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을 향유한다는 것이 가능해지는 예외적인 순간이 있다. 바로 투우 경기가 벌어지는 오후의 뜨거운 시간이다. 투우사는 태어나서 죽음으로 향하는 생명의 섭리를 온몸으로 거부하며 역행하는 숙명을 지녔다. 그는 거대한 몸체의 황소와 대적하며 맹렬하게 부딪힌 후, 온몸에 짐승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소의 죽음을 증명해야만 살아서 경기장을 빠져나올 수 있다. 투우사는 죽음 이후의 삶을 산다. 알베르트 세라의 <고독의 오후>는 투우 경기의 결정적 순간, 칼로 소의 급소를 찔러야 하는 마타도르 안드레스 로카 레이를 3년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총 14회의 경기 장면들을 담은 이 영화의 주된 관심사는 투우 경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관조하는 비윤리적 스펙터클이 아니다. <고독의 오후>는 경기장과 자동차 속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투우사 안드레스와 그와 맞섰던 황소, 두 육체 사이의 좁고 깊은 간격을 진동시키는 흥분과 고독의 순간을 그린다. 인터뷰나 내레이션, 혹은 투우의 유구한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장식적인 서브텍스트가 부재하는 이 영화는 오로지 프레임을 투우사와 황소에게 헌정한다. 경기장 속 관중은 집단적 소음으로만 존재할 뿐, 화면 안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알베르트 세라는 안드레스와 황소를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수직적 위계의 관계로 위치시키지 않는다. 투우 경기는 일견 황소의 죽음만이 예정된 단순한 규칙의 서사로 읽힐 수 있다. 관중들이 바라는 것은 소위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으로 불리는, 끝내 몸속으로 침투한 긴 칼의 날카로움에 요동치며 죽어가는 소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경기 장면이 거듭될수록, 이 규칙은 모호해진다. 투우 경기의 잔혹한 진실은 투우사와 황소,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난다는 것이다. <고독의 오후>는 흔들리는 시선을 교환하고 서로의 몸을 가장 가까이에서 탐색하면서 상대의 땀과 피, 타액과 호흡을 모조리 뒤집어쓰며 삶과 죽음의 가녀린 경계 위에서 충돌하는 뜨거운 두 살덩이의 처연한 대면을 그리고 있는 영화다. 투우 경기에 덧씌워진 오명, 스펙터클의 운동 이미지를 전복시키면서 관능적이고 순수한 이미지를 출현시켰다는 것을 이 영화가 이뤄낸 도약의 순간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드레스는 매 경기에서 황소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이는 관중들과의 약속이자, 자신이 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불가역적 살생이다. 관중들의 환호 속에 안드레스가 손에 든 것은 트로피가 아니라 죽은 황소의 귀이다. 투우사의 퍼포먼스 수준을 매기는 징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땀과 피로 범벅된 그의 얼굴이 표상하는 것은 승리에 도취된 인간의 명예로움이 아닌 것 같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한몸처럼 접속됐던 황소의 체온이 남아 있는 육체의 일부를 손에 쥔 안드레스의 얼굴에 보다 선명하게 비치는 것은, 한 생명체가 자신에게 유산처럼 남기고 간 얼마간의 보장된 삶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고독처럼 보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32년 발표한 <오후의 죽음>에서 글쓰기와 투우 경기를 병치하면서 죽음을 초월하는 창조를 발견했다면, <고독의 오후>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쟁취해야 하는 고독한 투사의 모순된 몸짓을 고백한다.
CLOSE-UP
경기를 앞둔 안드레스가 옷을 갈아입는 시퀀스가 있다. 영화는 거대한 황소와 맞서는 한 남자의 벌거벗은 몸을 보여준다. 안드레스는 홀로 옷을 입을 수 없다. 경기장에서의 화려한 퍼포먼스와 달리, 이 시퀀스에서 그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의상 담당자에게 내맡긴 채 예정된 경기를 준비한다. 대화 없이 진행되는 이 시퀀스의 마지막, 안드레스는 성모를 향해 기도를 한다. 목숨을 건 경기를 앞둔 안드레스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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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병> 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2004
비인간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열망과 지독한 집착은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열대병>을 떠올리게 한다. 군인 켕은 자신과 비밀스러운 사랑을 나누다 어느 날 종적을 감춘 통(혹은 호랑이 유령)을 찾아 숲으로 뛰어든다. 동물처럼 네발로 숲속을 기고, 그들의 언어를 흉내내던 켕은 꿈에 그리던 그와 마주하고 죽음을 불사한 마지막 고백을 트랜스 상태(자신을 자각하지 못하고 외부 자극에서도 자유로워지며, 의식이 내적으로 강하게 이동하게 되는 일종의 비정상적 초월 상태.-편집자)에서 내뱉는다. “유령, 너에게 준다. 내 영혼, 내 육체 그리고 내 기억을, 내 피 모두를. 우리 모두 노래를 불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