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깊은 심도(深度)다. 이 영화 안의 깊은 심도는 숨기는 공포가 아닌, 드러낸 풍경 안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단순히 더 많은 정보를 보여주기 위한 촬영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모든 것이 보이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 이 역설이 <호프>의 카메라가 가진 태도다.
촬영 현장에는 포커스풀러가 보는 심도표가 있다. 렌즈의 조리개와 피사체와의 거리로 초점이 들어오는 범위를 미리 확인해볼 수 있는 안내서 같은 것이다. 촬영용 모니터가 없던 시절,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초점의 범위를 미리 가늠하는 척도였다. 깊은 심도 촬영에서는 모든 것이 초점 안에 들어오지만, 역설적으로 더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광각렌즈의 높은 조리개로 심도가 깊을 때 초점 대상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진다. 심도표에 포커스 범위가 나와도 초점거리의 선택은 매번 고민이 된다. 초점의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이 선택한 결과이다. <호프>의 카메라 심도 안에서 나홍진 감독의 심도(心度)를 읽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얕은 심도는 선택과 집중의 미학이다. 초점이 맞은 대상은 중요하고, 흐려진 배경은 주변화된다. 카메라는 무엇을 볼 것인지 선택하고, 관객의 시선을 특정한 곳으로 유도한다. 하지만 깊은 심도에서는 전경과 중경, 후경이 모두 선명하다. 하나의 대상만 특권화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모든 것이 보인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레임 안에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미지의 존재가 함께 놓여 있지만 그 관계는 설명되지 않는다. 깊은 심도는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도 무엇도 결정하지 않는 공간이 된다. 모든 공간이 선명하게 보이는 깊은 심도는 역설적으로 ‘알 수 없는 마음’을 극대화하는 도구가 된다. 카메라는 끝내 타인의 내면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다. 하지만 카메라가 렌즈의 심도를 미세하게 밀고 당기며 치열하게 초점을 맞추려 애쓰는 과정 그 자체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기어이 헤아려보려는 감독의 가장 정중하고도 깊은 몸짓이다. <호프>의 깊은 심도 안에는 감독이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의 깊이가 있다.
깊은 심도 안에서 모든 것은 보인다. 보인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다르다. 근래 영화는 얕은 심도를 통해 주인공을 강조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래서 모든 것이 선명한 깊은 심도는 오히려 주인공의 존재감을 약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가 선택한 깊은 심도 롱숏은 심도로 세상을 어떻게 보여주겠다는 감독의 선언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영화의 초반 숏들은 20mm 내외의 광각렌즈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 초반 범석(황정민)이 차에서 내리는 장면에서 그에게 카메라가 다가가 포착하는 버스트숏은 인물에게 근접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각렌즈는 공간을 확장하지만, 이 컷처럼 인물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면 오히려 인물을 프레임 안에 가둔다. 카메라는 화면 속 범석의 얼굴을 밀착하여 그를 붙잡아두지만, 동시에 그의 뒤로 깊은 심도로 펼쳐진 선명한 풍경은 관객의 시선을 인물에서 세계로 확장한다. 인물은 갇혀 있고, 세계는 열려 있다. 이 영화의 중요한 형식적 대비다. 프레임 안의 인간은 같은 프레임 안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도의 선택은 어떤 대상에 초점을 맞추며 프레임 안 또 다른 위계를 형성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깊은 심도는 주인공과 배경 사이에 위계를 두지 않는다. 무엇 하나 소외시키지 않고 모든 대상을 선명하게 들여다보겠다는 이 선택은,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윤리적 선언과도 같다. 모든 대상에 초점이 선명하게 맞고 프레임의 화각이 넓을 때, 물리적 컷의 길이도 늘어나며 대상들을 더 잘 들여다보도록 안내한다.
<호프>의 초반 숏이 보여준 구성과 편집은 일반적인 영화와 다르다. 사이즈의 차이로 컷을 연결하는 것과 달리 풀숏에서 풀숏으로 컷을 연결한다. 인물의 가장 가까운 숏도 미디엄 사이즈 정도에 머문다. 깊은 심도와 상대적으로 길게 붙은 개별 컷의 길이는 모든 공간과 대상을 들여다보게 하며 인간과 비인간 타자를 프레임 안으로 불러들인다. 카메라는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비인간적 타자를 프레임 안으로 불러온다.
성기(조인성)의 가장 타이트한 클로즈업은 외계인과 조우한 순간에 나온다. 깊은 심도와 와이드렌즈로 가장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담아내며, 새로운 존재의 등장을 외계인의 액션숏이 아닌 범석의 리액션숏으로 드러낸다. 카메라가 와이드렌즈로, 인간과 인간 사이 거리에서는 다가서기 어려운 거리까지, 카메라가 인물에게 다가가 포착한다. 낯선 존재를 보는 인간의 얼굴로 타자를 표현한다. 공포는 괴물의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 마주하는 순간 발생한다. 깊은 심도 안에 존재하지만 포착되지 않던 존재 중 하나로 외계인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미 이 세계 안에 있었지만 발견되지 않았던 존재다. 보이는 세계 안의 보이지 않는 타자로서 외계인을 괴물로 등장시킨다.
역사 안에 타자는 괴물로 등장해왔다. 괴물에 의해 망가진 농장 울타리 앞에서, 앞선 광각렌즈와 다른 망원렌즈로 촬영된 성기의 버스트숏이 등장한다. 와이드렌즈로 이어지던 이전의 숏들 속에서 상대적으로 망원렌즈로 촬영된 이 버스트숏은, 괴물로 받아들여지는 타자의 존재를 렌즈의 물리적 성질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어색함으로 감각하게 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익숙한 망원렌즈로 촬영된 인물 단독 숏이 이 영화에서는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이어지는 경찰차 안 범석의 와이드숏은 기괴한데도 오히려 이 세계 안에서는 편안하게 느껴진다. 익숙함을 어색하게 만들고, 낯섦을 익숙하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심도 안의 타자를 이 세계 안으로 편입시킨다. 이것은 렌즈의 물리적 성질만으로 만들어내는 타자성의 감각이다.
이 영화에는 깊은 심도로 교묘하게 낯설게 보이는 시점 컷이 있다. 외계인의 시점숏과, 외계인을 향해 쏘는 총알의 시점숏 컷들이다. 이런 숏의 등장은 성애(정호연)의 첫 등장 후 괴물과의 대결 사이에서 낯설게 들어오다가, 숲에서의 액션신에서는 더 극명하게 표현된다. 공간 안으로 빠르게 날아들어가는 이 시점숏들은 깊은 심도와 맞물려, 인간과 외계인의 시선이 같은 공간 안에서 교차하도록 만든다. 낯선 대상은 단순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낯선 시선과 함께 등장한다.
<호프>에는 대략 네번의 드론 숏이 나온다. 이 숏 다음에는 성기 무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처음 드론 숏은 산 너머 바다, 두 번째는 울창한 원시림 너머 높은 산, 세 번째는 산과 숲인데 좀더 낮은 지형이고, 네 번째는 다시 두 번째 풍경과 비슷한 울창한 숲이다. 초반에 보인 바에 따르면, 낮은 산을 낀 바다 마을 안쪽에 깊고 울창한 숲이 있고, 그 깊숙한 곳까지 마을이 확장된다. 이로써 마을이라는 공간의 경계도 상실된다. 드론 숏들은 영화 안에서 가장 넓은 화각과 깊은 심도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호프>에는 개연성의 문제만으로 접근해선 안된다. 시작부터 범석과 성기가 함께 등장하지만 둘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인물의 관계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상관관계 역시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 속 시간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다. 밤이 없으니 하루 동안 벌어진 일 같다. 그러나 계절은 일관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에서 계절은 늦가을 같아 보이지만, 후반에 사람들이 외계인에게 쫓기는 장면에서는 먼 산이 눈으로 덮여 있고, 도로 주변의 나무는 잎이 없는 한겨울의 풍경이다. 시대도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DMZ 인근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곳이 실제 한국의 DMZ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공간은 지리적 현실보다 하나의 감각으로 존재한다. 정체 모를 시간과 공간이 연결된다. 스텔라 경찰차, 카빈소총, 다이얼 공중전화, 경찰서 난로와 곤로 등의 소품과 미술은 서사를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띄워올린다. 과거인지 현재인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호프>의 공간은 설명되는 공간이 아니라 존재하는 공간이다.
<호프>가 흥미로운 이유는 강력한 장르적 목적을 계속 스스로 무너뜨린다는 점이다. 괴물영화라면 일반적으로 괴물의 정체를 찾고, 원인을 밝히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호프>는 계속 멈춘다. 이 멈춤을 통해 영화는 기존 장르의 목적 중심 서사에서 벗어난다. 감독의 전작 <추격자>와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하다. <추격자>는 목적의 영화다. 찾아야 하고, 잡아야 하고, 시간 안에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움직임은 긴장으로 연결된다. 긴장을 멈추면 안되기 때문에 배우들은 쉬지 않고 뛴다.
<호프>에서도 배우들은 쉬지 않고 달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멈추기 위해 달리는 듯하다. 목적을 향해 가던 서사가 스스로 자신의 방향성을 놓아버리는 순간은, 촬영의 층위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첫 자동차 액션신은 극단적 공포를 부르는 음악과 사운드, 괴물이 남긴 잔인한 파괴의 흔적으로 시작한다. 배우의 긴장감 넘치는 표정과 달리는 몸짓이 연속되지만, 이상하게도 긴장과 궁금증은 덜 느껴진다. 왜 기존의 추격영화와 다른 속도와 심도, 숏 구성, 컷의 길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좀처럼 액션과 추격의 긴박감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다시 질문하자,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잔인하고 폭력적인 상황과 파괴된 마을의 리얼리티는 공포와 궁금증을 자아내도록 세밀하게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범석의 경찰차가 어딘가에 부딪혀 멈추고 폐허가 된 마을을 만나는 순간, 영화는 괴물을 쫓는 인물의 움직임을 지나치게 친절하게 보여준다. 그가 총을 들고 괴물의 흔적을 살피며 마을 안을 뛰어가는 액션 장면에서 동선과 움직임의 인과를 다양한 컷으로 모두 설명한다. 여기서 범석의 질주 동선에는 생략이 없다. 인물의 동선은 인과를 붙잡고 가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등장은 인과가 없다. 갑작스럽게 인물들이 등장하고, 서로 긴박한 순간인데 쓸데없는 말들을 나누며 서사를 멈추게 한다. 가장 긴장되고 긴박한 순간 화장실 유머를 나눈다. 목적을 향해 가는 액션의 문법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 목적을 무너뜨린다.
긴장과 긴박을 멈추게 하는 유머가 서사를 비켜 나가는 도구로 쓰이듯, 이 영화에서 관객을 강력하게 이끄는 음악과 사운드도 어느 지점에서 혼란을 가중한다. 숲속에서 성기가 말을 타고 괴물에게 쫓긴다. 이때 쫓기는 성기와 쫓는 외계인을 교차로 반복해 정박자의 리듬으로 보여준다. 쫓기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쫓고 쫓기는 액션과 리액션 두컷에서 모두 동일하고 일정한 박자로 크게 들린다. 컷의 리듬과 말발굽 소리는 일정한데, 화면 안 말의 네발은 각자 따로 땅을 딛는다. 이때 이미지와 사운드가 어긋나며 불협화음을 낸다. 가장 긴박한 순간, 이번에는 사운드의 엇박자가 시퀀스의 긴장감을 방해한다.
외계인들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깊은 심도 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영화는 (마지막 시퀀스 이전까지) 이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인간이 타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타자를 보여주려 한다기보다, 타자를 불러오기 위해 인간 중심의 목적 서사를 흔든다. 설명 없이 등장한 외계인, 시공간의 구분 없음, 긴박한 순간 상황을 벗어난 대화가 유지되는 동안, 이 영화는 깊은 심도 안 모든 대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며 넓은 롱숏 안에 타자를 함께 놓아둔다. 그 안에서 타자는 괴물로도 인간으로도 붙잡히지 않은 채 올곧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 상태는 영화 마지막까지 지속되지 않는다. 영화 끝에 외계인의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던 말들이 번역된다. 이 무참한 폭력의 근원이 가족이라는 인간적 사회구조로 환원된다. 외계인의 행동은 자식의 죽음에 대한 원한이라는 인간적 감정으로 품어진다. 외계인의 존재를 인간의 감정으로 풀어내는 순간, 인과와 개연의 서사에서 벗어나 다른 서사를 향해 달려가던 영화는 다시 목적 지향의 기존 서사로 회귀한다. 타자는 인간의 감정 체계 안으로 환원되고, 영화는 자신이 열어놓았던 미지의 공간을 스스로 닫는다. 타자를 불러오려던 다른 서사의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호프>에서 인간들의 서사는 목적이 없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외계 함선이 침몰한 후, 범석과 성애가 경찰차를 타고 괴물에 쫓기다 차를 버리고 달린다. 두 사람은 뛴다. 범석은 “잘 모르겠어. 머릿속이 도대체 정리가 안돼”라고 말한다. 외계인을 피해 무조건 뛴다. 그들은 모른다. 목적이 없으니 도착 없이 뛴다. 기존 서사에서 달리기는 목적을 향한 운동이다. 하지만 여기서 달리기는 목적 없는 움직임이다. 도착지가 없는 인간의 몸. 서사의 인과적 목적지가 상실된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한계에 부딪힌 배우들의 물리적인 액션과 육체성뿐이다. 이 영화는 목적 없는 서사를 향해 서사가 아닌 배우의 액션으로 목적 없음의 서사를 완성한다. 이것이 <호프>가 끝내 붙잡는 순간이다. 마지막에 남는 <호프>의 진정한 미덕이다. 무엇을 향해 가는지, 왜 달리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 채 몸으로 움직인다. 심도는 감독 자신도 완전히 알 수 없는 마음을, 그럼에도 카메라와 인간의 몸을 통해 끝까지 표현하려는 태도다. 희망은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음 속에서도 계속 바라보고 움직이는 데서 온다.
<호프>는 완성된 장르영화라기보다, 장르가 가진 목적성을 끝까지 의심하는 영화다. 깊은 심도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인간과 타자는 함께 존재하지만 서로 완전히 닿지 않는다. 이 영화는 목적 중심의 서사를 멈추며 타자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하지만 외계인을 인간적 감정으로 환원하는 순간, 영화는 다시 익숙한 서사의 언어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지막 목적 없이 달리는 인간의 몸짓은 그 한계를 넘어선다.
나홍진의 심도(深度)는 결국 자신도 완전히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바라보는 태도다. 알 수 없지만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지만 다가가고 마지막에는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응답한다. <호프>의 가장 깊은 심도는 카메라의 깊이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시선이다. 모든 것을 보려 하지만 끝내 알 수 없는 마음. 그 알 수 없음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바라보는 태도. 그것이 나홍진의 심도(心度)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