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의 은행나무는 각기 다른 세 시대를 사는 인물의 삶을 지켜보는 말 없는 목격자다. 일디코 에네디 감독의 <침묵의 친구>는 삶의 주변부를 풍성하게 감싸고 있는 식물이라는 실제를 뇌신경학과 식물학, 식물 실험이라는 다큐멘터리적 사실과 엮어 서사에 뒤섞는다. 비인간 피사체가 카메라 프레임 안에 지속적으로 유의미한 자리에 놓일 때 나무는 하나의 인물처럼 기능할 뿐만 아니라 지속되는 숏 안에서 감정에 감응하는 주체로 보이거나 정념을 품은 존재로 지각되기 시작한다.
식물의 정동(情動)
<침묵의 친구>가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영화가 비인간 존재를 다루는 방식에서 유사하게 알베르 라모리스의 1956년작 <빨간 풍선>을 향한 비판과 옹호를 떠올릴 수 있다. 무생물인 풍선을 동물화, 의인화하는 이 영화에서 풍선은 소년 파스칼과 우정 어린 관계를 맺으며 생명성을 띤 존재처럼 제시된다. 잘 알려져 있듯 이에 대해서 무생물에 기계적인 연출로 인위적 정동을 부여했다는 비판과 영화적 마술을 통해 풍선이 하나의 존재로 성립한다는 옹호가 공존한다. 몽타주와 서사라는 영화적 트릭으로 풍선에 덧입혀진 포토제니를 긍정하는 입장에 따르면 마법의 빨간 풍선은 스크린 밖의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움직임을 조작할 수 있었던 풍선과 달리 식물은 이미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실제다. 자연에서 발생한 생명체는 또한 연출자의 의도 안에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피사체이기도 하다. 거시적으로 정(靜)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식물은 연출 의도와 완전히 일치할 수 없는 채 카메라에 포착될 뿐이다. 그런데도 오래된 거목이, 화분에 심어진 꽃과 들풀이 프레임에 지속적으로 놓일 때 관객은 그것이 인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침묵의 친구>에서 식물의 정동은 연출이 아니라 포착의 문제를 먼저 깨우친다.
일디코 에네디의 카메라는 식물의 형태를 포착하는 풀숏과 클로즈업을 통해 단순한 정물에 그칠 수도, 상징을 매개할 수도 있으며 정동을 자아낼 수도 있다. <침묵의 친구>는 2020년의 뇌신경학자 토니 웡(양조위), 1908년에 대학에 입학한 최초의 여학생 그레테(루나 베들러), 1972년 이성 친구 군둘라의 실험을 돕는 한네스(엔조 브룸)를 통해 식물과 인간이 종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를 어떻게 동일시하는가를 다층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자연물을 포착하는 숏이 반복될 때 서사적 맥락과 기능이 반드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만은 아니다. <갓랜드>는 종교사와 사진술의 역사에서 시작하는데 사제가 바라보는 아이슬란드의 풍광은 1인칭과 3인칭의 시선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연출자가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초월자이자 절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계를 반복하려 할수록 스크린 밖에서도 실재하는 풍경은 점차 그 의도를 벗어난다. 각각의 방향으로 튀며 낙하하는 폭포의 물방울, 자유의지로 테이블 위를 기어가는 딱정벌레, 바람에 아무렇게나 나부끼는 머리칼과 같은 요소는 연출자의 의도와 통제에서 벗어나 이미 존재하는 자연 이미지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반대 사례다.
<침묵의 친구>가 비인간 피사체인 식물을 프레임 안에 놓아 보이는 방식은 위 두영화가 보인 경향 사이에 있다. 카메라는 식물이라는 자연물의 통제 불가능성을 인지하며 화면의 중심 프레이밍과 포커싱으로 지속되는 숏을 통해 식물이 인물을 ‘바라본다’는 정동을 구사한다. 독일 대학에 새로 부임한 뇌신경학자 토니가 나무밑동에 구토하는 동안에 은행나무는 자신에게 무례한 인간의 행위를 인내하는 듯 보이고 밤중에 몰래 하숙집을 빠져나가는 그레테의 사소한 비행에 담벼락 사이에 핀 들꽃은 비밀스러운 증인이 되어줄 듯 보인다. 나무가 인간을 말없이 지켜본다는 감각은 식물 그 자체에 내재한 속성이 아니라 숏의 지속과 서사적 맥락, 이미지의 반복을 통해 지각 과정에서 구성된다.
실제이면서 허구인 것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전하는 다큐멘터리도 아니면서 정물도 아닌 나무와 풀꽃의 숏에서 식물이 저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정동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살펴보면 <침묵의 친구>가 서사적 허구를 과학적 설정과 시각화를 매개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는 데에 있다. 이는 SF영화가 관객을 설득하는 방식과도 일부 닮았다. 뇌신경학자 토니가 언어를 습득하기 전의 영유아의 인지 활동을 테스트하며 제시하는 뇌파 이미지는 은행나무의 파동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다시 쓰인다. 한 그루의 은행나무와 팬데믹으로 격리된 인간이 나란히 놓인 장면은 잎맥과 세포의 클로즈업에서 바깥 세계로 빠져나와 공기 중을 떠도는 포자와 인간의 신체 이미지를 한 시퀀스 안에 배치하며 나무와 인간의 고독이 서로 평행하게 공명하는 관계와 의미를 형성한다.
이러한 과학적 설정은 영화가 가진 섬세한 정서를 메마르게 하거나 서사적 허구를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교하게 지지한다. 이 영화가 진실로 유의미하게 반복하는 것이 있다면 거시와 미시를 오가는 카메라다. 거시적으로 정지해 보이는 식물을 미시적 운동의 차원으로 이동시킨 다큐멘터리 이미지는 과묵한 은행나무의 외양에서 그 내부의 생동을 감각하도록 함으로써 앞서 제시한 식물의 정동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은행나무의 수정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푸티지가 등장할 때 이 시퀀스는 단순히 식물의 생장과 수정이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능으로 보인다기보다 피사체의 형태에서 사념으로 진입하는 듯한 전이로 받아들여진다.
축적된 영화의 실제 이미지와 설득 과정은 신화적 서사마저 성립시킨다. 이성 친구 군둘라가 여행을 떠나는 동안에 제라늄 화분을 돌보는 한네스의 챕터는 지어낸 과학적 장치에 기대고 있다. 토니와 그레테가 뇌신경학과 식물학, 사진술을 거쳐 은행나무와 고독을 나누고, 그레테가 꽃과 열매를 탐구하며 여성의 성을 기쁘게 각성하는 서사라면 한네스와 제라늄의 챕터만이 짙은 신화성을 띠기 때문이다. 제라늄의 정동은 다른 두 챕터에 비해 축소되는 대신 꽃의 언어를 변환하는 장치와 기록이 주요하게 기능한다. 영화에서 창조한 변환 기기는 창가에 놓인 제라늄이 한네스의 얼굴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신화적 상상을 완성한다. 마침표를 찍는 숏은 얼굴 없는 식물에게서 표정을 읽어낼 수 있는 제라늄의 클로즈업이다.
<침묵의 친구>가 쌓아 올린 실제 자연 이미지와 허구의 층위는 정동을 구성하는 인간의 지각과 인지에 기대어 작동한다. 이야기를 만들고 상상하며 순간에 그것을 진실이라 믿고 몰입하는 능력은 인류 고유의 특질이자 진화의 증거로 정의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창가에 놓인 제라늄과 청년이 서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시정(詩情) 어린 허구에 이내 빠져들고 마는 이유는 우리 인류가 아직 조금은 어리석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