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씨네21> 입사 전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좋고 싫고, 또는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언어의 울타리 안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 몇 가지 그럴듯한 핑계가 있지만, 돌이켜보니 가장 큰 이유는 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게 홍상수 영화는, 늘 직접 보는 것보다 정교한 언어로 주석을 달아놓은 글들을 보며 읽는 쪽이 더 흥미로웠다.
홍상수 영화를 둘러싼 비평의 언어가 흥미로웠던 건 특별히 고결하거나 심도 있는 통찰 때문은 아니다. 홍상수 영화에 화답하는 글들은 (그 영화와 닮아서) 모두 어딘가 꼬여 있다. 아니면 헤매거나. 때때로 조롱과 혐오가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 보잘것없음이 불편하고 불쾌할지라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계속 흘끔거릴 수밖에 없도록 유혹한다. 거칠게 말해 먹물들의, 혹은 먹물이 되고 싶은 이들의 혐관(혐오 관계)이라고 해도 좋겠다. 2000년대 홍상수 영화는 확실히 지식인(을 자처하는 부랑아)들의 자기혐오와 혼란에 기반한 결과물이었다.
홍상수 영화에 본격적으로 매료된 건 그의 영화를 ‘공부’하면서부터였다. 상황에 떠밀려 홍상수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바닥을 보았다. 그의 영화를 둘러싼 언어가 실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이를테면 홍상수 영화는 영화를 본 관객 개개인의 고백과 반응으로 완성된다. 영화 자체는 거대한 질문, 아니 그조차 아닌 빈칸과 공백의 흔적이다. 관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앞에서 섀도복싱을 한다. 그 결과물이 각자의 언어로 흩뿌린 글이다. 요컨대 한번의 영화, 한명의 관객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하나의 글(혹은 말)이 배설된다. 흔적을 남긴다. 그걸로 끝. 고상하게 말하자면 유일하고 일회적인 각자의 반응. 영화는 그걸 이끌어내기 위한 거대한 촉매(또는 어마어마한 어그로)에 불과하다.
내가 그의 영화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꺼낼 말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홍상수 영화의 궤적이 또렷하게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나와 한편의 영화가 그제야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제대로 모른다는 걸 이제는 안다는 것. 그것이 홍상수 영화와 내가 처음 대화를 시작한 출발이었다. 세간에서 홍상수 영화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하던 그 무렵부터 그의 영화를 거슬러 올라가며 보았다. 계속 보고 싶어졌고, 이어질 조형(이야기가 아니다)이 궁금해졌다. 이젠 습관(혹은 의식)처럼 그의 영화를 보고 뭔가를 끄적거린다. 비로소 내가 그 울타리(혹은 그물) 안에 들어와버렸음을 자각한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어느 날, “대충 알고 좋아하고, 다 알고 싫어하자”는 김민경 민음사 편집자의 말이 심금을 울렸다. 주석을 달자면 홍상수 영화에 대해 ‘다 안다’고 종결하는 게 불가능함을, 이제는 안다. 그러므로 싫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입장에서 남은 선택지는 어떤 식으로든 쓰고 말하는 길뿐이다. 홍상수와 영화를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홍상수 영화’는 이제 한 덩어리의 대명사가 됐다. 30년의 세월, 34편의 필모그래피는 다른 어떤 형태로도 대체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적어도 영화를 글로 소개하는 영화잡지라면 홍상수 영화라는 축적된 시간을 외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부담과 고뇌에도 불구하고. 설사 아는 사람만 아는 울타리 안의 이야기일지라도. 이번호에는 전체를 할애하여 ‘홍상수 영화’의 30년을 담았다. 안다. 누군가에서는 쓸데없이 길고, 누군가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는 일. 성패나 호불호와 무관하게 해야 할 일. 21세기 한국영화를 반추하며 ‘홍상수 영화’라는 불가항력의 흔적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