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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얼굴 없는 반쪽짜리 승리, 이우빈 기자의 <군체>

*<군체>에 대한 주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군체>를 보고 나오며 마음이 쓰렸다. <군체>가 훌륭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항간에 떠도는 비판에도 찬동하지 않는다. 왜 속이 쓰라렸는지 더 면밀히 복기하기 위해, 통상적 비판들의 엇나간 영점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비판 여론은 크게 두 종류다. 첫째, 연상호 감독이 게을리 자가복제를 한다는 이야기다. <부산행> <반도>에 이어 또 좀비물을 내놓았으니 지겹다는 논리인데, 장르영화 감독이 장르물을 만들어 문제란 논리는 딱히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장철이 무협영화를 많이 찍었다고 비판한다거나, 마이클 만에게 누아르를 그만두라고 채찍질할 순 없다. ‘특정 장르의 반복’이라는 양상을 꼬집고 싶다면 장르라는 틀의 반복이 아니라 작품의 속내에 어떠한 변화나 타성이 깃들었는지 논해야 마땅하다.

둘째, <군체>가 다른 작품들의 요소를 이것저것 섞어 만들었으니 진부하다는 비판이다. 불완전한 소통 체계를 극복하려 인류의 정신을 하나로 뭉치겠다는 영철(구교환)의 작전이 <신세기 에반게리온> 속 ‘인류보완계획’을 가리키고, 좀비들의 집단지성·군집 체제가 <라스트 오브 어스> <아이 엠 어 히어로> 등의 좀비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예시를 들라면 끝도없다. <에덴>(EDEN) 등 서브컬처에서 ‘인류보완계획’과 유사한 영지주의적 발상은 비일비재했으며, 비인간적 폭력을 마주한 아이들의 싸움은 <드래곤헤드>도 떠올리게 만든다. 밀실 내의 윤리적 갈등에선 좀비영화의 뿌리인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 호명된다.

그런데 이야말로 좋은 장르영화의 조건이 아닌가. 비슷한 공식, 유지되는 관습, 직관적으로 연상되는 도상의 세포들이 군체처럼 모여 몸집을 키우는 것이 장르의 이상적인 형성·진화 과정이다. 문화적으로 널리 축적된 유희의 코드들을 한 군데 욱여넣어 다수 관객의 즐거움을 자극하는 일은 장르영화의 본질적 책무이기도 하다. 요컨대 두 번째 비판의 논리는 연상호가 성실하고 장르적 패스티시에 탁월한 장르영화 감독임을 증명하는 근거로 간명히 전환된다.

연상호가 관철한 대면의 윤리성

완성도와 무관하게, <군체>가 마음에 걸렸던 이유는 연상호 감독이 자신의 뚝심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부산행> <반도> 속 슬로모션을 게으른 신파적 연출이라고 대개의 관객과 평자가 비판했지만, 이는 연상호식 실사극을 흥미롭게 만드는 발원지기도 했다. <부산행>에서 석우(공유) 일행은 창 너머로 15호 칸 사람들이 절멸하는 표정을 바라본다. 이를 두고 송경원 평론가는 <부산행>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비어 있는 공간, 그래서 해독 불가능할 만큼 가득 찬 감정들이 담긴 장면”(<씨네21> 1067호)이자, 유의미한 불균질함이라고 평했다.

<반도>의 결말, 정석(강동원)은 일전에 구조를 포기했던 민정(이정현)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대목에서 정석은 그들의 얼굴을 과거라는 플래시백과 현재의 슬로모션으로 지겨우리만치 마주하면서 자신의 윤리를 각성시킨다. <기생수: 더 그레이>의 작중 기생수들은 원작 만화와 달리 살상력이 낮아졌고, 이로써 기생수와 인간이 대면하고 소통하는 휴머니즘의 시간이 생겼음을 필자가 주장한 바도 있다(<씨네21> 1451호 ‘연상호의 피와 살로 만든 새 기생수, <기생수: 더 그레이>와 원작 <기생수>의 비교’).

이러한 연상호의 태도를 대면의 윤리성이라 부르고 싶다.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이나 <지옥> 등이 인간의 ‘사이비’적 본성을 의도적으로 (그려서) 노출했다면, 그의 실사극은 인간이 지닌 일말의 사단(四端)을 화면에 표류시켜왔다. 인간이 진정으로 선한지 악한지 고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악의 가치판단을 연출자의 이미지로 환원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과 달리, 이곳엔 배우의 얼굴이라는 미지가 있고 의도 바깥의 시간이라는 유예가 있다. 연상호는 이 미지와 유예를 등장인물간의 대면 구도로 시각화하고, 그사이에 윤리의 저울을 두며 관객이 각자의 감정을 수용하게 했다. 어쩌면 캐릭터의 명쾌한 윤리적 결정에 조금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혹자는 쓸데없는 감상이라며 거부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그 판단의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장르영화의 코드들을 과하게 짜맞추는 동시에, 얼굴의 시간을 의도적 공백으로 두는 것은 연상호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새겨온 각인이었다(여기서 <얼굴>의 연상호가 얼굴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보여줬는지도 중요하지만, 이번 글에서 모두 다루기는 어려울 듯하다).

인터페이스가 지운 얼굴

<군체>의 세계는 감정을 오해한 이성이 지배한다. 영철은 아버지와 세정(전지현) 사이에 있었던 ‘소통의 불완전함’을 비극이라 여겨 과학기술을 활용한 범죄를 일으킨다. 하지만 사실, 불완전 소통이 초래한 비극의 핵심은 아버지의 슬픔과 자신의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범주에 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인류보완계획을 추진한 이카리 겐도는 아내에 대한 사랑 하나로 나머지 인류를 무시한다. 이것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 나아가 신화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영철의 ‘군체보완계획’은 정반대다. 세계의 비극을 이성의 오류로 편협하게 좁히는 순간, 그곳엔 옳고 그름만이 남는다. 감정과 이성의 간극이 윤리로 타협되기보다, 이야기의 결말은 승패의 논리로 판가름난다.

더군다나 좀비 군체가 생성되어 일찌감치 인간들의 시공간을 뺏자, 이곳은 대면의 윤리가 발휘되지 않는 쾌속의 장으로 변모한다. 이카리 겐도가 아들 이카리 신지와 대면하면서 부자의 감정이 교환됐던 것(<신 에반게리온 극장판>)과 달리, 영철은 세정과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다. 세정 일행은 체포한 영철의 눈을 가리고 포박하여 양자 사이의 대면 조건을 무너뜨린다. 대신 세정 일행은 스마트폰 채팅으로 대화하고, 세정은 적극적 협조자인 설희(신현빈)와도 대부분 통화로 소통한다. 세정 일행이 현희(김신록)를 통제실에 버릴 때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지 못하는 일방적 관찰의 상황에 있다. 이처럼 <군체>는 얼굴을 지운 비대면 인터페이스의 은막으로 가득하다. 연상호식 대면의 윤리성이 작동되는 조건이었다면, 현희의 운명 역시 달랐을 수 있다.

<군체>에서 대면의 윤리성을 견지하려 했던 자, 달리 말해 일전의 연상호식 좀비물에서 주연이었을 자는 둘이다. 세정과 마주 보고 식사하며, 타인의 얼굴과 교류하기를 도우려 했던 규성(고수)이 있다. 가족과 영상통화하며 세정의 얼굴을 보여주려고도 했던 그는 일찍 죽는다. 누나 현희의 죽음에 복수하겠다던 현석(지창욱)은 적어도 세정 일행의 실체를 마주한 채 결판 지으려 한다. 이내 장르 위의 윤리적 초인이 되어 수많은 좀비를 쓰러뜨리면서 그들에게 당도하지만, (좀비가 된) 현희의 얼굴을 보며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렇게 <군체>와 남은 이들은 규성과 현석의 얼굴을 말끔히 지운다.

즉 <군체>에서 연상호는 이전의 장르영화에서 고수하던 대면의 윤리성을 한수 접고, 비대면의 비윤리성을 주요 동력으로 삼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좀비(혹은 또 다른 알파)의 회생 가능성이 제시되는 것은, 하여 세정과 설희의 승리가 반쪽짜리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은, 영화 속 이들이 서로의 얼굴 보기를 포기했음을 일갈하는 연출자의 냉소주의다. 아마 작금의 시대상을 직시한 결과일 테다.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질타받을지라도 대면의 윤리로 무장하였던 연상호의 이전 영화들이 그리워지며 마음이 쓰렸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