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문법>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가 누리는 과거의 예술 작품 상당수는 이런 불건전한 악취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공포물은 특히 ‘불건전한 악취미’의 신세를 지는 장르다. 사랑과 공포, 환상과 현실, 역사와 비사, 악몽과 비밀의 무의식적 역동을 조장해 재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는 독서 혹은 상영 당시의 경험과 밀접히 연관되기 마련이며, 때로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공포의 공식(대표적으로는 <링>의 사다코 스타일로 움직이는 동아시아의 유령들)이 생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여전히 유효한 공포물도 있다. 영화평론가이자 작가인 듀나가 공포라는 장르를 다룬 논픽션 <공포의 문법>을 썼다.
영화와 드라마를 다루는 듀나의 글이 흔히 그렇듯 오래된 작품들이 꽤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그리고 (놀랍지 않게도) ‘우리는 무엇을 왜 두려워하는가’만큼이나 ‘우리는 무엇을 왜 재밌어하는가’를 다룬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인, 스티븐 킹이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싫어하는 것과 관련한 글은 스티븐 킹의 인생부터 공포라는 장르까지를 아우르는 유머러스한 글이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가를 듣는 여러 작품에도 해당될 문장 하나. “싫어하려면 인상이 남을 정도 이상은 좋아야 하죠. 그리고 큐브릭의 <샤이닝>은 정말로 잊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평생 동안 싫어할 수 있을 만큼 잘 만들었어요.” 지극히 자기반영적이었던 소설 <샤이닝>이 지극히 장르적인(결국 실패했지만 가족을 위해 노력했던 아버지를 그저 두려운 폭력적인 가부장으로 바꾸고 호텔 건물 자체를 유령 그 자체로 변신시킨) 영화가 되면서 스티븐 킹은 영화를 좋아할 수 없게 되었을지라도 영화는 미학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물이 되었다는 것. 이 글에 뒤따르는 ‘귀신 들린 집’이라는 서브 장르에 대한 고찰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쳐서는 안된다. 러브크래프트, <에일리언> 시리즈, 그리고 ‘파이널 걸’이라는 키워드까지 읽고 나서 후반부의 ‘남은 것들에 대하여’를 읽는 일은 각별하다. 한 장르의 팬이 된다는 일과 그 팬을 상대하는 창작자가 된다는 일이 모니터 밖의 현실과 그 현실을 담아낸 모니터 안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