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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정의와 속도, 김철홍 평론가의 <군체>

*<군체>에 대한 주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군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철(구교환)의 웃음이다. 영화 후반부 고도화된 인공지능과 같은 능력을 얻은 영철의 웃음이, 진짜 웃음이 나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짓는 웃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영화의 오프닝에서 본인의 테러 행위를 ‘실험’으로 규정하며 경찰에 예고하는 것부터 의심스럽다. 빌런 영철은 인간 모두를 군체로 감염시키기 위해 힘을 집중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가끔은 테러 그 자체가 아닌 보여주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소 허무하고 예상되는 결론을 맺은 이 영화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당신의 본심은 정말로 좀비에 있는 것이 맞는가. 사실 인간에 있는 것은 아닌가.

이는 사실 <군체>뿐만이 아닌 감독 연상호의 장르영화들에 가닿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여러 의미로 한결같다. 장르영화의 측면에선 늘 비슷한 아쉬움의 피드백이 나온다. 등장인물들은 평면적이고, 극의 전개는 모범적이며, 결말에 클리셰가 활용된다는 점들이 지적된다. 그러나 반대로 항상 반짝이는 부분은 사회 드라마로서의 시선이다. 매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창작자 연상호의 작업 방식과 곁들여져, 꽤나 시의성 있는 사회적 풍경이 영화에 담기는 경향이 있다. 장르영화로서는 아쉽지만 사회 드라마로서는 번뜩이는 그의 작품들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선 그러므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의 관심은 좀비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고. <군체> 속 영철과 좀비들의 모습을 보며 이번 작품 역시 같은 선상에 놓인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속도가 만들어내는 공포

물론 <군체>가 좀비영화로서의 매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좀비영화가 육체의 속도를 변화시키며 진화해온 장르라면, <군체>는 그 속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차원으로 옮겨놓은 영화다. 이 영화 속 좀비들에게 물리적 속도는 진화의 우선순위가 아니다. 혹은 그런 건 하등한 존재들이나 신경 쓰는 것이다. 대신 <군체>의 좀비들은 거의 동시에 가까운 초고속 정보 교환을 활용해 인간을 공격한다. 그런 그들이 왜 도대체 인간의 몸 따위를 탐하는지에 대해 따지고 드는 건 이 장르에서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어찌 됐건 <군체>는 속도의 차이를 활용해 육체-달리기가 만들어내는 것과 버금가는 유의미한 스릴감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 속도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 큰 공포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정보 교환은 섬뜩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반면, 인간은 느리고 불완전하다. 영화 속 장면으로 표현하자면, 좀비들은 다 함께 고개를 쳐드는 단 하나의 제스처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지만, 반면 인간들에겐 적어도 두개의 행위, 발신과 수신의 동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마저도 서로 통하였는지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철은 속도의 지배자이다. 그는 데이터망의 속도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를 단축시킨다. 그가 진화하면 진화할수록 그와 군체간의 연결 고리를 설명하는 숏은 생략된다. 이 점에서 육체적 속도를 강조하는 좀비영화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 영화들에선 최고 속도에 다다른 좀비를 오래 보여줌으로써 장르영화의 매력을 끌어올리겠지만 <군체>는 정반대다. 영철은 끝으로 갈수록 보여줄 것이 없다. 후반부로 향하며 그가 변주하는 동작들은 웃거나, 뻐근한 몸을 푸는 것뿐이다. 만약 영철이 세정(전지현)에 의해 제지당하지 않은 채 최종 진화한 순간이 왔다고 상상해보자. 그는 이제 목을 꺾을 필요가 없으므로, 아니 애초에 육체가 없어도 되는 상태일 것이므로 영화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육체가 빠르지 않은, 그래서 영화적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캐릭터는 장르영화에서 말 그대로 시간을 잡아먹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무 느린 세정이 오르는 시험대

그와 대조적으로 인간들은 너무 느리다. 인간의 대표이자 주인공인 세정은 처음부터 늦게 등장한다. 영화는 세정이 체인스 바이오의 콘퍼런스에 지각한 사연을 상세히 보여준다. 전남편인 규성(고수)이 세정을 닦달하자 세정은 택시 때문이었다는 핑계를 대고, 규성은 세정이 원칙을 너무 지키는 것이 단점이라는 말을 남긴다. 규성 입장에서 세정은 그 성격 때문에 더 높이 가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세정은 이제 자신의 원칙을 지키며 모두를 이끌고 건물을 올라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그런 의미에서 <군체>는 영철의 실험장임과 동시에 세정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세상이 최선일 거라 생각하여 사람들을 뇌사상태에 처하게 하는 유아기적 빌런인 영철에 맞서, 세정은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속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세상에 증명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군체>속 생존 그룹의 모든 결정들은 세정의 관찰과 유추로부터 시작되기에, 이 영화 전체는 결국 세정의 시행착오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세정은 감염체의 특징을 유추하는 데 거의 성공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매번 실패한다. 세정의 판단으로 실행된 작전들의 끝엔 항상 희생자들이 있으며, ‘연상호 영화’답게 그 희생자들은 악인을 구하던 선인이다. 그럴 때마다 세정은, 아니 인류는 무거운 질문을 감당해야 한다. 저런 악인까지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 품어야 하는 것일까? 이를 위해 선인이 희생하는 게 옳은가? <군체>는 하반신이 마비된 인물인 현희(김신록)를 등장시키며 그 질문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가장 영리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지만 존재 자체가 ‘짐’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얄궂게도 현석(지창욱)은 몸과 마음의 짐을 내려놓자 초능력에 가까운 에너지를 얻는다. 또한 학교폭력 가해자에게는 어떤 벌을 내려야 할 것일까? 우리는 피해자의 상처를 어떻게 함께 보듬어야 할까? 그러나 군체는 인간들의 너무나도 지난한 합의 과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학폭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대화를 듣고 비웃던 영철은, 마치 최상급 요금제 버전의 대화형 인공지능서비스에 버금갈 정도의 신속한 속도로 그들 사이에 정의의 손길을 내린다. 이때 영철이 짓는 웃음은 두 사람의 모습이 우스워서라기보다는, 이렇게 간단히 답을 내릴 수 있는 사안에 많은 고민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비효율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처럼 느껴진다. 이 장면을 비롯해 <군체>의 많은 순간들은 언젠가 인간이 인공지능에 의해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최신의 공포를 자극한다.

과연 우리는 세정처럼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도 우연한 오류의 행운이 찾아올 수 있을까. 누군가는 <군체>를 좋은 예시로 삼아 인간이 원칙을 지키며 기계의 오류를 노린다면 승산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의 시험대인 것만이 아닌 그들의 실험장이기도 하다. <군체>의 오류를 빠르게 학습한 그들이 웃고 있다. 웃고 있을 때가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