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평] 몸을 감싼 껍질 같은 것, 김예솔비 평론가의 <그녀가 돌아온 날>과 <당신얼굴 앞에서>

<그녀가 돌아온 날>

정수(송선미)는 왜 쪼그려 앉아서 담배를 피울까? 긴 원피스를 입고 있는 탓에 쪼그려 앉은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원피스 자락에 덮인 몸은 마치 껍질로 몸을 감싼 동물이나 식물을 연상시킨다. 그러니까 정수는 자신의 몸을 껍질로 감싸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을 감추기 위해서? 그녀는 배우로서 기나긴 공백을 깨고 출연한 영화의 홍보 인터뷰를 막 마친 참이다. 돌아온 정수에게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를 기대하며 그 연유를 묻는다. 때로는 사사롭고 또 때로는 통속적인 질문에 대해 정수는 그렇게 유별나지도, 범상하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인터뷰라는 대화의 형식은 문답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러한 문답의 형식 속에서 자신을 감쌀 말이나 사유의 수단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정수는 언제든 자신이 만든 말의 껍질 안으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개체처럼 보인다. 껍질과 몸 사이에서 그녀의 세계는 재편되고 있다.

안과 바깥을 매개하는 층으로서 껍질의 위상은 상대적이다.(<껍질 이야기, 또는 미술 의 불완전함에 관하여>, 윤원화 지음) 그것은 몸을 감싸는 견고한 틀이 될 수도 있고, 연하고 반투명한 막일 수도 있다. 껍질은 몸 혹은 본체에 달라붙어 있으면서도 조개나 소라 껍질처럼 본체와 분리된 별도의 층을 획득할 수도 있다. 마치 이미지와 그것을 실어 나르는 매체의 관계처럼, 껍질은 거기 “연합되는 몸들의 배치를 검토할 수 있는 가변적인 틀”이 된다(같은 책). 유사한 관점에서 정수라는 배우-인물의 형상은 자기 자신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경계를 내비치며 자신을 단단하게 감싸기도 한다. 그녀는 어떤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주 직설적이고 가뿐한 태도를 보이지만 자신의 이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는 몇겹을 파고들어도 알아낼 수 없을 듯한 얼굴을 취하며 뒤로 물러나기도 한다. 정수가 어떤 표면을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그녀와 기자(들) 사이의 대화는 매번 다르게 배치된다. 영화의 5막의 연기 수업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앞선 대화들의 총합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가변성이라는 조건 속에서 배우가 만들어내는 표면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자 하는 시도처럼 보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 가변적인 것은 현실이라는 조건 자체다. 영화에서 정수는 같은 독일식 식당의 동일한 창가 자리에 앉아 세번의 인터뷰를 갖는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만남은 모두 거의 같은 구도로 촬영되었다. 정수의 앞, 옆얼굴이 보이고 그녀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모두 뒷모습(이나 간간이 옆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세번의 인터뷰는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일한 인터뷰의 약간 다른 판본들일 수도 있다. 가령 인터뷰가 진행될 때마다 식당 한켠에서 들려오는 특정한 소음이 있다. 도마 위로 빠르게 칼질하는 듯한 두드리는 소리가 매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빠짐없이 들려온다.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정수가 출연한 독립영화의 감독(하성국)이 시간이 지났음을 알리러 오는데, 그럴 때마다 정수가 마치 그를 처음 본 양 맞이한다는 점도 그렇다. 물론 이런 의혹을 가지는 까닭에는 ‘같은 날 혹은 다른 어떤 날’(<북촌방향>)들을 제시하는 홍상수식의 변주에 익숙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 이러한 변주의 형식이 이야기가 아니라 구조를 택한 결과였다면,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 현실을 중층화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단연 정수라는 배우-인물의 이중적 존재다. 껍질과 몸의 관계처럼, 현실은 그녀가 속한 일부이면서 언제든 그녀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 수행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녀가 돌아온 날>은 마찬가지로 배우라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의 형상이 주요하게 다뤄지는 <당신얼굴 앞에서>를 상기시킨다. 두 영화 사이에는 오랜 공백기를 가졌던 배우가 돌연 한국으로(혹은 영화계로) 돌아왔다는 점, 그리고 다시 영화를 찍었거나 영화를 찍으려고 한다는 설정의 공통점뿐 아니라 신석호 배우가 떡볶이 가게를 운영하는 인물로 나온다는 사사로운 연결점도 있다.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상옥(이혜영)의 동생 정옥(조윤희)의 아들로 분했던 승원(신석호)은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 떡볶이 가게를 처에게 맡기고 정수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는 지훈(신석호)이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당신얼굴 앞에서>에서도 상옥이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있다. 상옥은 정옥과 산책을 하던 중 공원에 있는 작은 개울가의 다리 아래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통화를 하는 정수를 지훈이 옆에서 기다렸던 것처럼, 상옥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정옥은 말없이 상옥의 코트를 들고 기다려준다. 이때 상옥은 높은 곳은 근처에도 못 간다는 그녀의 말을 몸소 실천해 보이듯이 지면 가까이 낮게 수그린 모습이다. 세련된 차림새 때문인지 그 모습은 다소 엉성해 보이기도, 반대로 무척이나 관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 몸을 낮추는 데에는 비밀스럽고 위반적인 기운이 있다. 말하자면 그러한 자세에는 몸이 스스로 비밀이 되고자 하는 어떤 의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 상옥은 어딘가로 막 사라지려는 참인 것 같다.

정수를 둘러싼 현실의 불확정성이 부분적으로 배우-인물이라는 존재의 이중성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상옥의 경우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현실과 피안 사이의 인물로 여기게끔 만든다. 물론 영화상에서 상옥이 자신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은 꽤나 후반부의 일이지만,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줄곧 어딘가 초연한 구석이 있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문득 감사 기도를 하고, 유년기를 보냈던 집에 불쑥 찾아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상옥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에 놓여져 있고 발이 닿을 수 있는 것들이지, 미래를 기약하는 저축이나 높아서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고층아파트가 아니다. 그녀는 얼굴 앞에 천국이 있다고 믿으며, 그 얼굴 앞에 놓인 것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은총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홍상수의 영화에서 인물이 ‘보기’라는 활동과 관련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언제나 눈앞에 있는 것을 명쾌하게 보려고 하는 사람의 안간힘이 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언제나 이 보기의 문제와 씨름하고 분투하는 사람의 히스테릭함이 홍상수 영화의 인물상(특히 남성들)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한편 <인트로덕션>에서부터 홍상수의 영화에는 ‘눈’의 수난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유천>에서 전임(김민희)은 눈에서 피를 쏟아내고, <물안에서>에서는 관념적인 눈의 수난이 물리적으로 구현된다.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도 정수는 눈이 안 좋다며 햇빛을 가리기 위해 블라인드를 내린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보기의 문제는 이제 눈의 종말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의 껍질 같은 현실의 막을 어떻게 감각하고 표면화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점차 이행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얼굴 앞에서>

이와 관련하여 <당신얼굴 앞에서>에서 특기할 만한 장면이 있다. 상옥은 감독을 만나러 가는 택시 안에서 약속 장소가 변경됐다는 감독의 메시지를 받는다. 이때 메시지는 감독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이것은 음성메시지일까, 아니면 문자를 보낸 이의 목소리가 받는 이의 상상 속에서 들려오는 것일까?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했지만, 영화를 거듭해서 볼수록 점차 후자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떠올려보게 되었다. 여기서 음성은 당연히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이를 확정 지을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다시 묻자면, 목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그 출처를 확정 짓지 않고 열어두는 한, 우리는 얼굴 앞에 맴도는 천국처럼 다른 층위의 감각적 현실 속에서 들리고, 보이는 것들의 표면을 재배치할 수 있다. 그리고 스크린은 이러한 불확정성이 계시처럼 작동하는 장소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상옥이 잠든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영화는 동생이 꾸는 꿈, 결국 말해주지 않은 그 꿈을 꾸는 얼굴과 상옥의 얼굴 사이에서 열려 있는 세계를 응시하려 한다. 잠든 정옥이 뒤척이면서 몸을 반대로 돌리자 상옥은 정옥의 얼굴이 보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 하나, 이 동선을 두고 상옥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세계의 열린 틈을 따라 움직였다고 말해볼 수도 있을까? 잠든 사람의 얼굴과 이를 바라보는 얼굴 사이에 놓인 것, 그 깊이도 부피도 알 수 없는 표면을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