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보셨어요? 어떻게 보셨어요?” 한주 내내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호프>이야기로 운을 뗐다.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식의 미지근한 대답은 거의 없었다. 좋았다 아니면 싫었다는 의견을 이렇게 자신 있게 내뱉게 만드는 한국영화가 최근 10년 내에 있었나 싶다. 오프라인에서는 그나마 취향과 평가의 차이를 구분하는 정도의 선은 지키면서 의견을 밝히는데, 온라인에서는 다른 차원으로 시끄럽다. 졸작을 좋아할 수 있고, 걸작도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취향을 식견의 문제로 연결하고 타인의 판단을 잘못된 것으로 매도할 때 문제는 다른 영역으로 접어든다. <호프>를 호평한 평론가의 ‘판단’이 온갖 오해와 억측의 근거가 되는 순간, 그 자리엔 논쟁과 담론 따윈 없다. 오직 혐오에 기반한 폭력과 배설이 있을 뿐이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호프>를 긍정하지 않는 쪽이다. 이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나 장면의 부분적 성취, 롤러코스터 같은 오락적인 재미를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심지어 영화가 수습할 생각 없이 마구 흩뿌려놓은 조각들을 들고, n차 관람하며 각자의 해석 혹은 망상에 빠져드는 놀이는 꽤 흥미로워 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그 대상이 <호프>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관객 각자의 해석이 영화를 완성하는 주체가 되는 건 대부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감상의 경로이긴 하지만 <호프>의 경우 그 가능성을 악용하는, 그 과정에서 악취를 풍길 수 있는 영화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소 서두른 탓에 거칠고 얄팍한 글이었지만 지난주 그 근거에 대한 생각을 비평 특집(<씨네21> 1566호)에 남겼다. 애초에 아무것도 책임질 생각 없는 공백들은 의미의 빈자리가 아니라 (혐오를 양산하는 맹목적 공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배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거기 존재한 적 없는’ 의미를 구태여 부여하는 순간 거대한 구렁텅이로 발을 디디는 꼴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나홍진 감독 스스로 증언했듯 <호프>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물리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오락, 그 한점으로 수렴되는 영화다. 보이는 대로 즐기기엔 충분할 정도의 에너지. 장면의 경이와 쾌감들은 그걸로 족하다. 다만 그토록 압도했던 장면들은 놀랄 만큼 빠르게 휘발되어 떠오르지 않는데, 해술 아저씨(임현식)가 말로 설명한 설사에 대한 묘사는 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점점 더 선명해져 냄새가 날 지경이다. 그래서, 비어 있는 놀이터에서 스스로 의미의 구덩이를 만들어 허우적거리지 않고 빠져나오기로 했다. 노파심에 강조하지만 해석을 하려 해선 안된다는 게 아니다. 굳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둘 사이엔 메울 수 없을 만큼 큰 간극이 있다. 실은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호프>에 관한 여러 평가와 대화, GV와 글들을 계속 찾아보고 있다. 아뿔싸.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역시나 이번에도 이미 함정에 빠져버린 건가.
다큐멘터리 <뉴요커, 100년의 이야기>에 나오는 영화비평가 리처드 브로디는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데 2년이 걸리고, 보는 데는 두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깨부수는 데는 2분이 걸리죠. 아니 트위터에서는 2초예요. 그래서 저는 무조건 예의를 갖추려고 해요.” 지금 나는 이 들끓는 열기 혹은 위험한 광기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중이다. 아마도 영화가 손익분기를 무사히 넘기고 의미 있는 정리를 할 때 즈음이면 제대로 숙성된 비평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곡성> 때는 꽤 많은 호평들이 먼저 쏟아진 뒤 아쉬움을 지적하는 글이 뒤늦게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반대의 흐름이 보인다. 쏟아지는 불호의 목소리 속에 기어이 이 영화의 결기와 괴이한 위치를 설명하려는 말들이 꿈틀거린다.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기 어려워진 시대, 내 편협한 세계를 깨부숴 설득하고 굴복시켜줄 글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 미래가 설레는 건지 두려운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