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내일의 고전, 오늘의 도전

<백룸>을 보고 극장을 나서며 처음 든 생각은 의외로 ‘고전적’이라는 것이었다. 유튜브가 낳은 공포라기에 각오했던 어지러운 화면은 없고, 단정한 프레임과 착실한 서사, 배우의 얼굴이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순서가 뒤바뀐 관객이다. 영화를 먼저 보고 그날 밤에야 원작인 유튜브 <백룸> 시리즈를 찾아봤다. 두 <백룸>은 다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른 차원에 속한 결과물이다. 10대의 침실에서 시작된 케인 파슨스의 유튜브판은 낡은 VHS 테이프의 기록인 양 위장한 파운드 푸티지 그 자체다. 캐릭터도 서사도 없이 노란 방과 형광등 소음이라는 감각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모호한 단서의 해석은 댓글창과 위키의 몫으로 남겨둔 열린 텍스트. 반면 영화는 오리지널 각본 위에 추이텔 에지오포레나테 레인스베를 세우고 트라우마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처음과 끝이 닫힌 이야기였다.

굳이 구분해보자면 유튜브 영상은 프로덕션보다 포스트프로덕션에 더 비중을 두는 것 같다. 고전적 영화가 현장에서 찍는다는 행위 자체에 무게를 두는 반면 숏폼 콘텐츠들은 후반작업에서 창조되는 것들이 상당하다. 렌즈가 포착한 진짜보다 소프트웨어로 빚어낸 진짜를 신뢰하는 태도라 해도 좋겠다. 유튜브 시대의 새로운 문법이라 불리던 것이 극장에 입장하며 어떤 변화를 겪는가. 변한 것은 문법이다. 파슨스 감독은 자신의 이름을 알린 유튜브 어법 대부분을 스스로 걷어냈다. 반면 변하지 않은 것은 제작 방식이다. 영화의 VHS 질감은 아날로그 카메라가 아니라 무료 3D 소프트웨어 블렌더의 후반작업으로 빚어졌다. 할리우드가 사들인 건 새로운 문법이 아니라 흥행이 증명된 이미지와 딸려오는 팬덤, 그리고 디지털네이티브의 손버릇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매체는 언제나 섞여왔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고 노래하던 시절, 정작 라디오는 죽지 않고 카메라를 받아들여 ‘보이는 라디오’로 진화했다. 올드미디어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뉴미디어의 문법을 제 몸에 새기며 갱신한다. 요즘 극장에서는 그 역방향의 융합을 목격한다. 때로 영화만큼 영화를 둘러싼 반응이 흥미로울 때가 있다. 가령 <호프>를 둘러싼 소란을 지켜보며 나는 그것이 댓글과 알고리즘과 결합한 관람 방식의 극단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좋았다, 싫었다의 즉각적 판정, 몇개의 밈으로 압축되는 해석, 진영으로 갈리는 댓글창. 달리 말하자면 플랫폼을 떠나면 힘을 잃는 줄 알았던 유튜브 문법의 일부가, 만든 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극장 관람의 사후 경험에 접붙는 광경이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한다. 이 오래된 격언이 부디 모르면 보이지 않는다는 배척의 언어로 읽히지 않길 바란다. 문을 닫는 쪽이 아니라 여는 쪽으로, 좁히는 쪽이 아니라 넓히는 쪽으로 작동했으면 좋겠다. 유튜브 <백룸>을 모르고 봐도 영화는 온전히 성립한다. 다만 알고 보면 다른 재미가 보일 수도 있다. 노란 방의 기원을, 댓글창의 집단 창작을, 그 카오스가 극장의 문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을 아는 관객에게 이 영화에 얽힌 이야기가 한겹 더 생길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해하지 못하는 새것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문턱을 높이거나 호기심을 세우거나. 지식은 입장권이 아니라 보너스 트랙이어야 한다.

1980~90년대 MTV가 데이비드 핀처스파이크 존즈를 키웠다면 지금은 알고리즘과 댓글창이 유튜버 출신 감독이라는 새로운 세대를 길러내는 중이다. 극장에 리듬과 이미지를 들고 온 뮤직비디오 세대와 달리 유튜브 세대는 제작 파이프라인과 팬덤을 통째로 들고 왔다. 이번호 특집에서는 그 경향과 흐름의 꼬리를 붙잡아보았다. 이 물결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새로움은 언제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여기 내일의 고전이 될 오늘의 새로움들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