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얼굴을 잔뜩 찌푸리던 하늘은 심술을 참지 못하고 거리의 나무와 사람들을 휘청이게 했습니다. 강풍 속에는 미스트 같은 입자의 물방울이 섞여 있지만 이런 얇고 강한 비를 피하겠다고 접이식 우산 같은 걸 펼쳤다가는 금세 발라당 뒤집힌 모양이 될 것입니다. 잠자코 회색빛 하늘의 짜증을 받아내는 편이 좋겠지요. 그래도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곧 무더운 날들이 시작될 테니 이런 추적한 날씨도 조금 너그럽게 생각해줄까요? 가랑비에 젖은 겉옷을 대충 털어내고 저는 한 샌드위치 전문점에 들어갔습니다. 지난해 이맘때쯤 시즌 상품으로 팔았던 것 같은 메뉴인데 올해가 되어서야 드디어 시도해봅니다. 제가 주문한 것은 오이 샌드위치입니다.
무뚝뚝한 키오스크에는 세 가지 메뉴가 떠 있었습니다. 오이 샌드위치, 오이 참치 샌드위치, 오이 계란 샌드위치. 매 끼니 단백질의 함량을 신경 쓰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입니다만, 게다가 육고기만 대충 피하는 느슨한 채식을 하는 제게도 유효한 제안이었지만 응하지는 않았습니다. 좀처럼 주인공이라 불리기 어려운 오이가 참치나 계란 같은 녀석들과 함께 등장한다면 혼자만의 매력을 보여주기에 힘이 부칠 것 같았거든요. 오늘은 다들 좋아하고 인기 있는 그런 애들 말고 가장자리에 있었을 것 같은 오이, 너 혼자만의 무대를 보고 싶구나.
샌드위치를 감싸 도톰해진 종이 포장을 잡으니, 이 정도 온기도 소중하게 느껴질 정도로 춥고 배고팠다는 실감이 납니다. 포장지를 벗기면 한눈에 보기에도 왜소한 체격의 샌드위치가 보입니다. 거칠게 가른 흰 빵(애매하게 건강을 생각하며 분위기를 흐리는 잡곡빵이 아니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속에는 랜치 소스와 함께 약간의 후추가 뿌려져 얇게 썬 오이가 듬뿍 들어 있습니다.
이 녀석의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여러 야채와 가공 단백질이 화려하게 들어간 BLT(베이컨, 상추, 토마토를 넣은 샌드위치)쪽과는 정반대라 볼 수 있겠습니다. 언뜻 에그마요 샌드위치와 비슷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분류를 같이하기엔 미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에그와 마요네즈의 관계는 이름에서도 크레딧을 나눠 가졌듯 조금 더 동등한 느낌의 듀엣 포지션이라면, 오이 샌드위치의 랜치 소스는 오이를 전면에 세우기 위한 서포트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최소한의 옷을 두르고 나온 오이 샌드위치는, 빵과 소시지에 쭉 짜넣은 소스 하나가 전부인 핫도그의 터프한 세계와 오히려 더 닿아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거칠게 녀석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단백질이 줄 수 없는 시원한 오이 질감이 입안에서 아삭하게 울려 퍼집니다. 따뜻하게 데워진 흰 빵 자체의 단맛과 고소함은 오이와 대비감을 이룹니다. 그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해주는 것은 랜치 소스, 이 삼박자가 주는 담백함의 미학에 빠져듭니다. 즐겁게 맛보다 보니 어느덧 그 가벼운 쾌락은 끝이 났습니다. 떨어진 빵가루를 쓸면서 생각했습니다. 영양적 불균형과 미니멀리즘, 꾸밈없는 당돌한 태도. 대체 이런 인디한 메뉴가 어떻게 버젓이 메인스트림에서 판매가 되고 있는 거지? 매장을 슬쩍 둘러봐도 사람들이 주문해 먹고 있는 것은 푸짐한 구성의 기존 인기 메뉴들입니다. 과연 오이 샌드위치는 다음해에도 시즌 메뉴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 참치와 계란이 들어간 응용 메뉴가 나타난 것은 오이 샌드위치의 가능성일까요, 한계일까요?
오이 샌드위치는 아무래도 주류가 되기엔 너무 마니악한 음식 같지만, 우리는 비슷한 메뉴의 비상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지난봄을 강타한 봄동 비빔밥입니다. 그야말로 봄동을 나르기 위한 소스와 밥, 그들을 엮는 접착제로 쓰인 계란프라이. 이 비빔밥으로 봄동은 그 어느 때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랑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엔 방송인 강호동이 있었습니다. 과거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그가 봄동 비빔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알고리즘을 타고 인기를 얻었던 겁니다. 아무래도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운과 스타성도 필요하겠습니다.
오이 샌드위치에게도 그를 위한 강호동이 나타날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오이에게 좀 무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가 자신만의 매력으로 살아남기를 기원해보지만, 대체 어떻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좋을지요? 가격이 낮은 만큼 영양가도 낮고 포만감도 낮은, 그야말로 100%의 내향성을 띤 이 샌드위치를 여러분이 굳이 선택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 한번 더 오이 샌드위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오늘은 햇살이 강력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어느 일요일 오후입니다. 자신이 안 먹는 야채를 빼기 바쁜 사람들의 주문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다 보니 제 차례가 왔습니다. 오이 샌드위치 주세요! ‘그냥’ 오이 샌드위치 말씀하시는 거죠? 네. 참치나 계란의 동행 유무를 매번 확인받아야 하는 그의 처지를 잠깐 생각했습니다. 매장에는 오이 참치 샌드위치가 뮤지션이었다면 할 법한 감각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알겠다, 생각하며 저는 ‘그냥’ 오이 샌드위치를 조용히 베어 물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5월이고, 아직 오이 샌드위치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