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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근사한 영화(제) 여행

“근사하다는 건 어떤 거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중 오정희(배종옥)의 수양딸 미란(한선화)은 정희가 버린 친딸 은아(고윤정)에게 묻는다.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던 두 사람은 자존감덩어리인 정희가 뱉은 한마디 말을 사이에 두고 교감한다. 자신의 친딸을 두고 ‘근사하다’고 평가하는 정희의 말은 미란, 은아, 정희 세 인물이 놓인 처지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띤다. 동시에 각자 마음속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핵심은 교차하는, 같은 결의 정서이기도 하다. 감정을 글로 전한다는 게 이렇다. 정확한 내용보다는 둘러싼 맥락이 중요하다. 상황이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좋겠다. 덕분에 우리는 (설사 착각일지라도) 미지의 상대와 이어지는 공감의 통로를 낼 수 있다.

근사할 일 하나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새삼 생각에 잠긴다. 정말로, 근사하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가장 최근엔 칸영화제 수상 결과를 발표하는 박찬욱 감독의 재치 있는 한마디에 저절로 이 단어가 떠올랐다. 황금종려상은 본인도 받아본 적 없는 상이라 사실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는 농담과 함께, 주지 않으면 안될 만큼 좋은 영화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No Other Choice)라고 던지는 멘트를 듣는 순간 센스에 경탄했다. 박찬욱 감독의 옆자리에서 나처럼 감탄하면서 즐거워하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리액션에 덩달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박찬욱 감독이 올해 칸영화제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원래 인간은 본인에게 없는 걸 동경하는 법이라 재치 없는 나로선 재치가 선천적인 거라고 믿어왔다(그렇게 어쩔 수가 없음을 위안 삼았다). 멋진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카메라 너머 태도도 멋지다. 아니 멋진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멋진 영화를 만드는 걸까.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던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의 멘트를 들으면서도 근사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아카데미는 로컬 시상식’이라는 본질을 짚는 패기로 시작해, 외국영화의 자막이라는 ‘1인치의 장벽’의 문제를 짚은 뒤, ‘개인적인 것이 창의적인 것’이라며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을 추앙하는 멘트까지. 마치 미리 연출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센스 퍼레이드는 영화만큼 근사했다. 물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선 괴롭고 지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열등감과 지질함의 늪에서 허우적거린 다음에야 진득한 깊이를 확보할 수 있다. 관객들은 그 맑은 윗물을 즐기는 걸로 족하지만 그걸 글로 다시 옮길 땐 그 밑에 깔린 (인간적인) 지질함들, 무대 뒤편의 맥락을 상상해야만 한다.

영화를, 영화를 둘러싼 체험을 글로 전한다는 건 결국 리액션의 일이다. 없는 걸 새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한계가 분명하다. 그렇다고 완전 종속적인 관계는 또 아니다. 때때로 리액션이 액션을 넘어서는 경우도 없지 않다. 가끔씩 기적처럼 찾아오는 그 도약의 기반은 재구성력이다. 같은 경험을 해도 무심히 흘려 보내는 사람이 있고, 자기 안에 조금씩 더해가는 사람이 있다. 온전히 자신의 체험으로 받아들이고 한계를 응시한 뒤 고백하는 것. 재창작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번호에 실린 김소미 기자의 칸 출장 노트가 그런 종류의 글이다. 극장별로 장소의 기억을 재해석한 글을 읽으며 몇년 전 다녀왔던 칸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꼭 경험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칸을 가본 적 없는 독자들도, 나를 포함해 칸의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들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근사한 영화 기행문이자 스크린 뒤편까지 살피는 진득한 글이다. 질투와 상찬의 마음을 담아 영화보다 영화 같은 글들을 독자 여러분께 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