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영화제의 계절이다. 몸이 그렇게 길들여져버렸다. 물론 2월에도 베를린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있지만 직접 가본 적이 없는지라 글로만 접한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주관적인 생체시계를 기준으로, 5월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영화의 꽃이 핀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부터 칸영화제로 이어지는 시즌이 되면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니면 살인적인 스케줄에 비명을 지르거나. 아무튼 날이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직접 영화제가 가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멀리서나마 글과 이야기로 전해 들으며 영화 소식에 파묻혀 지낸다.
일부러 발품 팔아 영화제까지 가는 이유가 뭘까. 나중에 개봉할 때 편하게 볼 수도 있지만 영화제에서 영화를 만나는 건 단순히 일찍 보는 것 이상의 체험을 제공한다. 사실 영화제 시즌의 영화 소식은 태반이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영화 바깥의 말들이 더 힘을 얻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의 축제 한가운데에 머물 때 (약간의 과장을 보태) 온 세상이 영화로 가득 찬 감각이다. 물론 한 발자국만 벗어나도 금방 깰, 얕은 잠 같은 환상이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 달콤한 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제는 영화와 닮았다. 화창한 햇살, 시원한 바람을 뒤로한 채 굳이 어두컴컴한 극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행위와 비슷한 감각이랄까. 잠시 현실의 시간과 차단시켜주는 티켓을 끊고 다른 시공간으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해도 좋겠다. 영화제는 그러한 극장의 체험을 극장 바깥의 거리로 끄집어내는 이벤트다. 정해진 상영시간처럼 특정 시기 동안은 신비로운 힘으로 지역 전체가 극장으로 확장된다. 전주와 칸, 아니 모든 영화제가 그 장소에 직접 가야 체감할 수 있는 감각이 있다. 공기와 냄새, 날씨와 소음, 낭비되는 혹은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시간까지 포함한, ‘영화의 축제’라는 이름의 영화 한편.
올해는 베를린에 이어 칸의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도 영화와 정치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 오갔다. 스크린은 세상의 거울이니, 지금처럼 격동하는 정세 앞에서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그 혼란에 응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쉽사리 답을 내기 어려운, 그래서 입장과 위치를 드러낼 용기가 필요한 질문이 나오자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뒤따른다. 다행이다. 그 소음이야말로 무언가 모이는 마당, 장소의 힘이자 기능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주에서도 그런 크고 작은 소음들이 있었다. 결정과 대응, 정리 과정에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한편으론 반갑기까지 하다. 극장이, 축제가 깔끔한 무균실이 되어선 곤란하다. 차라리 지저분한 얼룩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가득한 편이 낫다.
영화제는 영화가 꾸는 꿈이다. 다만 그 꿈이 도피가 되지 않길 바란다. 점점 보수적으로 기우는 영화제들을 보며 순수와 예술을 방패 삼아 현실로부터 달아나지 않길 기대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영화제가 평소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까지 건드리는 꿈으로 확장되길 희망한다. 언어의 속성은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구분하고 나누는 데 있다. 우리는 설명을 핑계로 정치와 예술, 이념과 미학을 대립되는 개념인 양 나누는 데 익숙하다. 영화는 정반대의 작업이다. 분리된 것들을 덩어리로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학자들의 예술이 아니라 문맹자들의 예술이다”. 축제의 한가운데에서 첨예한(혹은 구태의연한) 질문을 던지고 해명하는 건 그래서 의미 있다. 올해 칸영화제는 시작부터 자못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