많이 생각하게 됐다. 실제 사건에서 삼촌이 조카의 시신을 발견한 사례가 있었던 것처럼, 발견자의 비통함을 묘사할 때는 그 고통을 세밀하게 상상하고 글로 옮겨보려고 했다.
- 태주 역의 박해수, 시영 역의 이희준을 캐스팅한 배경이 궁금하다. 두 배우여야만 했던 결정적 이유가 있었나.
박준우 주인공 태주는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특히 2019년 시점의 노역까지 소화해야 했기에 분장의 어색함을 상쇄할 수 있는 연기 내공이 필수적이었고, 그런 면에서 박해수를 기획 초기 단계에서부터 떠올렸다. 이희준의 경우 <살인자ㅇ난감> <악연> 등 최근작들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제대로 물이 오른 배우라고 느껴 캐스팅했다.
- 경찰과 검사의 대립은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여기에 ‘학교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과거사적 층위를 더했다. 이들에게 이러한 서사적 장치를 부여한 이유는.
박준우 시영은 끔찍한 학교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이지만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80년대 자체가 남성성의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이고 그 폭력의 사슬을 끊기 어려웠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허수아비>는 폭력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주인공이 당시 여성들에게 가해진 연쇄살인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물들 사이의 미시적인 폭력을 겹쳐놓음으로써 그 시대가 품고 있던 폭력의 연쇄적인 층위를 보여주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