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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영화산업의 질서유지(維護電影圈秩序), <비정성시> 재개봉 취소를 둘러싼 사정

36년의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대만 뉴웨이브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가 지난 5월6일 36년 만에 재개봉할 예정이었으나 저작권자의 상영 철회 요구로 극장 상영이 취소되었다. <비정성시>의 제작자이자 저작권자인 구복생은 개봉 일주일 전인 4월29일, 한국의 극장사들에 “<비정성시>는 권리자가 단독으로 제작·관리하는 작품으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판권 역시 당사가 합법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국내외 어떤 기관에도 관련 저작권을 제3자에 양도해 한국 내 저작권을 허가한 적이 없다”라고 쓴 공문을 보냈다. 구복생 제작자 이외에도 대만영상음향자료원(TFAI), 대만콘텐츠진흥원(TAICCA), 우디네극동영화제가 “<비정성시>의 저작권자는 구복생이 유일하다”는 내용의 공식 확인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구복생은 1947년생 대만 국적의 영화제작자로 타이완섬을 넘어 중화권 걸작을 다수 제작하였다. 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희몽인생>(1993), <비정성시>(1989), 중국 장이머우 감독의 <홍등>(1991), <인생>(1994), 홍콩 두기봉 감독의 <미션>(1999)은 모두 그가 제작한 작품이다. 특히 <비정성시>는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홍등>은 은사자상을, <인생>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2024년 우디네극동영화제는 다수의 명작을 제작한 구복생의 제작자로서의 공을 기리며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상영 취소라는 초유의 결정

에이썸 픽쳐스가 수입한 <비정성시>의 스틸.

노년의 저작권자에게 상영 철회 공문을 받은 한국의 극장들은 즉각 <비정성시> 상영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우선 한국예술영화관협회는 하루 뒤인 4월30일 <비정성시> 상영 중단을 결정하였다. 한국예술영화관협회는 “원권리자의 공식적인 상영 철회 요청과 수입사의 소명 자료를 검토한 결과 전국 회원사의 상영 중단을 결정하였다”라며 “예술영화관은 창작자의 권리 보호와 투명한 유통 질서 수호를 최우선으로 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오랫동안 작품을 기다려온 관객 여러분께는 송구한 마음이나 ‘적법한 권리 확인이 전제되지 않은 상영은 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결정임을 양해 부탁한다”라고 덧붙였다. 뒤이어 멀티플렉스 극장사들도 <비정성시> 상영을 거두었다. 이를테면 개봉 하루 전 CGV는 CGV 영등포타임스퀘어에서 진행하려던 프리미어 상영과 GV 행사는 물론 일반 상영 스케줄 모두 취소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이번 국내 개봉을 준비하던 수입사 에이썸 픽쳐스도 4월30일 “영화 <비정성시>를 기다려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양해를 부탁드린다”라는 사과와 함께 공식 입장을 냈다. 에이썸 픽쳐스는 “현재 본 작품과 관련하여 저작권 이슈가 발생한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해당 세일즈사에 관련 내용을 통보한 상태”라며 “신중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원만히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비정성시>는 블루레이가 없다

에이썸 픽쳐스가 수입한 <비정성시>의 스틸.

<씨네21> 취재 결과, 에이썸 픽쳐스는 지난해 프랑스의 세일즈사 필름 상 프롱티에르와 <비정성시>판권 계약을 맺었다. 우선 이창준 에이썸 픽쳐스 대표는 저작권 문제가 제기될 줄 몰랐다는 입장이다. 그는 필름 상 프롱티에르로부터 DCP를 전달받았기에 당연히 해당 세일즈사가 저작권을 가진 줄 알았다. 이창준 대표는 이와 관련해 “프랑스와 계약을 맺고 DCP를 받았다. 블루레이가 없으면 DCP를 뽑을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비정성시>블루레이가 출시된 적 없기에 블루레이를 불법적으로 복제해 만든 DCP일 수 없다고 보았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그는 대만의 공문으로 인해 한국 극장들이 <비정성시> 상영을 철회하자 필름 상 프롱티에르에 <비정성시>저작권을 문의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창준 에이썸 픽쳐스 대표의 말처럼 <비정성시> 블루레이는 대만에서조차 출시되지 않았다. <비정성시>의 저작권자인 구복생은 저작권을 까다롭게 관리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제작한 명작들이 불법으로 복제돼 퍼져나가는 것을 우려하여 블루레이로 출시하지는 않은 채 저작권을 엄정하게 보호하고 있다. <비정성시> 또한 4K로 복원돼 2023년 대만에서 재개봉되었으나 따로 블루레이를 출시하지 않았고,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도 볼 수 없다. 심지어 구복생이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2024년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공개된 복원 버전의 <홍등> <인생> 등도 대만에서 재개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월 영미권 매체 <인디와이어>의 단독 보도에 따르면, 4K로 복원된 <비정성시> <홍등> <희몽인생>의 배급권을 북미 예술영화 배급사인 필름 무브먼트 클래식스가 확보했으나 아직 극장 개봉 소식이나 블루레이 출시 소식 없이 유튜브에 공식 예고편만 공개한 상태다.

이번 <비정성시>재개봉 취소 사태에서, 대만에서 온 공문을 전달받아 국내 극장사들에 전달한 인물은 양인모 라이트하우스 대표다. 그는 지난해 제2회 서울아트하우스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4K 버전의 <비정성시>를 개막작으로 상영하며 구복생과 연을 맺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양인모 대표는 구복생 제작자에게 “한국 관객들은 큰 혼란과 피해를 보았으나 질서 있게 상영 취소 문제를 받아들였으며, 향후 한국 공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때 이 일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당부의 메일을 보냈다고 밝혔다. 그는 구복생이 쓴 한자어를 보고 이번 일에 나섰다고 한다. ‘영화산업의 질서유지’를 뜻하는 한자어 ‘유호전영권질서’(維護電影圈秩序)를 보고 “보호할 호(護)란 글자가 크게 들어왔으며, 예술영화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사람으로서 이것 역시 영화를 지키는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사태가 모두 종결되면 구복생 제작자가 건넨 일곱 글자가 한국 예술영화 산업에 영원히 남았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대만 뉴웨이브의 걸작 <비정성시>가 36년 만에 재개봉한다는 건 한국 시네필들에게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한국 관객들이 <비정성시>를 만나기까지 앞으로 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오래 기다려온 만큼 온전한 형태와 명확한 권리 관계 속에서 <비정성시>를 만날 날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