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나와 아내는 대구 출생이니 세대간 지리적 이동의 전형적인 형태다. 이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방에서 올라온 이가 산전수전 겪으며 버티다가 결혼하고 ‘서울말을 쓰는’ 아이들을 보면 내 삶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상경(上京)이란 말이, 그저 서울행이 아니라 삶의 큰 도약처럼 이해되듯 말이다.
그래서일까. 서울을 떠나 제주로 향할 때 왜 제주로 가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 왜 서울을 떠나는지를 의아해하는 이들을 제법 만났다. 서울에서 태어나 잘 살고 있는 아이들을 언급하며 은근히 질타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주에서도 잘 살면 되지 않냐고 한들, 학원의 수준이 다르다면서 여기가 사교육 왕국임을 잊었냐는 투로 다그친다. 부동산 공화국의 관점에서 따지기도 한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는 못 돌아오는 곳이 서울이라면서 말이다. 서울 집은 당연히 전세 주고 가냐면서 다짜고짜 본인의 시각에서 묻기도 한다. 자가 거주자도 아닌 사람에게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제주에서 종종 봤다. 여기에서 태어났냐, 육지에서 왔냐 정도가 서로의 인사였던 제주에서 서울 아파트를 전세 주고 왔다는 걸 스스로 강조하는 이들이 있었다. 아무도 묻지 않아도 말이다. 육지를 떠나 섬으로 온 이들 중에는 비슷한 형태의 주거이동이 제법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출신 지역이 어디인지를 밝히면서 주택 유형과 심지어 그 집의 현재 활용도까지를 상세하게 드러내는 경우는 오직 서울 아파트 거주자들이었다. 강남구나 서초구 그리고 용산구에서 온 사람들은 더 자세히 밝혔다. 아파트 이름까지 말이다. 서울은, 그런 곳이었다. 대단한 도시고, 그래서 개인도 대단한 줄 착각하게 만드는 도시다. 나라고 달랐을까? 서울 살다가 왔다는 말, 은근히 활용했다. 그 정보를 말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을 때도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세종시로 와서 산다. 서울을 종종 간다. 주말엔 아이들과 같이 움직일 때도 있다. 무슨 공연을 보러 둘째와 상경했을 때의 일이다. 지하철을 타려는데 내 앞에서 아이가 개찰구를 지나가지 못하는 거다. 교통카드를 어디에 찍어야 하는지를 몰라 엄청 헤매면서 마치 지하철을 처음 타는 사람처럼 당황스러워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까지 무수히 서울의 지하철을 탔던 녀석이었으니 황당했다. 고작 5년 떠났다고 저러는 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야, 너는 서울에서 태어나 살았잖아. 근데 그걸 까먹냐?”
1~2초 후,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이상한 건 나였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일단 목소리부터가 지나치게 컸다. 다른 사람이 들으라는 게 분명한 크기였다. 이 아이, 오늘 서울 처음 와서 이런 거 아니랍니다라고 애써 항변하는 단호함이 내 말투에 가득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정보를 어떻게든 외부로 표출하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했다. 그냥 한번만 시범으로 보여주면 될 일이었는데, 나는 말이 많았다. 누구도 쳐다보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서울이 뭐라고.
이런 비유를 들면 나의 심리가 더 쉽게 이해된다. 요즘, 보너스를 어마어마하게 준다는 기업과 자신을 어떻게든 연결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독서토론을 하는데 갑자기 본인이 SK하이닉스 직원임을 밝힌다. 너무 입이 근질근질했나 보다. 유사한 경우가 제법 있다. SK하이닉스가 전 직장이었다고 괜히 말한다. 현 직장일 수도 있었다며 아쉬움을 애써 드러낸다. 내가 목격한 것 중 가장 재미있고 황당한 장면은 “아들이 SK하이닉스에 취업했다”면서 본인의 자녀교육 성공 서사를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괴기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이사하면서 돈이 필요해서 삼성전자 주식 다 팔았어”라고 괜히 말하며 안 팔고 지금 갖고 있었으면 어쩌고라면서 중얼거리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서울은 그런 대장주, 우량주, 황제주다. 게다가 여전히 성장주이기도 하다. 가져야 하고, 가지지 못하면 아쉬워해야 하고, 한때 가졌으면 티를 팍팍 내야 하는 게 바로 서울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사회의 모습이지만 한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과도하게 돌아간다. 지방 사람에게 서울로 오라는 건 통보지만, 서울 사람을 지방으로 부를 땐 더 이유가 분명해야 하고, 더 정중한 부탁이어야 한다. 서울에 인구가 많아서 나타나는 모습이겠지만, 이게 서울 사람들의 당연한 심리로 이어진다면 비극이다. 물론, 현실이다. 그 못된 마음씨는 국토균형 발전을 둘러싼 여러 논쟁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역 의료 격차를 해소하자는 여러 논의마다, 공공기관 이전이 필요하다는 주장마다 지방으로 간다는 건 죽음이나 마찬가지라는 서울 사람들의 일장 연설이 거침없이 부유한다. 도대체 지방이 뭐라고, 저토록 학을 떼는 걸까.
이 ‘학’이 말라리아를 뜻하는 학질에서 나온 말인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서울 사람들은 지방 거주를 조금 불편하다 수준이 아닌 넌더리가 나는 고통으로 느낀다. 그걸 당당하게 드러낸다. 지방 사람들이 모욕감을 느껴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지방에 살면 마치 인격체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지방을 드러내는 방식은 절규에 가깝다. 충주맨은 지방의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준 성공 사례지만 모범 사례라 하긴 어렵다. 그 충주맨이 떠나자 후임 담당자가 구독자를 잡기 위해 만들었다는 추노 영상을 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옹기맨도 있다. 지역의 한 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공무원이 직접 옷을 벗고 도끼를 들고 항아리에 들어간다. 이 옹기맨, 전에는 과즙맨으로 엄청난 조회수를 자랑했단다.
B급 감성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게 창의적인 아이디어 없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지방이 외면받는다는 점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이 웃어주면 다행 아니냐고 하겠지만, 누가 웃어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게 지방의 운명이라면 그때의 창의성은 체념과 절망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지방이 뭐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