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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클로징] AI 미술의 반젤리스

리들리 스콧 감독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는 사이버펑크의 고전으로 영화사뿐만 아니라 음악사에도 남을 작품이다. 그 음악 중에서도 특히 데커드가 레이첼과 처음으로 입을 맞추는 장면에 흐르던 사랑의 테마가 유명하다. 자신이 로봇이었고 모든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무너져버린 레이철에게 곧바로 사랑의 감정이 닥쳐오고, 혼란스러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입맞춤을 피한다. 레이철과 데커드와 그 장면을 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어떤 악기, 어떤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음악을 맡은 반젤리스는 이 장면에 꼭 맞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현악기, 관악기와 같은 자연 악기의 소리를 억지로 따라하는 ‘찌질한 모조품’으로 천대받던 신시사이저는 그의 손에서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사이버펑크의 세계와 너무나 잘 맞는 악기로 새로 태어났고, 곡 전체의 구성과 문법도 신시사이저의 소리에 맞게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 이제는 신시사이저가 음악의 중심과 전체를 이루는 새로운 음악, 새로운 미학이 태어난 것이다. 오히려 중간에 끼어드는 자연 악기 색소폰의 소리가 낯설게 느껴진다. 1981년의 일이다.

전자악기를 중심으로 삼은 새로운 음악과 미학의 탄생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킹 크림슨은 멜로트론이라는 악기의 늘어진 테이프에서 나오는 불안정한 피치와 그 모호한 음감을 활용해서 전설 속의 세상에 맞는 몽환적인 음악을 만들어냈다. ELP의 명곡 <Lucky Man>의 마지막 2분에 건반주자 키스 에머슨은 무그 신시사이저의 특징을 최대로 살려서 천지개벽 이래 존재한 적이 없는 사운드를 창조했다. 크라프트베르크의 전자음악은 사람이 기계인지 기계가 사람인지를 헷갈리게 만드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AI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영상이 사방에서 범람하면서, 이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감도 차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만드는 쪽에서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명민한 예술가와 크리에이터들은 이를 넘어서기 위해 더 세련된 사용법을 개발하고 있으며, 빅테크 또한 기술적으로 다재다능하고 큰 역량을 가진 도구들을 계속 내놓고 있으며, 눈 밝은 이들도 AI인지 실사인지 헷갈리는 이미지와 영상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보는 쪽에서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훌륭한 기술과 기법들은 또 새로운 종류의 피로감을 낳게 되며, 이에 대처하기 위한 또 새로운 기술과 기법들이 나오게 된다…. ‘톰과 제리’ 같은 형국이다.

하지만 신시사이저와 음악이 걸어왔던 길을 생각해본다면 어느 날 AI 이미지에 맞게 시각미술이 변화하고 또 거기에 맞는 미적 경험과 미학이 생겨나는 대반전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음악은 사실상 모조리 전자음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기타를 치면서 가수 혼자 부르는 노래라고 해도 곡의 구성도, 사운드의 배치도, 가사의 효과도 완전히 다른 음악이 되었다. 60년대 초기 밥 딜런의 음악은 이제 육자배기나 신고산타령처럼 들릴 뿐이다. AI 이미지에서도 반젤리스나 키스 에머슨 같은 이가 조만간 나타날 수 있다. 끝이 없을 듯싶던 ‘톰과 제리’ 게임이 레벨2로 올라서면서 시각예술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