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 어느 행성에는 독특한 성인식이 있다. 18살이 되면 ‘시초지’로 불리는 지구에 다녀와야 한다. 1년이 지나도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찾아 떠난 데이지(박지후)는 친구 소피(김향기)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이 우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뿐인 듯하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각색한 동명의 애니메이션은 이 관계를 한뼘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명탐정 코난>에 빠져 만화가를 지망했다가 극장판 <명탐정 코난: 제로의 집행인>연출진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한 허평강 감독의 작품이다. 중학생 때부터 코믹월드에 참가하고, 학산문화사에 투고했던 그는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부모님 말씀에 성균관대학교 영상학과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돼 오랜 시간 일본에서 지내온 순례자를 잠시 한국에서 조우했다.
- 한국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20년 가까이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2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와세다대학교에 다녀온 것이 터닝 포인트였다. 애니메이션 관련 서클에 들어가 친해진 이들 중 한 선배가 훗날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프로듀서가 된 이와키 다다오다. 내가 졸업할 때쯤 그가 매드하우스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대뜸 내 졸업작품을 보냈다. 연필로 한장 한장 그려 만든 3분 남짓의 흑백애니메이션이었다. 그게 마루야마 마사오(매드하우스 창립 멤버이자 전 대표, 현 마파(MAPPA) 회장.편집자) 눈에 들어 입사로 이어졌다. 그런 시절이었다. (웃음)
- 그야말로 성공한 덕후가 된 셈이다.
앞에는 린 다로가 앉아 있었고, 뒤를 돌면 곤 사토시가 있었으니까! 첫 사수는 아라키 데쓰로였다. 그가 나를 발탁해 <데스노트>에 참여할 수 있었고, <데스노트 리라이트: 보이지 않는 신>으로 연출 데뷔를 했다. <마인드 게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도 각별하다. 그가 내게 <일본침몰 2020>시리즈 디렉터를 맡겼는데, 정형화된 재패니메이션 문법을 익혀온 내게 작가적 태도를 가르쳐줬다. 언젠가 그가 기술적으로 까다로운 요구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주저하니 그는 “최대한 발버둥친 흔적이라도 보여달라”고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시도해보라는 허락처럼 들려 감사했던 기억이 있다.
- 그 시도 중 하나일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한국 작품을 하는 것도, 총감독에 임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막 출간되었을 때쯤 21스튜디오의 이한재 프로듀서가 책을 권하며 수록작 한편을 애니화한다면 무엇을 꼽겠느냐고 물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처럼 장소가 여러 번 바뀌는 이야기라면 애니메이션으로도 다채롭고 아름다운 표현이 가능할 듯했다. 그렇게 시나리오와 콘티를 개발하며 응모한 지원 사업들을 통해 제작에 돌입했다.
- 서간문 비중이 큰 원작을 과감히 각색했다.
편지를 내레이션으로 읽으면 관객이 사건을 가깝게 느끼지 못할 테니 원작에서 편지의 수신인으로만 존재한 소피를 영화에 직접 등장시켰다. 인물에 대한 설명을 줄이고자 데이지와 올리브(이주영)의 역할도 조금씩 합쳐봤다. 시초지에 가서 움직이는 캐릭터는 데이지로 한정하되, 올리브가 데이지와 친한 언니였다는 설정을 통해 데이지의 동기를 분명히 했다. 행성 마을의 아이들을 모두 여자로 그린 것도 우리의 선택이었다. 그게 영화 속 세계관을 더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김초엽 작가에게도 의견을 구했는데, 작가님이 각색에 굉장히 열려 있었다.
- 시초지 도시 이타사와 행성 마을의 차이는 어떻게 구현하고자 했나.
이타사는 차가운 색, 마을은 따뜻한 색으로 구분해 접근했다. 특히 마을은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다. 언젠가 여행하면서 본 삐죽삐죽 솟아 있던 지형과 그 아래로 개미굴처럼 펼쳐진 지하 유적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다. 반면 이타사는 지구의 남은 생명력을 겨우 끌어가면서 기생 중인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 두 장소처럼 소피와 데이지의 캐릭터 디자인도 대비되기를 바랐나. 소피가 차분하게 각진 인상이라면, 데이지는 둥글어서 더 명랑해 보인다.
위현송 캐릭터 디자이너에게 인물들이 첫눈에 예뻐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소피는 볼수록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추구했다. 쌍꺼풀 없고 턱이 긴 채로 자연스럽게 아름답기를 바랐다. 데이지는 말괄량이 삐삐 느낌을 원해 주근깨를 그려 넣었다. 얼굴의 얼룩은 동화(動畫) 작업을 원활하게 분배하기 위해 테크니컬한 부분까지 고려하면서 디자인했는데, 데이지의 얼룩은 데이지꽃 모양, 올리브의 얼룩은 올리브 잎사귀 모양이다.
-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황소윤의 음성이 극의 클라이맥스를 책임진다.
황소윤이 소속된 밴드 새소년 공연을 보면서 그의 기타 연주에 울림을 느꼈다. 생명을 갈아넣어 연주한 듯한 음색이 이타사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공연 애프터 파티 때 그에게 음악을 부탁하고 싶다고 인사한 게 첫 만남이었다. 애니메이션 음악을 부탁할 수 있는 기성 음악감독이 많았음에도 처음부터 황소윤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원했기에 내가 음악적으로 건드린 건 거의 없다. 이렇게 뻔한 선택을 피해보려고 한 게 이번에 내가 한 발버둥이 아닐까.
- 배우들을 성우로 기용한 것도 그 연장선상일까.
그렇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드라마 <열여덟의 순간>에서 본 김향기 배우를 떠올리며 소피를 구체화했다. 데이지 역의 박지후 배우, 올리브 역의 이주영 배우도 각각 <벌새>와 <야구소녀> <메기>에서 보고 홀로 가상 캐스팅했던 분들이다. 내 모든 1지망이 현실이 되었다. 모두 한국 애니메이션에 힘을 보태는 마음으로 참여해주었다. 나 또한 선배들의 도움을 받은 만큼 후배 양성에 힘쓰고 싶다. 더불어 이번 작품 결과에 따라 내가 쓴 오리지널 스토리의 향방도 정해지지 않을까. 이 또한 세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앞으로도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살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