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비평] 조금만 더 기다려줘, 김예솔비 평론가의 <그림자 아이>

<그림자 아이>

<그림자 아이>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수안(박소이)은 3년 만에 눈을 뜬다. 3년 전, 수안은 언니인 수련(유나)과 함께 지붕 위에서 나란히 추락했다. 두 사람의 엄마인 금옥(임수정)에게는 3년 전 일이지만, 수안에게는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3년일까. 그런 사소한 점이 영화를 보는 내내 걸렸다. 이를테면 <너의 이름은.>에서 보디 체인지가 된 타키와 미츠하 사이에도 3년이라는 시간의 격차가 있었다. 그 3년 사이에 한 마을이 완전히 수몰되어버린다. 그러니까 3년이라는 시간은 애도가 시작되기 위해 슬픔이 충분히 잠복해야 하는 시간이자, 동일한 상실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이 실은 서로 다른 상실을 겪고 있음을 말하기 위한 서사의 조건인 셈이다.

한편, <그림자 아이>에서 3년은 아마도 수련보다 3살 어렸던 수안이 수련과 같은 나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절차였을 것이다. 수련의 시간이 멈추고, 수안의 시간이 3년 더 흐른다면, 두 사람의 나이는 같아질 수 있다. 의문스러운 것은 왜 수안이 혼수상태여야만 했냐는 점이다. 3년이 지났지만, 수안은 그저 한밤의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눈을 뜬다. 수련의 죽음과 수안의 기억 사이에는 단 하룻밤이라는 오차가 있다. 어쩌면 수안은 혼수상태였던 게 아니라 혼수상태라는 설정을 매개로 타임워프를 한 것일 수도 있다. 아오야마 고쇼의 단편애니메이션 <조금만 더 기다려줘>에서 주인공은 2살 연상인 여학생과의 연애에서 나이 차 때문에 괴로워하고, 2살을 따라잡기 위해 타임머신을 만든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그가 하늘에서 번쩍하고 나타난다. 누군가에게는 쏜살같은 시간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오랜 기다림이다. 단지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거스르는 규모의 지각변동을 필요로 한다는 설정은 세카이계의 오래된 주문이다. 너와 나의 문제를 세계의 종말 같은 운명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로 부풀리는 것, 혹은 왜곡하는 것.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캐릭터가 신체를 가진 기호적인 존재이면서,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애매한 존재라는 점이 비현실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고, 세카이계는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반투명’한 언어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쓰인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이 캐릭터들은 현실과 절반만 접해 있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림자 아이>에서 경유하는 것은 만화가 아니라 동화다. 동화에서 비현실성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동화가 동화로서 성립되기 위한 그 자체의 문법으로 받아들여진다. 다시 말해 동화에서는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동화의 언어는 속이 뻔히 비치는 투명한 언어다. 그런데 영화는 이 투명함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까? 영화가 완전히 동화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세카이계가 현실과 비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나란히 두는 데서 발생하는 이상한 가상성을 지닌 장르라면, 동화는 현실과 비현실의 자리를 전도시킨다. 이로 인해 동화는 언제나 말해지는 모든 것이 메타포처럼 읽힐 가능성을 띠고 있다. 한편 <그림자 아이>에서 그림자의 거래에 관한 동화가 단순히 영화의 메타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가 택한 전략은 동화를 보편적인 우화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특정적인 가족사로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동화를 믿는 것은 오히려 어른들이다. 이들은 동화를 믿고 두려워함으로써 수안과 수련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려 한다. 반면 아이들은 동화의 힘으로부터 달아나려 하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만일 동화가 아이들의 운명과 동일시된다면, 아이들의 세계는 어떤 비유적이고 공상적인 세계로 주변화될 것이다. 반대로 동화 밖에서 자신의 운명을 구하려는 아이들은 쉽사리 현실의 주인이 된다. 그 현실이 아무리 왜곡되었을지라도 말이다.

유은정 감독은 전작인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도 정해져 있는 이야기의 결말을 거스르려는 사람의 분투를 다룬다. 어느 날 습격을 당해 혼수상태가 된 혜정(한해인)은 사람들이 보거나 만지지 못하는 유령이 되어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여기서 ‘유령’이라고 한 것은 비유가 아니라, 극 중에서 혜정이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혜정은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한 아이를 만난 뒤 자신을 유령으로 정체화한다. 어떻게 보면 혜정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세계에 도착한 것이다. 유령은 깨닫는 존재다. 깨달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유령은 스스로를 메타화해서 바라보는 존재,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죽음을 망각한 도플갱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도플갱어가 서로 마주할 수 없다는 금기 주변을 배회한다. 한편 이 영화에서 도플갱어는 혜정과 혜정의 유령이 아니라, 혜정과 효연(전소니)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혜정의 룸메이트의 동생인 효연은 500만원이 없어 사채를 썼고, 그 빚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신체포기각서를 쓰는 데 이른다. 자신이 살기 위해 대부업자를 살해한 효연은 혜정을 찌른 범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효연이 유령의 자취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혜정이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별개로 효연도 시간을 거슬렀을지도 모른다. 다른 버전의 현실에서 신체포기각서를 쓴 효연은 죽었고, 그 또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유령이 되어 시간을 되돌린 것이다. 이런 의혹을 가진 건 이 영화가 혜정이 죽은 결말과 혜정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결말 두 가지를 모두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혜정과 효연은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서로를 죽여서만 살 수 있는 도플갱어적 관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한 인물의 성장이라는 드라마 이면에 서늘한 괴담의 규칙을 내재하고 있는, 그야말로 도플갱어적인 긴장을 지닌 영화다.

<그림자 아이>

한편 <그림자 아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도플갱어의 규칙을 영화의 전면적인 줄거리로 삼는다. 금옥 가족의 여자들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가 있는데, 그 저주는 똑같이 생긴 아이를 찾아 죽이지 않으면 그 집안의 아이가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금옥의 아버지는 금옥을 살리기 위해 금옥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찾아 집 마당에 묻는다. 이런 잔혹한 과거가 있는 집에서 저주가 싹트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수련이 집 마당으로 투신한 것은 그 저주의 연쇄를 끊기 위함이다. 영화에서 수안과 수련이 함께 읽고 있던 동화의 내용처럼, 아이들은 그림자와 거래를 하여 둘 중 하나의 몸을 내어준 것이다. 수련의 몸은 그림자가 거두어갔다. 적어도 어른들이 믿는 전설에 의하면 저주는 여기서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수안이 수련의 얼굴을 한 재인을 만나게 되고, 수안에게 다시 그림자가 찾아온다. 그림자와 실랑이를 벌인 뒤, 이번에는 재인의 얼굴이 수안의 얼굴처럼 변해버린다. 도플갱어의 저주가 수련에게서 수안에게로 옮겨온 것일까.

그런데 수안의 얼굴로 변한 재인의 얼굴이 어딘가 어색하고 비현실적이다. 도플갱어가 된 수안과 재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의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수안을 연기한 박소이 배우가 수안과 재인을 함께 연기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러나 <그림자 아이>는 부러 어색한 CG를 사용하는 것을 감수하고 재인의 몸에 수안의 얼굴을 덧입힘으로써 두 사람이 기이한 방식으로 섞여 있는 형상을 만들어낸다. 이는 분명 쉽게 떨쳐지지 않는 기괴함을 자아내는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도플갱어라는 문제를 비물질적으로 만들면서 수안과 재인 사이의 관계를 판타지 속에 유폐시킨다. 영화는 도플갱어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초과해서 여기저기로 폭주하면서 장르의 외연을 넓히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사전에 설계된 플롯의 구조가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영화의 판타지는 저택 안에서만 한정되고 고립된다.

다만 영화의 끈질긴 점은 재인의 이 불쾌한 얼굴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어느 순간에 가면 다시 재인이 얼굴을 되찾을 거라는 관객의 예상을 배신한다. 만일 이 영화가 정말 동화를 메타포로 썼다면, 끝에 가서 모든 것이 원상복구되었을 것이다. 비가역적인 상실을 승인하는 동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자 아이>는 동화로 귀결되지 않고, 괴담으로 승화되지도 않고, 그 어떤 이야기의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얼굴의 부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남겨둔다. 이 동화는 어른의 욕망이 투영된 동화가 아니라, 아이들이 창작자이나 파괴자인 동화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돈되지 않은 비유와 상징의 81미숙함이 재인의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온 것이 아닐까. 도플갱어가 둘 중 한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규칙을 깨고, 서로 같이 있기를 택한다면, 그런 반-규칙을 수용하는 영화의 화면은 이런 식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 아 닐까.

<장화, 홍련>

<그림자 아이>와 자주 연관되어 언급되는 영화는 <장화, 홍련>이다. <그림자 아이>는 거의 이 영화의 자장 속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런 연관성 속에서 <그림자 아이>를 보는 것이 좀더 흥미로운 방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장화, 홍련>은 종종 그렇게 오해되는 것처럼 자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은주(염정아)와 수미(임수정) 사이의 지지부진한 혐관(혐오 관계)이다. <장화, 홍련>의 반전은 서로를 괴롭히고 죽이려 드는 계모와 수미가 사실 동일 인물이었으며, 계모의 괴롭힘은 수미가 만든 착란이었다는 것이다. 수미를 괴롭히는 계모도 수미, 계모를 죽이려 하는 이도 수미였다는 사실은 자아 분열에 대한 표현으로 읽어낼 수도 있지만 이를 도플갱어의 문제로 볼 수도 있겠다. 결국 둘 중 하나는 복제, 거짓임이 밝혀지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장화, 홍련>에서는 도플갱어와 유령이 동일시되지 않는다. 도플갱어가 한 사람의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절망이라면, 유령은 저택이라는 장소와 연관된 존재다. 도플갱어가 도피에 관한 문제라면, 유령은 도망칠 수 없는 기억과 얽혀 있는 것이다. 반면 <그림자 아이>는 두 가지를 결합하려 한다. 수련과 똑같이 생긴 재인을 만난 후, 수안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예전에 살던 저택으로 되돌아온다. 그 저택은 금옥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살인과 그림자의 유령이, 수안과 수련의 운명과 더불어 붙들려 있는 곳이다. 이는 떠나고 싶음과 떠날 수 없음이 뒤섞여 있는 애도와도 같다.

죽은 자의 귀환이라는 문제는 언제나 반쯤은 애틋하고, 반쯤은 두려운 일이다. 로맨스와 호러가 양분되지 않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이보다 적절한 소재는 없을 것 같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은 죽은 자와 맺는 성애적인 관계가 지닌 호러의 성질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 <그림자 아이>에서 로맨스의 문제는 약간 복잡하다. 수안과 수련의 관계는 자매애로 쉽게 분류될 수 있지만, 수안과 재인의 관계는 우정과 자매애, 혹은 그 모든 것을 초과하는 열망의 끈으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재인이 수안의 얼굴을 하게 된 뒤로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하기는 더욱 곤란해진다. 수안과 수련이 자매였던 과거와 연관 지어 보면, 수안과 재인(수안의 얼굴을 한 재인)은 쌍둥이 관계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처럼 영화가 도플갱어의 문제에서 쌍둥이의 문제로 급작스레 전환되면서 가려져 있던 불균질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데드링거>가 보여주듯이 영화에서 쌍둥이라는 형상은 두 사람이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로부터 떨어져 나온 조각들일지 모른다는 의혹으로 타자와의 거리감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림자 아이>가 애도에 대한 영화라면, 비가역적인 상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얼굴이 타자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장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이 ‘그림자 아이들’이 아니라 ‘그림자 아이’인 것처럼, 영화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단 하나의 얼굴로 중첩되어 있는 상태에서 끝을 맺는다. 우리가 동화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지, 동화가 현실을 집어삼킨 건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