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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의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잔

저희 집 찬장에는 컵 코너가 있습니다. 자주 쓰는 컵을 따로 빼놓은 것인데요, 커피나 차를 마시기에 적합한 크림색의 머그잔 몇개, 물을 마실 때 쓰는 한손에 쏙 들어오는 유리잔 두개 정도가 놓여 있습니다. 같은 브랜드의 컵 세트를 구비하는 정도로 대단하게 꾸린 건 아니고, 각자 다른 시기에 구매하거나 선물받은 것들입니다. 다양한 혈통을 가진 아이들이지만 어쩐지 비슷한 크기와 색깔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집에서는 한팀입니다.

그중에는 빵 가게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머그잔도 있습니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있던 일본식 빵 가게의 2주년을 축하하는 컵이었습니다. 저기, 2주년 정도인데 기념품을 만들 정도의 축하를 해도 괜찮아? 같은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온 사장님이 한국에 자신의 가게로 정착하게 된 2년은 그에게 단순한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간이었겠죠. 이 가게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 컵을 깨트리는 바람에 처분하게 되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랍게도 플리마켓에서 똑같은 컵을 발견하고는 다시 구매했습니다. 2주년을 축하하는 글씨는 오랜 세월이 지나 약간 벗겨져 있었고요. 지금 돌아보니 사장님이 2주년을 축하했던 건 멋진 일이었네요.

요즘 같은 날씨엔 역시 따뜻한 음료를 마시기 곤란해져서 머그잔 군단은 임시 휴무에 들어갔습니다. 가끔 저울 위에서 파스타 면을 계량할 때 화병 노릇을 하는 정도의 수모만 겪고 있습니다. 지금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팀은 역시나 유리잔 친구들입니다. 예전에는 컵은 예쁘면 그만이지 사용하는 기분 같은 것에 대단하게 예민한 편은 아니었기에 큰 자각 없이 머그잔에 물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누가 불투명한 잔에 물을 마시는 것은 기분 나빠, 같은 말을 하는 걸 듣고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컴컴한 머그잔 속에 얼굴을 넣으며 무슨 색깔일지 모를 물을 마시는 것이 누군가는 정말 내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요. 이제 저도 물을 마실 때는 투명한 컵만을 이용하게 되었네요. 제가 물을 마시는 용도로 사용하는 잔은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다이소의 기본 작은 유리잔과 그와 거의 비슷한 크기인데 미묘하게 울퉁불퉁한 잔입니다. 소박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모습의 작은 크기입니다.

잔을 고를 때면 용량과 디자인, 색깔이나 얇기, 심지어 추억과 의미를 보고 선택하지만, 실제로 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입술이 닿는 부분 아닐까요? 예쁜 컵에 마시니 더 맛있다는 농담은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습니다. 입술은 촉각에 매우 민감해서 잔의 모양에 따라 음료의 차가움과 흐르는 방식도 다르게 느끼거든요. 이렇게 몸에 닿는 것이 중요한데도 사기 전까지 체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잔은 속옷과 비슷한 지점마저 있습니다. 조금 변태 같나요? 하지만 여기까지도 말할게요. 공예에서는 잔의 가장자리를 입술(lip)이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 잔과 키스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득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막막해질 때면 저는 그 카페에 가고 싶어집니다. 이 카페로 말할 것 같으면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지 않고, 주로 연주곡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그야말로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곳이랍니다. 단단하고 따뜻한 느낌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는 단아함마저 느껴집니다. 거기서는 아슬할 정도로 얇은 유리잔을 사용하는데, 너무 가늘어서 펜으로 슥 그은 선처럼 보입니다. 마치 씹으면 씹힐 것만 같습니다. 차가운 물이나 음료가 담긴 그 잔의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면 어쩐지 위안을 받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주문을 하고 앉아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사장님이 다가와 물 한잔 드릴까요, 하고 물어보십니다. 부탁드리면 정수기 두레박 잔(초소형 일회용 종이컵)만큼 작고 약한 유리잔에 반듯한 네모 얼음을 딱 하나 넣어주시곤 하지요.

얇은 잔은 깨지기 쉽고 그래서 위험합니다. 악력을 사용하면 부술 수도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이 유리잔을 마주할 때면 저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숨을 고르게 됩니다. 인간은 안전한 물건만 사용하지는 않지요. 만년필 펜촉이나 요리사의 칼, 오래된 클래식 악기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정도로 연약한 유리잔을 만나게 되면 제 쪽에서도 그에 걸맞은 집중을 해주어야 합니다. 입술이 천천히 그 잔에 닿으면 차갑고 신선한 물이 흘러듭니다. 잔을 잡는 몸짓의 조심스러움 때문에 잔은 더욱 귀한 물건이 되고, 그를 귀하게 다루면서 저도 덩달아 차분해집니다. 그럴 때면 황당하게도 잠깐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찾아옵니다. 세상에 그 행위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완전한 느낌이랄까요. 저는 그저 정갈한 유리잔의 태도를 따라 했을 뿐인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