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을 두려워 마라.”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 신작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마거릿(에밀리 블런트)을 통해 방송으로 전파된 외계 생명체의 메시지다. 영화 막판에 휴머니즘을 고양하는 영화의 과도한 연출은 저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끔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진실과 믿음을 상충하는 엔딩을 선보이며 관객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열린 결말인 이 영화의 엔딩은 관객에게 미지의 생명체(혹은 타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윤리적 반응이라 썼지만, 그 표현은 왠지 고상해 보인다. 저변에 깔린 것은 아마도 죽음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할리우드의 거장인 스필버그의 신작 <디스클로저 데이>를 보며 현재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 중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알베르트 세라의 신작 <고독의 오후>가 문득 생각났다. 이 영화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황소와 인간간의 대결을 다룬다. 소는 말이 없다. 투우사는 붉은 천을 흔들어 소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파악하여 그를 유인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투우사라도 예측은 언제나 빗나간다. 투우에서 단 한번의 실수는 곧장 죽음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고독의 오후>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유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가 그리고 영화가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의 죽음을 바라는 것일까.
<고독의 오후>를 보며 황소에 맞서 선보이는 투우사의 유연하면서 꼿꼿한 포즈, 안무에 버금가는 투우사와 황소의 호흡, 죽음마저 불사한 투우사의 광적인 몰입 그리고 다채로운 어휘로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할까? 객석이란 안전한 위치에서 우리는 저 피의 난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딜레마에 빠진다. 강렬한 세라의 프레임에 매혹되거나 혹은 그의 장난에 놀아나거나.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고독의 오후>는 둘 사이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영화다. 영화는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의 3년간의 경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 방대한 분량의 푸티지를 어떤 규칙에 따라 선별하고 배열했는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3년이란 시간의 누적을 피력하는 타입의 다큐멘터리는 결코 아니다. 영화 제목처럼 계속 오후의 상태임을 느끼게 하는 게 이 영화의 배열이 선사하는 시간의 감각일 테다. 멈춘 듯한, 벗어날 수 없는 이 시간에서 탈출구는 어디일까.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입구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투우사들의 퇴장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입장 장면이 없다. 설령 촬영본이 있다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배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계산된 프레임 안에서 기록된 이 영화는 실내극처럼 느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투우 경기장, 차 안 그리고 호텔 모두는 마치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공간처럼 연출한다. 클로즈업을 극대화하여 경기장 펜스가 안 보이는 숏들이 나올 때도 있다. 이때 모래 위의 투우사와 황소는 마치 야생에 덩그러니 놓인 존재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러한 프레임의 고립화 전략을 통해 고독감은 배가된다. 예외적인 순간이 이 영화에 두 차례 등장한다.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고독의 오후>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황소와 투우사 안드레스의 얼굴을 몽타주하는 장면은 투우 경기만큼이나 영화의 가장 강렬한 순간이다. 투우장이 아닌 어느 숲속을 거니는 황소가 보인다. 황소 뒤로 나무가 보이고, 시간은 밤으로 추정된다. 몸에 넘버링이 된 황소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리저리 배회한다. 다음 컷에서 황소는 카메라를 응시한다. 관객인 우리를 보고 있는 느낌도 자아낸다. 사실 ‘응시’는 정확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황소가 무엇을 보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우리에게 육박하는 황소라는 동물의 존재감이 스크린에 펼쳐질 뿐이다. 우리의 시선은 금세 다른 이에게 양도된다. 영화는 다음 컷으로 경기를 끝내고 호텔로 이동 중인 차 안의 안드레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기 전의 황소와 황소를 죽이고 살아온 투우사. 생사를 가르는, 시간차가 존재하는 이 몽타주는 대결 상대를 마주 보는 듯한 거울효과를 낸다. 하나, 둘이 실제로 투우장에서 만났는지는 영화를 통해 알 수 없다. 영화는 두 존재를 이음새 없이 말끔히 붙였지만, 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한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본 황소는 투우장으로 입장하기 전의 상태다. 황소는 특별한 훈련 없이 야생에서 방목되어 길러지고, 실제 투우장에 투입되기 전에는 빛이 차단된 어둠 속에 고립시킨다고 한다. 안드레스로 컷이 전환되기 전에 등장한 황소의 정면숏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장면처럼 보인다. 다음 컷에서 안드레스는 정면에 거울이라도 달린 듯 자신의 얼굴을 살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안드레스와 그의 팀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다. 사실 이 공간 역시 연출이 가미된 공간이다. 무비(MUBI)가 발행하는 <노트북>과의 인터뷰에서 세라는 안드레스가 차 안의 조명에 대해 불평했지만, 카메라에 대해선 금방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매끄럽게 이어진 황소와 투우사, 두 존재의 경계에 세라의 카메라가 존재한다. 두 존재는 카메라를 보지 않는다. 투우장에서 둘 사이에 붉은 천이 있듯이, 두숏 사이에는 카메라가 존재한다. 이 기계적인 시선으로 둘을 엮는 것이다. <고독의 오후>를 보며 순간 섬뜩함이 몰려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대체하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영화가 전체가 기록됐다는 점을 인식할 때다. 이러한 카메라의 존재감을 세라는 몽타주를 통해 드러낸다. 그것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순간에 지나가고, 티도 안 나는 영화 속 누빔점이다.
영화 처음에 황소와 투우사를 연결했듯이, <고독의 오후>는 차창 밖 풍경과 안드레스의 시점을 몽타주하여 카메라의 존재감을 살며시 드러낸다. 그날 있었던 경기에서 안드레스는 돌진하는 황소에 들이받힌다. 다행히 소뿔 간격이 넓어서 그 사이에 몸이 끼이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소 등에 꽂힌 작살로 인해 흥건해진 피는 충돌로 안드레스의 얼굴 위로 튀어버린다. 바지는 뜯어지고 다리는 쩔뚝거리지만, 안드레스는 경기를 재개한다. 그의 눈빛은 통증으로 순간 총기를 잃고, 동작엔 힘이 실리지 않게 된다. 이것이 영화 통틀어 안드레스가 긴장이 풀린 유일한 모습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 가장 진실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이내 칼을 들고 황소의 목숨을 끊겠다며 결의에 찬 얼굴을 한 안드레스는 광적으로 몰입한다. 황소와의 충돌로 ‘얼’이 빠져나가는 그 표정은 황소의 얼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황소가 칼에 맞아 쓰러지고 그가 다시 한번 척수를 끊어 즉사시키면서 사후경직되는 황소의 네발과 멈춰버린 눈을 본다.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생동하던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멈춰버린 소의 몸뚱이를 보게 된다. 죽을 고비를 넘긴 안드레스의 역경의 드라마가 있은 후에 영화는 마치 그의 시점숏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인서트숏을 삽입한다. ‘고독’에 가장 부합하는 서정성을 지닌 영화의 유일한 숏이다. 그의 고개가 정면을 바라본 뒤에 인서트숏을 붙이고 다음 컷에서 안드레스가 창밖을 보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는 장면을 붙인다. 언뜻 그의 시점숏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 풍경은 안드레스의 시점으로 온전히 환원될 수 없다. 우리가 풍경을 보며 영화 제목처럼 고독을 느꼈다면, 그것은 어쩌면 세라의 장난에 놀아난 것일 수 있다. 세라의 카메라는 인물에게도, 관객에게도 시점을 내줄 듯하면서 결코 내주지 않는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이 카메라는 <고독의 오후>의 숨겨진 진정한 주인공이다.
이 비정한 카메라를 통해 영화는 투우장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기록하려는가. 전체를 인용하고 싶을 만큼 이장욱 시인의 <투우>라는 시의 한 대목이 선명하게 겹쳐온다. “단 하나의 소실점이 확장될 때 내가 단 하나의 소실점에 갇힐 때 그것은 확률인가?” 영화는 황소와 투우사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죽음이란 사건을 수치화할 확률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확률이라기보다 차라리 운명에 가깝다. 영화에 입장 장면이 없다던 앞선 판단은 섣불렀는지도 모른다. 안이 보이지 않는 검은 내부에서 뛰쳐나오는 황소의 숏, 그것이야말로 안드레스의 퇴장과 대구를 이루는 입장 장면이다. 투우장을 나선 안드레스는 다시 호텔로 향하는 차 안으로 들어가고, 대결 상대인 또 다른 황소는 어둠 속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다. 반복되는 죽음의 순환. 세라가 구성한 이 영화적 세계의 오후는 저물 날이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