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돌아온 날>의 타이틀 시퀀스는 종이 위에 타자기로 새긴 듯한 글자체로 제시된다. 이 글자체는 영화 이전에 존재하기 마련인 시나리오라는 물질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나리오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영화는 이미 완성되어 첫 상영을 마친 상태다.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최소한의 단서로도 보증되지 않고, 오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출연 배우와 기자 사이의 대화에서만 존재한다. 대화 내용 중에서도 영화에 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많지 않다. 단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정수(송선미)가 혼자 걷는 뒷모습으로 끝난다는 점 정도다. 그의 뒷모습에서 외로움을 느꼈다는 감상은 정수가 이혼 후 복귀했다는 영화 바깥의 사실이 반영된 해석처럼 들린다(이는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쓴 것 같은데 묻지는 않았다’라는 후반부 정수의 대사로 보충된다). ‘아름다운 장면은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라는 반응은 홍상수 영화를 마주한 관객의 감상처럼 들린다. 물론 재현되지 않은 영화에 지나치게 매달릴 일은 아니다. ‘눈앞에 존재하는 대상을 바라보기’라는 홍상수 영화에서 반복된 전언은 재현되지 않은 실체를 생각하는 대신 배우와 기자가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말을 지금 전개되는 영화에 적용하려 할 때,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영화의 대상들은 조금 전에 들려준 이야기조차 번복할 정도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다. 영화라는 대상을 그저 바라본 관객이 도달하게 될 결론은 결국 그 대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고백으로 귀결되기 쉽다.
홍상수 영화는 종종 고백하기의 충동을 일으킨다. 하지만 영화를 향한 반복된 고백은 그리 흥미롭지 않다. 홍상수 영화에 관해 느끼는 지겨움의 요체는 반복된 반응이 남긴 잔상인지도 모른다. 한때 홍상수 영화는 자기 고백적인 작업처럼 보인 적이 있다. 그의 영화에는 감독이나 예술가들이 주인공이고, 그들은 불륜이나 부정에 휘말리기도 한다. “감독님은 왜 그렇게 자기 얘기를 하세요?”라는 대사가 천연덕스럽게 등장한다(<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지만 어느 순간 홍상수의 영화는 자기 고백적인 영화에서 기도의 영화로 옮겨간 것처럼 보인다. 고백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라면, 기도는 자신을 위해 하는 말 혹은 행위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덕수(윤여정)가 절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맞춰 허리를 숙여 절하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김민희)는 다리를 건너기 전 바닥에 엎드려 절한다. <그 후>에서는 눈이 오는 장면에서 아름(김민희)의 기도가 외화면 목소리로 삽입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 정수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기자들은 마치 각자의 고민을 안고 방문한 내담자처럼 보인다. 이들은 고민을 내비치고,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한마디를 요청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노력과 고백의 충동을 벗어난 비평은 가능한가.
<그녀가 돌아온 날>은 반복된 구조의 영화다. 영화는 총 5막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크게는 4막을 기점으로 두개의 덩어리로 이뤄져 있다. 전반부는 정수가 세명의 기자를 만나는 상황이고 한명의 기자가 각각 하나의 막을 담당한다. 4, 5막은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정수의 연기 수업 장면으로 4막에서는 연기 선생 김영(조윤희)과 정수의 대화, 5막은 연기 상대 준희(박미소)와 정수의 대화로 이뤄진다. 4막에서 김영의 조언을 바탕으로 인터뷰를 복기해 글로 적은 뒤, 5막에서는 쓴 글을 바탕으로 이전에 재현된 상황을 연기한다. 3막 동안 알 수 없는 영화에 관한 대화를 지켜봤던 관객은 이번에는 이미 경험한 대화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지켜본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보통의 순서는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캐스팅된 배우가 시나리오를 숙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본 리딩이나 리허설을 하고, 촬영을 진행한다면, 영화 <그녀가 돌아온 날>은 이 순서를 뒤집어 영화가 존재한 뒤에 시나리오가 나오고, 이것이 다시 영화 비슷한 어떤 것이 되는 양상을 마주하게 한다. 3막까지 관객은 배우를 연기하는 배우 송선미를 만났다면, 5막에서는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를 만난다. 5막의 송선미의 연기는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하는 배우라고 말해야 할까.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관객의 눈에 보이는 대본이 존재하는지 여부다. 인터뷰 장면에서 배우와 기자 사이에 종이와 녹음기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휴대폰 녹음으로 대체될 뿐 종이는 쓰이지 않는다. 반면 5막에서 마주 앉은 두 배우는 대사나 상황이 적힌 대본을 손에 들고 마주 앉는다. 정수는 자신이 방금 실제로 겪고 그것을 글로 썼지만, 이를 그대로 기억하거나 연기하는 것은 힘들어한다. 멈추고 대본을 확인하는 휴지부는 약속된 연기의 일부인가, 즉흥극이라는 상황에 걸맞기에 허용된 부분인가. 대본이 없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과 대본이 있는 상태에서 더듬더듬 연기하는 것, 둘 중 어느 편이 더 진실한 연기일까. 그의 연기에 연출자가 어느 정도 개입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진실된 연기는 없다고 해야 할까.
왜 배우의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유독 진실이 요구되는 것일까. 자신이 겪은 일을 연기한다는 건 무엇일까. 자신이 겪은 일을 연기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것은 또 무얼까. 두번의 상황은 “여기 좀 가려줄래요?”, “창문 좀 가려줄래요?”라는 정수의 말로 시작한다. 정수는 부탁의 말에 덧붙여 “눈이 안 좋아서”라는 이유를 댄다. 이에 관해 김예솔비 평론가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재현되어온 ‘눈의 수난’, 나아가 ‘눈의 종말’ 이후의 문제를 짚었다(<씨네21> 1556호). 오진우 평론가는 5장이 정수의 대사에 따라 어둠 속에서 재현되었으면 어땠을까를 상상한다(<씨네21> 1557호). 그러나 빛을 차단하거나 창문을 가리는 행위는 눈의 곤경을 말하기 위해서 삽입된 행위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눈이 좋은 상태가 아님에도 정수가 보려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않는가. 이들의 인터뷰는 잘 듣는 것만이 아니라 잘 봐야 하는 자리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커튼을 치는 행위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 외부의 빛을 차단하는 익숙한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영화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며, 영화에 관해 대화하는 상황이 곧 영화의 일부라는 표시다. 영화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기 선생이든, 영화감독이든 인터뷰하거나 이를 재현하는 상황 바깥에 놓인 존재가 이러한 가정을 보증한다.
세명의 기자를 만난 뒤에 삽입되는 휴지부에는 정수가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삽입된다. 쪼그렸을 때 다리를 감싸는 펑퍼짐한 드레스는 김예솔비 평론가의 말처럼 ‘몸을 감싼 껍질’처럼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커튼’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서 등장한 대사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커튼’은 무언가를 가리는 것만 아니라, 더 잘 보기 위한 (혹은 여기에 집중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배우는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다른 것을 숨겨야 하는 사람이라고도 생각된다. 하지만 정수는 보여주는 사람인 만큼 무언가를 잘 보려고 하는 사람이다. 정수는 자신을 인터뷰하는 기자들에 의해 관찰당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들에게서 발견한다. 밝은 이미지를 보고, 눈이 갈색이라는 것을 보고, 솔직함을 보고, 서두름을 본다. 기자가 정수를 보지 못한 때에도 정수는 기자를 본다. 하루 세번 상대만 더블캐스트로 로테이션되는 연극의 휴지부에서 정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담배를 피우며 숨을 고른다. 잠시 무대 위에 커튼이 내려간 인터미션을 표시하듯, 온전히 ‘중간’을 새기는 배우의 존재감이 불현듯 다가온다.
기억하는 한 대부분의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이 언급되거나 직접 묘사되거나 암시되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눈이 안 좋다’는 신체적 증상이 ‘눈의 종말’과 같은 극단적인 묘사로 치닫는 것은 일견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죽음의 흔적은 딸이 없었으면 알코올중독자로 죽었을 것 같다는 정수의 말이나 어렸을 때 연탄가스를 마셨다는 일화를 통해 비교적 소박하게 담긴다. 영화관을 즐겨 묘사해온 것과는 달리 영화관 장면 없이 영화에 관해 말하는 낯선 상황을 영화의 부재, 나아가 영화의 죽음이라고 말해보고 싶은 충동도 인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가 당치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배우가 있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한 영화의 바깥에 밀려나 있는데 그러면서도 어떤 방식이든 자신의 영화를 움튼다. 그는 맥주 한잔을 제안하는 연기 선생의 제안을, 자신을 기다리는 딸을 들어 물리친다. 이로써 끝을 맺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된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대화를 통해 상상한 끝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