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직무 유기를 거세게 비판 중이다. 4월24 일 영화인연대는 영진위가 정부 · 국회 · 국민에게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작금의 사태”를 소명해야 한다며 영진위 대상의 5대 공개 질의서를 발표했다. 영진위는 영화발전기금으로 한국 영화산업을 지원하고 관련 정책을 실행하는 민관협의체 거버넌스다.
이에 4월30일 영진위와 영화인연대가 간담회를 가졌지만, 영화인연대는 “지금 영화 산업의 상황이 얼마나 위기인지를 영진위에선 덜 공감하는 것 같다”(이동하 공동대표)라며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전했다.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새로운 결정이나 협의가 이뤄지기보단, 서로의 의제와 입장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라며 “문제 제기에 대한 영진위의 뚜렷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영진위는 5월8일 ‘영화인연대와의 정책 테이블’을 꾸려 “소모적 논쟁보단 실질적인 대안 마련”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정부 현안으로 인해 간담회 일정을 급하게 맞출 수밖에 없었고, 공개 질의서의 대상인 영진위 9인 위원들이 참석하지 못했기에 다시 자리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영화인연대는 5월 첫주에 후속 성명의 발표를 고려하고 있으며, 정책 테이블 참여 여부를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영화인연대와 영진위의 균열이 어떤 내용과 경과, 배경으로 진행됐는지 살펴봤다.
영화인연대의 공개 질의, “무력감을 느낀다”
영화인연대가 제시한 5대 질의의 핵심은 영진위가 국내 영화산업의 중추 기구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먼저 최근 정부가 진행하는 미디어 정책 통합 기구의 신설 · 개편 논의에 영진위가 적절히 참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영진위가 영화 관련 법률 개정과 조직 개편 과정에서 “공공연히 ‘영진위 패싱’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 등에 관해서도 영화계의 목소리를 정부에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예산 삭감에 대한 대응부터 미래를 위한 정책 제안, 공정한 산업 환경에 대한 요구까지. 왜 이 모든 과제를 영화인들이 직접 국회와 문화체육관광부, 정부 부처를 찾아다니며 호소해야 합니까?”라며 영진위의 역할 수행이 미흡하다고 비판했다. 영화계와 제대로 소통하지 않은 영진위의 인사 결정 과정, 현 9인 위원 회의 전문성에도 의문을 던졌다.
한편 영진위에 대한 영화인연대의 문제 제기는 그간 꾸준히 있어왔다. 본격적인 시작은 2024년 말 ‘영화상영관 입장권 부과금 폐지’ 논란이었다. 극장푯값의 3%를 거둬 영화 정책에 활용하는 법률을 정부와 국회가 갑작스럽게 폐지했던 일이다. 영화인연대는 한국 영화산업의 근간이 무너졌음에도, “한상준 영진위 위원장과 영진위 위원들은 영화계를 대변하는 그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20여개 영화계 단체가 모여 발족한 것이 영화인연대였다. 이후에도 영화제 지원사업 등 정부 예산의 삭감,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파행 등 영진위와 관련한 문제들을 꾸준히 짚어왔다.
영진위의 답변, “정책 추진의 성과 있다”
영진위는 4월30일 1시간여 진행된 간담회를 통해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한상준 위원장과 영진위의 본부장급 직원, 영화인연대 소속 영화인 10여명이 참여했다. 영화계 각계 인사가 5대 공개 질의서의 내용을 포함한 질문을 던지고, 한상준 위원장과 영진위 담당자들이 답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영진위는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답변을 건넸다. 먼저 ‘거버넌스 및 정책 대응 체계에 관한 입장’이다. 영진위는 2024년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 연구 단계부터 여러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주요 영화 단체(제작 · 배급 · 연출 · 독립영화 · 노조 등)와 간담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영진위 패싱’ 논란에 관해서는 “정책 현장에서 느끼는 ‘패싱’에 대한 우려가 커지지 않도록 (…) 전방위적인 가교의 역할과 정책적 책무를 다하겠다”라고 답변했다.
다음은 ‘한국영화 위기 극복을 위한 주요 정책 추진 성과’다. 영진위는 2026년에 추가경정예산을 포함 1538억원의 역대 최대 규모(2022년 코로나19 팬데믹 긴급 지원금 제외)의 영화진흥사업비를 확보했음을 강조했다. 영화산업 위축으로 인한 영화발전기금 고갈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타 기금 · 국고 전입을 통한 재원 다각화를 이뤘으며, 2024년부터 250억 ~550억원 규모의 모태펀드 영화계정 출자 사업을 편성했다고 덧붙였다. 이를 통해 영화산업 위기 극복에 힘쓰고 있다는 의견이다(아래표 참조).
이외에도 영진위는 영화계가 요구하는 ‘홀드백 제도’의 자율 협약 추진, ‘극장푯값의 객단가 정상화와 부금 정산 투명성’을 위해 시행했던 정책들을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진행한 ‘한국영화 수익 극대화를 위한 홀드백 분석 연구’를 토대로 5월 중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의 홀드백 협의체를 출범, 10월에는 시범운영을 추진할 계획이다. 객단가 정상화와 통신사 할인의 투명한 정산 필요에 대해서도 영화인연대의 의견을 수렴해 “국회 및 관계 기관과 지속적으로 소통하여 개선을 도출 중”이라고 밝혔다.
왜 지금이 중요한가?
영화인연대가 유독 이 시점에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배경이 있다. 첫째, 오는 6월은 본격적으로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편성되는 시기다. 지금이 내년도 영화 분야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데드라인인 것이다. 올해 제1차 추가경정예산안을 통해 656억원 규모의 영화 분야 예산이 수혈되긴 했지만, 영화발전기금과 정부의 영화 분야 예산이 불안정함은 꾸준히 지적되는 상황이다. 민간과 정부의 가교인 영진위의 책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영화인연대가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다.
둘째, 영화 · 방송 · OTT 콘텐츠 정책을 아우르는 미디어 통합 기구의 개편 및 신설안이 새 정부에서 계속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등 OTT 플랫폼이 득세한 이후 10여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뉴미디어 정책의 변화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다. 지난해부터 급속 도로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방 송위원회 등 정부와 국회의 각종 기구가 헤게 모니 싸움을 펼치고 있다.
3월27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2026 제1차 방송영상리더스포럼’을 열어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과 ‘영상진흥기본법’ 제·개정과 영화·방송 영상 · 뉴미디어 콘텐츠 · 애니메이션 관련 정책의 포괄을 목표한다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관련 TF를 구성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5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OTT 콘텐츠 관련 정책을 어떻게 법제화할 것인지 논의할 예정”이다. 같은 달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 역시 OTT와 뉴미디어 정책을 아우르는 기구의 신설을 연구 중이라 밝혔다. 지난해 8월엔 과학기술정보통신 방송위원회 소속 이훈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미디어콘텐츠부를 신설해 정부 3개 부처에 분산된 미디어 · 콘텐츠 진흥 기능을 모은다”라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셋째, 6 · 3 지방선거와 ‘공공기관장 단독 평가’가 엮인 정치적 불확실성이 있다. 올해 정부(재정경제부)는 13년 만에 ‘공공기관장 단독 평가’를 실행하여 5월 내 보고서 작성, 6월중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통한 위원장 최종 평가를 발표한다. 영진위 위원장의 거취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단 뜻이다. 일각에서는 ‘공공기관장 단독 평가’와 지방선거 기간이 겹쳐 공공 기관의 대대적인 인력 개편이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 중이다. 지금 영진위와 영화계가 제대로 청사진을 협의하지 않는다면, 영진위 인사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요한 시기이니만큼 영화 정책에 관한 논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4월 9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주축으로 연 ‘2026년 한국 영화산업의 위기와 대책’ 정책 제안 기자회견, 4월14일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한 ‘한국 영화산업 회복을 위한 소통 간담회’ 등이 이러한 맥락에서 열렸다. 미디어 정책의 대격변 시대, 영화 매체와 산업의 존속을 위해서 민관의 협치가 절실한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