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판석 감독이 지난 8월12일 향년 64살로 별세했다. 그는 1987년 MBC에 입사한 뒤, <짝> <아줌마> <하얀 거탑>을 거쳐 <아내의 자격>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졸업>에 이르기까지 30여년 동안 한국 드라마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왔다. 드라마가 단순한 통속극 취급을 받던 시절에도 그는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로 눈을 옮겨 역설적으로 드라마에 예술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병원과 학원가, 상류층의 저택과 평범한 연인의 일상까지 시대의 욕망이 배어 있는 공간을 드라마의 무대로 끌어왔고 권력과 계급, 교육과 노동, 사랑과 존엄을 인물의 삶 속에서 길어 올렸다. 이제 그의 드라마를 다시 보는 일은 한 연출가의 필모그래피를 복기하는 것을 넘어, 지난 30여년 한국 사회의 욕망과 관계,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얼굴을 되돌아보는 일이 됐다.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시대의 표면보다 그 아래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욕망과 조건을 먼저 보게 된다. 먼저 를 통해 지식인 계층의 위선과 가부장제에 찌든 중산층 가정의 이면을 들여다보던 그는 <하얀 거탑>에서 병원을 배경으로 권력과 야망, 가치의 충돌을 밀어붙였다. <하얀 거탑>으로 의학 드라마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던 2007년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안판석 감독은 “최소한 드라마는 실용을 좇을 것인가, 가치를 좇을 것인가의 이야기여야 한다. 모든 인간은 매 순간 고민하고 선택하며 살지만 우리는 그걸 선택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씨네21> 588호)고 말했다. 결국 그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권력을 욕망하는 인간 그 자체보다 시대에 따라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욕망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선택하고 마는지의 본능적 문제에 가깝다. 그의 드라마에서 시대와 사회는 오직 배경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의 궁극적인 선택을 가름하는 결정적 조건으로서 거듭 작동한다. 그의 관심은 이후에도 현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내의 자격>에서는 대치동을 무대로 학벌과 계급 상승을 향한 중산층의 욕망을 포착했고, <밀회>에서는 계급과 예술, 욕망을 사랑 이야기 속에 겹쳐놓았다. 2013년 <세계의 끝>을 비평한 유선주 TV칼럼니스트는 안판석으로부터 창조된 현실성을 두고 “바이러스 재난이라는 한계 앞에 각 인물들이 선택하는 말과 행동, 관계와 관점은 꽤나 한국적”이라며 ‘리얼리티의 쾌감’을 안겨준다고 말했다(<씨네21> 898호).
그러나 안판석의 드라마를 단순히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거창한 의제를 앞세우기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공간과 관계, 말투와 욕망을 끝까지 따라가며 현실을 드라마의 안으로 끌어들인다. <졸업>에 이르러서도 그는 주인공 서혜진(정려원)보다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그들이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주변인들이 더 중요하고 더 잘 봐야 한다. 주인공의 내면과 본질은 이들을 통해 결국 나온다. 예컨대 혜진에게 상섭, 지석이라는 리트머스를 댔을 때 혜진의 반응이 각각 다르지 않나. 그걸 다 종합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혜진을 알 수 있다.”(<씨네21> 1457호) 지난한 현실은 그의 드라마에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서사의 출발점이었다.
극사실주의가 안판석의 문법이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철학적인 연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40대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깊이 공부했다. 드라마가 현실을 얼만큼,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현실의 외형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떤 인과와 맥락 속에서 발생하며, 그것을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설득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안판석에게 극사실주의는 카메라에 현실을 담는 방법론이기 전에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였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안의 상황과 인물을 충분히 구체적으로 쌓아 올리면 오히려 현실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2006년 <국경의 남쪽>을 촬영하던 영화감독 안판석은 현장을 찾은 <씨네21>에 이렇게 말했다. “선이 굵은 이야기면 디테일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텐데, <국경의 남쪽>은 선이 가는 영화라 리얼리티를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홍상수 감독은 현장에서 배우의 가방 안에 신문지 뭉치를 넣는 게 아니라 인물에 걸맞은 소품을 채운다는 기사를 읽었다. 본받고 싶었다. 상황이 갖춰져야 배우들의 감정도 진짜처럼 나올 것 아닌가. 1천여명의 보조출연자들의 가슴에 실제 북쪽 주민들처럼 김일성 배지가 모두 달려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씨네21> 537호)
안판석이 그린 로맨스는 어떨까. 그가 오랫동안 좇아온 리얼리즘의 온도를 어떻게 따라왔을까. <아내의 자격>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졸업>으로 이어지는 안판석의 멜로는 흔히 ‘현실 연애’라는 말로 설명되지만, 그의 성취는 현실적인 사랑을 그렸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안판석에게 사랑은 인물의 삶을 흔드는 감정인 동시에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질서를 드러내는 장치다. <아내의 자격>이 입시 경쟁을 통해 사랑을 둘러싼 환경 자체를 규정했다면 <밀회>에서는 스무살의 남자와 마흔살의 여자가 맺는 관계를 통해 계급과 욕망, 예술과 존엄의 문제가 겹쳐졌다. 최지은 문화평론가는 2014년 를 두고 “단순히 위험한 사랑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밀회>는 어쩌면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한 답을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오혜원(김희애)은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해 그동안 손에 넣었던 것들을 놓고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사랑하며, 행복하게, 존엄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그가 택한 길이다.”(<씨네21> 955호) 이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봄밤>에서 사랑의 무대를 더욱 일상적인 생활로 옮겨온 안판석은 <졸업>에서 다시 사랑과 노동, 교육과 계급이 맞물리는 대치동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멜로는 사랑하는 두 사람만 떼어놓고 바라보는 대신 그들이 살아가는 직장과 가족, 계급과 교육, 사회적 통념까지 함께 프레임 안에 넣었다. 따라서 안판석에게 로맨스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실을 가장 가까이 들여다보는 장르였다.
2년 전 <졸업>으로 만난 안판석 감독은 <씨네21>에 이렇게 말했다. 문학과 예술은 시작할 때 반대되는 걸 제시해서 갈등을 만들어내고 그 갈등을 깊이 파고든 끝에 뜻있는 결과를 얻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여전히 드라마가 문학의 본판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리고 이렇게 낭만적인 말도 잊지 않았다. “문학의 시대는 간 게 아니라 영원한 거라고.”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현실의 농도와 상상의 농도를 어떻게 균형 있게 맞춰나갈 것인지 우직한 질문을 계속 건네온 그는 우리 안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안판석의 시대는 사라진 게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