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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어른은 그냥, 한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이 한번은 온다. 그때 누군가는 천근의 몸과 만근의 마음을 짊어지고 기어이 자리로 돌아가 그날 맡은 일을 한다. 왜? 일이니까. 시시하고 맥없는 대답 같지만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어른의 하루가 통째로 들어 있다. 어떤 일도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일은 누군가와 이어진 연결이고, 내가 서 있어야 할 위치이며, 끝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그 세 가지 무게를 한 단어 안에 욱여넣다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말이 바로 ‘그냥’이다.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끝이 보이지 않아도 그냥 한다. 체념한 듯 들리는 이 말이 실은 어른이 세상을 버티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라는 걸 매일 깨닫는 요즘이다. 공교롭게도 올여름 극장에 나란히 도착한 두 남자, 지친 거미와 길 잃은 왕이 약속이나 한 듯 그 ‘그냥’의 얼굴을 하고 있다.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의 피터 파커는 모든 것을 잃은 채 돌아온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후 4년, 사랑하는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우연히 마주친 네드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은 큰엄마 메이의 얼굴은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으로 남았다.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이 된 그는 낮이면 경찰과 손발을 맞춰 도시의 범죄자를 쓸어 담고, 밤이 오면 홀로 뉴욕의 거리를 지키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MJ의 곁을 하염없이 서성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왜 계속하는가. 답은 단순하다. 그게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일’이기 때문이다. 피터 파커는 자신을 잊은 이들과 여전히 연결되어 있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책임을 진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낡은 문장이, 홀로 남은 이의 입에서 이토록 쓸쓸하고 단단하게 들린 적이 없었다. 두통과 함께 몸이 낯설게 변해가는 밤을 지나 어느덧 어른이 된 스파이더맨은 오늘도 거미줄을 쏜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는 반대편에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놀런은 원작과 달리 오디세우스를 지혜의 오만에 빠진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에겐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업 대신 전쟁의 상처와 파괴의 고뇌가 가득하다. 놀런이 매료되었던 남자들, 브루스 웨인이나 오펜하이머가 그러했듯 빛나는 영광과 희생 뒤에 내면이 파괴되어가는 인물의 전형이다. 영웅적 남성성을 해체하는 놀런의 시도는 고전에서도, 아니 고전의 재해석이라 더욱 빛을 발한다. 여기엔 지루한 노동의 피로가 자리한다. 영화가 거듭 되뇌는 ‘제우스의 법’, 곧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오래된 계율은 결국 인간이 서로에게 진 빚, 그러니까 연결의 다른 이름이다. 페넬로페가 밤마다 짰다가 푸는 수의처럼, 놀런은 3분짜리 숏을 씨실과 날실로 엮어 172분의 시간을 짓는다. 삶이란 그렇게 그냥, 한올씩 이어 붙이는 노동인지도 모르겠다.

때론 스크린에서 빛나는 승리의 영광보다 피로한 얼굴의 그늘을 마주하는 게 더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대단한 각오나 거창한 사명이 아니라 다 그만두고 싶은 밤을 버티고, 다음날 자리로 돌아가 맡은 몫을 해내는 반복이다. ‘그냥’ ‘하는’ 것. 무심함을 대변하는 듯한 이 두 단어가 실은 세상을 조용히 지탱한다. 연결을 지키고, 위치를 잃지 않고, 책임을 내려놓지 않는 지루하고 지독한 의지. 오디세우스는 ‘노래’야말로 훗날 기억으로 남을 문명의 흔적이라 말했다. 한 사람의 삶을 끝내 증언하는 게 있다면 날마다 반복되는 ‘그냥’에 따르는 한숨 소리가 아닐까 싶다. 스파이더맨이 다시 거미줄을 쏘며 뉴욕을 지키고 오디세우스가 끝내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듯, 우리도 오늘 그냥 한다. 조용히. 차곡차곡. 각자의 노동요를 흥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