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의 호흡이 빨라진 영화들에는 대개 이미지라인이 무너져 있다. <두 검사>는 그 선을 끝까지 지키다가, 단 한번 넘는다. 감방 안에 갇힌 전임 검사 스테프냐크(알렉산드르 필리펜코)가 면회 온 신임 감찰 검사 코르녜프(알렉산드르 쿠즈네초프)에게 자기 몸의 고문 흔적을 보여준 뒤 자리에 돌아와 앉는 순간, 앞선 대화와 다르게 카메라가 처음으로 그 선을 넘어간다. 이 영화는 이 한번의 선을 넘는 것조차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화면비와 색, 프레임, 일반 민중의 얼굴을 통해 말한다. 그렇게 넘어간 선 위에서 스테프냐크는 코르녜프에게 보이지 않는 사회의 진실을 말한다. 감옥의 문이 열리며 시작해 닫힐 때까지 이 영화의 화면비는 이 선을 끝까지 붙잡고 있다.
1.37:1 화면비는 아카데미 비율이다. 1.33:1과 1.37:1 둘 다 대략 비슷한 4:3의 화면비율이지만 유성영화가 등장하며 프레이밍은 확실히 달라진다. 무성영화는 1.33:1 화면비였지만 유성영화의 도입으로 필름 왼쪽에 사운드의 자리를 내줬고 가로 비율이 줄어 화면은 더 수직적인 긴장을 띠게 됐다. 1.37:1의 아카데미 비율은 바로 이 변형된 조건을 조정하고 표준화한 결과다. 무성영화에서는 인물의 액션과 리액션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기는 경향이 강하고, 인물 얼굴의 클로즈업보다는 지각-이미지와 행동-이미지 사이의 간격을 최소화하며 하나의 프레임에 동시에 작동하는 풀숏과 롱숏들이 많았다.
유성영화가 등장한 뒤 인물 프레임의 주된 사이즈가 달라진다. 소리로 정보와 감정을 전달하며 말하는 인물의 얼굴을 강조하는 클로즈업의 비중이 커지고, 풀숏이나 롱숏도 정보 전달의 목적을 더 크게 띤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프레임 안을 채우면서 여백도 줄어든다. 이후 TV의 등장과 영화산업의 위기는 가로가 긴 1.85:1이나 2.35:1 이상의 와이드스크린 화면비를 등장시키며 인물 주변의 공간이 프레임 안에 다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유성영화의 등장 이후 1.37:1 화면비는 공간보다 인물을 강조하는 데 더 유용한 화면비로 인식되어왔다.
<두 검사>의 화면비는 기존 아카데미 비율 영화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세로가 긴 화면비는 위의 여백을 더 많이 드러낸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37년이다. 1927년 유성영화의 등장 이후 확실하게 안착한 시기와 겹친다. 영화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완전한 자유를 얻었지만 스탈린 체제하 소련에서는 침묵을 강요받던 시기였다. 이 영화의 화면비는 강요된 침묵으로 사라진 목소리를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유성영화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무성영화의 프레이밍을 선택했다.
<두 검사>는 무성영화처럼 인물의 클로즈업보다는 넓은 풀숏이나 롱숏이 많다. 실내 장면에서도 인물을 프레임에 가득 채우기보다 인물의 여백이 많게 화면을 구성한다. 일반적인 영화들의 와이드 화면비 좌우의 여백을 잘라 이 영화 아카데미 화면비의 수직축 위로 쌓아놓은 듯 빈 공간을 인물 위로 수직적으로 구축한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 밑에 인물들을 배치한다. 이 영화의 화면비는 더 많은 여백을 만들고 감독은 그 여백에 미술을 채워놓는 것이 아닌 비워둔다. 비어 있음이 역설적으로 시대의 무게가 강한 체제의 중력으로 아래로 끌려내려가듯 영화 전체의 공기를 아래로 무겁게 짓누른다. 이 빈 공간을 롱테이크로 보여주고, 짓누르는 여백 아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 보이지 않는 강력한 중력을 온몸으로 받으며 겨우겨우 서 있다. 이어서 그 빈 공간 너머로 사운드가 들려온다. 프레임이 비워진 상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공간을 채우기보다 바깥을 드러낸다. 롱테이크로 붙들린 이 빈 공간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 역시 무게를 가지며 1937년 스탈린 대숙청의 공기임을 감각하게 한다. 두 검사의 수직적 여백을 채우는 것은 회색의 계조뿐이다.
이 영화는 왜 일반적 영화와 달리 주인공의 얼굴이 아닌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는 늙은 죄수로부터 시작하고 그를 오랫동안 보여주는 것일까. 늙은 죄수는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상징으로서 1900년대 초 백군에 대항해 싸웠던 소비에트사회주의국가 건설의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를 먹고 숙청 대상이다. 노인의 얼굴은 그가 읽고 태우는 탄원서 주인공들의 얼굴을 대변하고 있다. 편지를 읽는 감방 안은 다른 가구나 사물이 없이 온통 회색 벽이다. 회색은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를 담아내는 색이기도 하지만 다 같은 회색이 아니다. 이 감방 벽의 회색은 단 하나도 같지 않다. 빛과 만나 명암과 색의 계조로 펼쳐져 있다. 비슷해 보이는 많은 편지들은 억울하게 반혁명분자로 몰린 과거 혁명에 동참한 공산주의자들의 탄원서다. 이 영화의 회색과 같다. 무수히 많은 회색은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흔적이다. 이 계조는 공산주의란 이름 아래 하나의 공산주의만 있지 않다는 존재의 근거로서 회색의 벽이다. 스탈린은 다양한 회색들을 감옥 안에 가두고 하나의 회색으로 만들려고 했다.
<두 검사>는 감옥 안 감방 벽에 새겨진 무수한 회색을 발견한 한 젊은 검사가 그 다양한 회색을 밖으로 가져나가려다 그 자신도 감방 안에 또 다른 회색으로 새겨지는 영화다. 체제는 폭력과 억압으로 색을 짓누르고 없애려 하지만 그 존재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또 다른 회색으로 하나의 계조를 더하며 역사로서 기록된다.
회색은 빛을 만날수록 더 많은 계조를 드러낸다. 스탈린은 빛도 계조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감방 안 창이 그래서 더 작다. 빛이 잘 닿지 않는 교도소 안으로 빛을 갖고 들어오는 인물은 코르녜프다. 스탈린에 의해 숙청 대상이 된 감옥 안 인물들에게는 빛이 닿지 못한다. 부교도소장을 만날 때 그는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당당히 면회를 요구한다. 부소장이 나가고 홀로 부소장실에서 면회를 기다리는 장면에서도 벽에 기대어 앉은 코르녜프에게만 빛이 닿는다. 하지만 이 빛은 그에게 마지막 빛이 된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사건이 없는 인물의 사소한 동선은 생략한다. 하지만 <두 검사>는 이동의 전체 과정을 다 보여준다. 코르녜프가 교도소 앞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건물 안을 통과해 계단을 올라 교도소장을 만나러 가는 장면까지 생략 없이 보여준다.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지만 권력을 쥔 높은 사람들은 이제 민중과 다른 위치에 있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 자체가 멀게 체감되도록 계단을 오르는 장면조차 생략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고정된 카메라와 롱테이크는 응시의 시선이다. 카메라가 기다리는 시간은 관객에게도 이 역사를 함께 응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동한다. 사건보다 기다리는 시간에 더 많은 장면과 러닝타임을 배치한다. 신임 검사 코르녜프가 전임 검사 스테프냐크를 만나 두 검사가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교도소 안에 들어온 이후 27분이다. 크레딧을 포함해 1시간58분의 러닝타임에서 1/4이 감찰 검사가 민원인을 만나기까지 한 공간 안에서 기다린 시간이다. 코르녜프가 검찰청 건물 안으로 들어와 검찰총장을 만나기까지 할애한 러닝타임은 15분30여초, 전체의 1/8이다. 교도소에서 스테프냐크를 기다리는 시간과 검찰청에서 검찰총장을 기다리는 시간, 관객도 함께 그 역사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강력한 위계의 폭력적인 구조를 몸으로 느끼도록 함께 기다리게 한다.
이 기다림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거대한 권력이 아닌 여백의 빈 프레임과 민중들의 얼굴이다. 이 영화는 인물의 클로즈업이 거의 없다. 코르녜프의 첫 등장에서 그는 미디엄 사이즈로 보인다. 반면 감옥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재소자 가족들의 얼굴은 더 타이트한 버스트숏으로 잡힌다. 다음에 등장하는 타이트한 버스트숏은 코르녜프가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만난 러시아혁명에 가담한 노인의 얼굴과 그 이야기를 듣는 객차 안 민중들이다. 이 신은 앞선 장면들과 달리 공간을 먼저 보여주지 않는다. 혁명 당시 이야기를 하는 노인과 객차 안 사람들의 얼굴만 교차로 보여준다. 노인은 레닌을 만나러 갔을 때의 이야기를 하며 이번에는 스탈린을 만나러 간다고 말한다. 이때 기차 안 사람들의 얼굴은 노인의 이야기에 대한 반응숏이 아니다. 스탈린에게 직접 닿기를 바라는 민중의 얼굴, 억압이 아닌 평등한 세상을 향한 얼굴들이다.
신 마지막에 객차 전체를 보여주는 숏이 등장하지만 공간이 아닌 인물들을 하나로 묶으며 다양한 민중의 얼굴을 담는 클로즈업이 된다. 기차 안 클로즈업은 회색의 논리가 감옥이라는 억압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 영화 전체의 세계관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전체주의는 하나의 색으로 만들려 하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감옥 안 벽에서도, 감옥 밖 기차 안 민중의 얼굴에서도 끝없이 다른 회색들을 발견하고 기록한다.
이 영화의 회색 계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는 폭력의 구조를 비추고, 그 과정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하게 만든다. 우크라이나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푸틴의 러시아 침공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자행한 무수한 살인, 이란에 자행하고 있는 전쟁과 폭력을 거울처럼 비춘다. 감방 안에 새겨진 회색처럼, 영화 안에는 1937년 소련 스탈린 숙청의 역사뿐만 아니라 스크린 밖 현재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역사들이 다시 새겨진다. 카메라가 기다리는 시간만큼, 관객도 그 역사 앞에 함께 서게 한다. 감방 벽의 회색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응시의 시간 동안, 관객도 하나의 회색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