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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우주전쟁>의 재난에서 <E.T.>의 마음으로 꿈꾼 <더 포스트>의 도덕, <디스클로저 데이>

<디스클로저 데이>

올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혔던 <디스클로저 데이>는 공개 직후부터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서 빠르게 잊히고 있다.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캐릭터의 설득력은 떨어지고 전개는 지루하며 가치관은 낡았다는 감상, 간단히 말해 새삼 지적하기도 민망한 영화의 기초공사를 향한 비난은 이 세계의 설계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당혹감이기도 할 것이다. 편파적이고 가혹한 반응이라고 몰아세울 일만은 아니다. 최첨단 기술력으로 무장해 지구와 우주를 기발하게 연동하는 동시대 블록버스터들은 물론이고 스필버그의 지난 영화들과 비교해도 <디스클로저 데이>의 영화적 감수성에는 퇴행적인 면모가 다분하다. 작품 속 뉴스가 환기하는 3차대전 발발 위기나 ‘알 권리’를 위시한 메시지를 동시대적 징후로 읽기에도 이 영화의 정치성은 허술하다. 도입부를 채우는 프로레슬링 경기장과 이후 위기마다 등장하는 수녀원, 달리 말해 엔터테인먼트와 영적인 가치의 양립이 이 영화의 바람이라면, 이 역시 어정쩡한 동거로 끝난다.

거두절미하고 <디스클로저 데이>를 일련의 비아냥처럼 80살 노감독의 뒤처진 감각의 산물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리 단언하고 말기에는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거장의 명성 때문은 아니다. 그저 결함이라고 치부하기에 괴이한 선택들을 이 영화는 서사의 주요한 동력으로 재차, 일견 당당히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하필이면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디스클로저 데이>의 ‘낡은’ 결단들을 낳게 한 것일까. 단순해 보이는 영화의 장면들과 구조에는 의아하게 삐거덕거리는 지점들이 자주 보인다. 무언가 할 말이 좀더 남아 있을 것이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미지와의 조우>(1977), <E.T.>(1982), <우주전쟁>(2004) 등과 비견되며 평가절하되곤 하지만, 실은 이들과 다른 층위에 놓인 세계라고 말해야 옳다. 이 영화에서 서사 후반에야 설명되는 외계 생명체는 오랜 시간 지구의 권력자들이 학대와 착취로 인류 역사에 축적해온 내부의 은밀한 정보다. 그것은 더이상 기이한 현상이 아니다. 지구의 문을 바깥으로 무한히 열어내며 경외심과 두려움을 불러오는 미지의 존재와는 애초 성질이 다른 셈이다. 무해한 외계인과 지구의 어린이를 태운 자전거가 하늘을 날아 달을 가로지르는 동화적인 운동(<E.T.>), 불가해한 외계 생명체의 기운과 교신하는 신비로운 선율(<미지와의 조우>), 정체불명의 외계 존재가 드리우고 배설하고 전시한 총체화할 수 없는 섬뜩한 이미지(<우주전쟁>), 그러니까 영화 속 평범한 인물들이나 관람자를 홀리는 스필버그식 외계인 장르의 미학적 설계가 애초 힘차게 작동할 수 없는 전제 위에 <디스클로저 데이>는 자리한다. 스필버그가 유사 다큐멘터리적인 질감으로 재현한 자료 영상 속 외계의 존재는 서사의 토대이자 추진력이지만, 앞선 작품들에서처럼 인간 세계와 접속하거나 충돌하며 허구적 활동력을 발휘하지 않고, 지구인의 폭력성을 증언하는 기록으로서 저장장치 속에 보존되어 혹은 갇혀 인간의 액션을 기다린다. SF로서 <디스클로저 데이>의 초현실적인 활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에 연유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활동은 오직 인간의 것이다. 그 움직임이 인간의 도덕성을 가르는 결정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여기에는 좀더 살펴볼 면모가 있다.

<디스클로저 데이>

이상하게 머뭇댄다는 인상을 안기는 여러 장면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대목이 있다. 병원을 탈출한 마거릿(에밀리 블런트)이 남자 친구의 차에 올라 휴고(콜먼 도밍고)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장면에서다. 마거릿은 휴고의 지시에 따라 창밖으로 던져버린 전화기를 바퀴로 완전히 부수기 위해 차를 후진하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차바퀴는 목표물을 빗나간다. 결국 마거릿이 차에서 내려 비에 쫄딱 젖어가며 바퀴 동선에 맞춰 직접 옮긴 뒤에야 핸드폰은 앞바퀴와 뒷바퀴에 재차 짓이겨진다. 이 장면은 ‘마거릿이 자신에게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후 추적을 피해 전화기를 폐기한다’ 정도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지만, 그 구성이 아무래도 장황하다. 고작 핸드폰 하나 박살내려고 영화가 밟아가는 단계들과 지연한 시간도 의문스럽기만 하다. 그저 우스꽝스럽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대목의 주안점을 휴대전화기가 아니라 그것을 바퀴 바로 밑으로 이동하는 마거릿의 ‘손’으로, 영화가 굳이 마거릿을 차에서 내리게 해서 움직이게 하는 그 손으로 돌린다면, 다른 생각의 여지가 열린다. 이 대목에서 스필버그가 믿는 것은 자동차라는 능숙하고 편리한 기계가 아니라 그것의 둔탁함을 보완하는 손이다. 잉여의 동작으로 늘어지는 이 장면에는 예상외로 <디스클로저 데이>가 희구하는 세계의 운동 원리가 새겨져 있다.

돌이켜보면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서사 내적으로 더없이 진지해도 관람자에게 종종 헛웃음을 유발하는 순간들은 대개 이 손의 힘을 과신하는 장면들에서 벌어진다. 뭐든지 손으로 접촉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비밀조직 워덱스와 내부고발자들 모두가 사수하려는 기기는 타인과 정신적으로 접속하게 하고 차단된 전기를 다시 들어오게 하며 존재를 비가시적으로 만들어주기까지 하는 만능의 장치지만, 버튼 하나만 살짝 만져도 기능이 즉각 돌아가는 최첨단 시대에 굳이 인간이 손으로, 그것도 종종 고통을 무릅쓰며 쥐어야만 가동된다. 기기를 쥔 노아(콜린 퍼스)와 십자가, 나중에는 식칼을 쥔 제인(이브 휴슨)이 힘을 겨루는 장면은 그것이 과장하는 장엄함과 긴박감에 비해 둘의 구도와 각각의 내용이 지극히 단선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손의 대결이라는 점만큼은 주목할 만하다.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손은 장면의 궁지를 돌파하는 실질적 동력만이 아니라, 스필버그가 영화의 최종 메시지라고 밝힌 공감과 연대의 표상이기도 하다. 외계인에게 납치된 어린 마거릿과 다니엘이 처음 조우한 순간과 이들이 성인이 되어 다시 마주한 장면에서 영화는 둘이 맞잡은 손을 반복해서 공들여 비춘다. 이 손의 직접성, 행동력, 예민함을 스필버그는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마지막 보루처럼 형상화한다. 마거릿이 호들갑스럽게 공포를 표출하는 때는 외계인과 대면하거나 워덱스 요원들에게서 도망치는 순간이 아니라 추격전에서 살아남아 손에 감각이 사라졌다고 울부짖는 장면에서다. 한편 제인이 노아에게 조종당해 다니엘(조시 오코너)을 해칠까 우려하는 대목에서도 그는 자신의 손을 침대에 묶어 무력화하는 방법을 시도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움직이는 손의 영향력을 이 영화는 지대하게 여긴다.

<디스클로저 데이>

<디스클로저 데이>의 추격전, 특히 다니엘과 제인의 차가 워덱스 요원들에게 쫓기는 장면을 상기해보자. 휘황찬란한 기술력과 기발한 곡예를 뽐내는 자동차 추격 장면에 익숙해진 우리의 감각에는 이 대목의 리듬과 설계가 그리 매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요원들의 차량이 다니엘에게 길을 터주며 일부러 느리게 따라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라는 불만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이 추격 장면의 요지는 다니엘의 차가 절벽 앞에서 가까스로 멈춘 찰나에야 고개를 든다. 추격전 도중 자동차가 벼랑 끝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 역시 익숙한 설정이지만, 스필버그가 다니엘의 차를 그 상황에 내몬 이유는 따로 있다. 차에서 빠져나온 제인이 차로 다시 돌아가 커다란 돌로 액셀을 누르는 것이다. 텅 빈 차는 그대로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뒤늦게 도착한 요원들은 두 사람이 차와 함께 추락했다고 인지한다. 이 추격 장면에서도 영화가 몰두하는 건 기계의 자동성이 아니라 손의 주도적 기지다. 그 사실을 부각하는 화면구성이 촌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스필버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말해보자면, <디스클로저 데이>는 추격전 시퀀스의 장르적인 기예를 화려하게 갱신하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을 둔 것 같지 않다.

물론 ‘손’이라는 세부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가 손의 존재감을 환기하는 장면들을 통해 주의를 기울이는 바가 아날로그적 힘의 가능성이라고 가정해볼 수는 있다. 기술의 위용, 속도감, 간편함에 휘발되지 않는 아날로그적인 사고방식, 육체성, 정서, 관계, 그리고 그런 가치들로 이어진 선(線). 그 선은 앞서 언급했듯 인류를 분열에서 구해내는 스필버그식 ‘공감’이고, 궁극적으로는 도덕의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디스클로저 데이>의 이러한 방향성이 결국 감상주의적 휴머니즘의 발로에 불과하다는 견해에도 일리는 있으나, 이 영화에서 그것이 매끄럽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간단히 답하기는 망설여진다. 우선 스필버그의 지난 작품을 경유할 필요가 있겠다. <디스클로저 데이>가 참조하는 영화, 친연성을 느끼는 세계는 외계인에 감응하는 <E.T.>나 <미지와의 조우>보다는 1970년대 미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언론계가 일으킨 파장을 다룬 <더 포스트>(2017)에 더 가까워 보인다. 단지 두 영화가 ‘알 권리’의 화두를 내세우고 국가 기밀의 폭로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다룬다는 내용의 유사점 때문만은 아니다.

<더 포스트>에서 30여년간 은폐되어온 국가 기밀이 유출되어 신문 지상에 온전히 밝혀지기까지, 모든 과정은 아날로그적인 경로를 따른다. 이를테면 도입부에서 익명의 청년은 서사의 도화선이 될 기밀 서류를 삼엄한 경계를 뚫고 어느 호텔 방 앞에서 받아 들고서 <뉴욕 타임스> 편집국 앞까지 걸어가 기자에게 직접 건넨다. 타사의 특종 냄새를 맡은 <워싱턴포스트>의 편집국장은 마침 눈에 띈 인턴에게 기차를 타고 <뉴욕타임스>로 가서 다음날 1면에 실릴 기사 내용을 몰래 알아오라는 지령을 내리고 무명의 기자는 정말 그렇게 한다. 스필버그는 그 과정의 동선을 요약하지 않고 펼쳐 찍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비효율적인 행로가 마치 이 영화의 단단한 뿌리처럼 유려한 리듬의 서막처럼 다가온다면, 부산한 걸음과 무거운 책임을 진 민첩한 손이야말로 정보의 전달에서 취재로, 나아가 폭로로 이어지는 구조의 믿음직한 토대임을 설득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그러한 태도와 미학은 많은 이들이 찬탄하는 후반부 전화 시퀀스에서 정점을 이룬다. <워싱턴포스트>의 사장 케이(메릴 스트리프)와 신문사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수화기를 들고 기사 공개 여부를 둘러싼 의견을 교환하는 치열한 국면은 신기하게도 부드러운 운동으로 접합된다. 인물들을 한데 모일 수 없게 하는 구식 전화기의 한정된 선이 오히려 숏들을 유동적으로 잇는 긴밀한 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중요한 건 여러 개의 선이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는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더 포스트>의 손들이 체념하지 않고 일군 아날로그적인 연결선, 스필버그는 그것이야말로 정부의 폭력과 기만에 맞서 당대 사회가 지켜낸 최선의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디스클로저 데이>가 보존하려는 아날로그적 덕목과 지향하는 세계의 역학은 <더 포스트>를 바라본다. 그러나 <디스클로저 데이>의 근미래 혹은 현재는 <더 포스트>의 1970년대가 아니다. 단적으로 <디스클로저 데이>에는 <더 포스트>에는 없는 컴퓨터와 핸드폰과 외계인과 마법의 기기가 있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초현실적인 존재와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이 불러온 환경적 조건이나 장르적 비약을 이야기 축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아날로그적 태도로 대한다. 그 괴리가 이 영화에서 스필버그가 고수하는 감수성을 향수보다는 분열에 더 가까워 보이게 만드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더 포스트>의 근면하고 선한 ‘손’과 ‘선’을 자극하며 활성화하던 반대급부, 명백한 안타고니스트가 <디스클로저 데이>에는 모호하다. 요컨대 <더 포스트>는 백악관의 닉슨을 영화 속 인물들의 연결망에서 배제하듯 그의 비열한 목소리만을 롱숏 안에 고립시킴으로써 일시적일지언정 ‘우리들’이 세워낸, 그가 감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숏의 연쇄를 자축한다. 반면, <디스클로저 데이>는 쫓는 집단과 쫓기는 이들의 구도로 진행됨에도 적의 성격을 명확히 판단하기 애매하다. 워덱스의 수장인 노아는 애초 다니엘과 마거릿의 행보를 막을 의지가 없었던 것처럼 결정적인 국면마다 그들의 행동을 내버려두고, 무기력한 부하들은 몰려다닐 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뉴스룸에서 시종일관 들려오는 북한과 미국과 러시아에 대한 뉴스 속보는 누구도 실체를 궁금해하지 않는 시대의 배경음처럼 흐른다. 이 영화가 트럼프 재집권하의 미국, 전쟁의 카오스에 빠진 동시대 세계 정세를 의식한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최소의 도덕, 최소의 시스템마저 무너진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디스클로저 데이>

<디스클로저 데이>는 <더 포스트>가 닉슨의 장면을 설계한 것처럼 적을 지목해 하나의 숏 안에 밀어넣는 방식으로 뚜렷한 전선을 구축하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는 안타고니스트만큼이나 프로타고니스트의 성격도 흐릿하긴 마찬가지다. 우선 이들에게는 그간 스필버그 인물들의 정체성을 이루던 정박지, 가족이 없다. 마거릿이 몇 차례 상기하던 파킨슨병에 걸린 아버지는 외계인보다 더 깊은 트라우마의 대상일 뿐이고, 다니엘은 아예 가족을 언급하지 않으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단 하나의 가족 ‘집’은 세트장이다. 이는 스필버그의 세계에 일어난 생각보다 큰 변화일지도 모른다. 가족주의의 환상과 거리가 먼 <우주전쟁>조차 가족에서 가족으로 이동하는 여정이고, <더 포스트>도 가업을 이으려는 딸의 서사이자, 두 가족의 장소를 오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줄곧 서사의 동력, 행동의 이유로 작용해왔다. 다니엘과 마거릿의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 인물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지 못하고, 자신이 놓인 맥락과 방향을 알지 못한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강력한 동기 대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초자연적 힘이다.

이 힘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무지한 인물들이 ‘내가 왜 이러지?’라는 자문을 되풀이하면서도 행동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면들을 개연성 없이도 이어 붙이는 절대적인 힘. 영화는 그 힘에 인간의 신념, 정의, 도덕률, 타자성, 종교적 계율, 신성 등을 뭉뚱그려 그것을 숭고하게 부풀리면서도 편의적으로 사용한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외계인을 경탄을 일으키는 완전한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의 부패를 증언하고 도덕을 시험하는, 이미 오래전 내부의 일부가 된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전작들보다 진취적인 설정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화두를 바깥의 섬광에 기댄 구원의 문제로 풀어간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이다. <디스클로저 데이>의 초자연적인 힘은 외계인이 인류와 소통하기 위해 어린 마거릿과 다니엘에게 주입한 능력으로 전해지지만, 정작 영화는 그 힘을 운용하는 일 앞에서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엔딩을 이해할 길이 없다. 다니엘과 마거릿을 지배하는 초능력의 근원이자, 결말에야 처음으로 현재의 실물로 출현한 외계인이 두 사람에게 들려주는 말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뉴스 중계 카메라 앞으로 돌아간 마거릿이 “여러분”이라고 입을 여는 찰나에서 영화는 끝나버린다. 외계인의 어떤 말도 이미 늦었다는 것일까. 인류는 아직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스필버그 역시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일까. 그 말은 여전히 언어화하지 않은 채 남겨둬야 한다는 것일까.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든, 이것이 열린 결말 같은 것이 아니라 불충분한 엔딩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전 세계로 송출된 외계인 영상들을 익명의 군중들이 핸드폰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확인되지 않은 뉴스 앞에서 울먹이던 앵커는 시청자들을 향해 말한다. “지금 이 영상을 목도하고 있는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곳곳에 흩어져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군중들의 몽타주 시퀀스는 <더 포스트>에서 여러 개의 전화선으로 교류하며 수평적으로 모이던 숏들과 다르다. 스마트폰을 분주히 터치하는 군중의 손은 <디스클로저 데이>의 앞선 장면들에서 스필버그가 부여잡던 인물들의 아날로그적인 손과 다르다. 추격전에서 수차례 버려지던 휴대전화가 이제 사람들의 손마다 들려 화면을 채운다. 무한정한 전파는 ‘연결’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우주전쟁> 속 재난의 트라우마를 망각하지 못한 채로 <미지와의 조우>와 <E.T.>의 감수성을 여전히 품고서 <더 포스트>의 도덕을 꿈꾸는 노감독의 분열. <디스클로저 데이>는 그 분열을 내내 그대로 드러내는 영화다. 이 영화의 떠들썩하지만, 허무한 미완의 결말에서 스필버그는 그 실패를 자인하는 것 같다. <디스클로저 데이>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걸작으로 분류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 각인된 분열과 실패의 흔적을 함부로 폄하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