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송선미)가 꼬박 12년 만에 영화를 찍었다. 스타 배우였는데 결혼하고 아이도 기르다 보니 한동안 연기를 그만뒀다. 젊은 감독(하성국)이 보내준 시나리오가 무척 재밌었고, 집까지 찾아와 자기 영화를 설명하는 감독이 믿음직스러워 영화를 찍었다. 자그마한 독립영화다. 오늘은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날이다. 평소 알던 독일식 음식점이라 편하다. 3명의 기자가 녹음기를 켜고 배우와 인터뷰한다. 영화에 관한 얘기는 많아야 3할 정도인 듯하다. 그외에는 대부분 사는 얘기다. 기사가 제대로 나올는지 모르겠다. 사는 얘기에 빠지다 보니 배우는 맥주 한잔을 자꾸 권하게 된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3명의 기자는 똑같이 묻는다. “젊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세요?” 배우는 답한다. “자신을 사랑해주세요.”
홍상수 감독의 34번째 장편영화 <그녀가 돌아온 날>은 아주 소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1부터 5까지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고, 1~3의 이야기는 기자들과의 인터뷰다. 몇십분 동안 이어지는 대화를 카메라는 가만히 찍는다. 가끔 누군가가 개입하거나 인터뷰가 끝나야 할 때 카메라가 커피잔이나 맥주잔을 거쳐 다시 배우의 얼굴로 가는 정도다. (홍상수 감독의 촬영이 꽤 유려하다.) 인터뷰 사이사이엔 배우가 바깥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 모습을 카메라는 뒤, 옆, 앞에서 차례로 본다. 4에선 배우가 연기학원에 가고, 5에선 연기 수업을 하다가 귀가한다.
왜 하필 오늘이 ‘돌아온 날’일까. 이 영화의 첫째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배우는 사물과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의 습성이 너무나 피로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 남과 말하고 정의하는 이날이야말로 결국 그녀가 진정으로 돌아온 날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부터 홍상수 영화의 말들은 부속처럼 느껴진다. 화면이 조악할수록, 멈춰 있을수록 더 잘 보이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표면이다. 배우는 정말 솔직하다.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를 떠나 그녀의 고개가 정직하기 때문이다. 이혼처럼 불편한 이야기가 나올 땐 심드렁하게 등을 뒤로 기대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목을 앞으로 한껏 빼서 말한다. 송선미 배우의 목덜미가 만드는 긴 곡선과 문자 그대로를 형상화하는 손짓의 움직임이 아름답다.
배우는 연기학원에서 오늘 나눈 인터뷰 내용을 대본으로 쓰고, 이것으로 상대 배우(박미소)와 연기를 연습한다. 테이블이 없고 대본을 들고 있어야 해서 손이 고정된다. 해도 져서 창밖으로 움직이는 것들도 보이지 않는다. 음식점의 소음도 없다. 두 사람은 영안실의 창백한 시체처럼 말을 주고받는데, 생동감이 없다. 꼭 드레이어나 베리만 영화의 배우들이 텅 빈 시선으로 기계적인 방백을 들려줄 때의 느낌이 든다. 영 홍상수 영화 같지 않다. 연기 선생(조윤희)은 좋은 것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즉 <그녀가 돌아온 날>은 안티-워크숍 영화에 가깝다. 모여서 논의하고 연습하며 읊는다고 해서 마음에 잘 와닿진 않는다. 그러한 규율 밖에서 자꾸만 고개를 빼 들고 맥주 한잔을 하고 싶어 하는 배우의 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질 뿐이다. 우리가 홍상수의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싶고, 무엇이 좋다고 여기는지 편히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이다.
CLOSE-UP
숏의 리듬이 무척이나 느릿느릿한 영화에서 단 한 차례, 꽤 빠른 교차편집이 등장한다. 두 번째로 인터뷰한 기자와 배우는 꽤 친해졌다. 맥주도 마셨고 포옹도 했다. 되도록 하지 않으려 했던 배우의 이혼 비화도 풀어버렸다. 기자의 연애 얘기도 들었다. 인터뷰가 끝난 뒤, 배우는 담배를 다 태우고 계단을 오른다. 이 장면 사이사이엔 육교 위에서 멍하니 아래를 보는 기자의 모습이 교차한다. 한명은 힘을 얻었고, 한명은 진이 빠졌나 보다. 왜일까. 기자로선 꽤 공감이 가지만, 다른 관객들도 각자의 이유를 생각하며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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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루드> 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1964
한 차례의 전성기가 지난 여성 예술가가 말하는 순수, 열정, 회한, 사랑, 기억. 그들이 보여주는 몸짓, 손짓, 눈짓. 이들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폐쇄적 공간과 자꾸만 말을 거는 사람들. <그녀가 돌아온 날>은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게르트루드>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헛도는 대화에 소비될 때보다 혼자서 카메라 바깥의 어딘가를 볼 때야말로 그녀들이 살아 있는 것 같다. <게르트루드>가 여러 각도, 여러 겹의 카메라와 비침으로 주인공 게르트루드를 다각도에서 조명했다면, 홍상수는 말과 단락의 층위들만으로 비슷한 구조를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