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두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불평이 터져나오기도 한다. 자기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를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백인 보수주의자들은 “하얀 피부와 금발의 미녀” 헬레네가 어째서 흑인이냐며 불평을 터뜨린다. 일부 고전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원작에 깃든 여러 다양한 모습들이 제거되었다고 불만이 많다. 여하간, 3천년에 걸쳐 유럽인들에게 꿈과 용기와 상상력을 심어주었던 마음의 고향, 정신의 요람과 같은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왜 당신 멋대로 바꾸어 놓았느냐는 것이다.
이건 허구다. 3천년 어쩌고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로마제국 후기까지 내려오던 헬레니즘 전승은 중세 이후 완전히 끊어지고 그리스어를 읽을 수 있는 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단테와 같이 박식한 인문주의자조차 호메로스를 읽은 바가 없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호메로스에 매료된 이들이 서서히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문주의자라는 소수의 집단 안에 한정된 현상이었다. <오디세이아>가 일반인들이 널리 읽는 대중문학이 된 것은 프랑스어와 영어 번역본이 나온 18세기가 되어서야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그리스 문명이 서양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 것도 이때쯤 시작된 일이다. 빙켈만을 필두로 횔덜린, 헤겔, 괴테 같은 이들이 불붙인 이 그리스 숭배는 19세기 들어 독일식 문헌학이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되었던 것을 다른 한편으로 삼아 퍼져나간 새로운 현상이었다. 영국의 경우에는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인 1869년에 나온 매슈 아널드의 저작이 중요한 기폭제였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대영제국의 엘리트들은 이때쯤부터 고전고대 그리스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시작했고, 이것이 19세기 말 인도유럽어족의 개념을 구실로 모든 백인들이 ‘아리안’이라는 인종주의의 흐름까지 타게 되었다. 요컨대 서양인들이 호메로스와 그리스 문명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길어야 300년도 채 안되는 일이다.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 1882년의 일이니, <오디세이아>를 서양 정신의 ‘요람’이라고 우기는 것은 성경이 한민족 정신의 ‘요람’이라고 우기는 짓이나 큰 차이가 없다.
사실 호메로스 말고도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여러 다른 버전들이 있다. 심지어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 사이에 낳은 아들이 나중에 찾아와서 오디세우스를 죽이고 페넬로페와 결혼하는 막장 엽기 버전도 있다. 그러니 놀런 감독이 <오디세이아>를 서구 전통의 정전으로서가 아니라 지금은 없어진 한 문명의 이야기로 다시 쓴 것은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일이다. 동시에 그것이 수많은 백인들을 화나게 하는 것도 얼마든지 이해가 가는 일이다. 정작 민망한 것은 이러한 흐름에 올라타 ‘전통적’인 독법과 다르다면서 박식을 과시하는 ‘명예 백인’들이다. <오디세이아>를 뻑적지근한 서양 정경이 아니라 먼 옛날의 한 음유시인이 리라 가락에 실어 전해주는 먼 옛날이야기로 들어보자. 한 걸음 더 나아가 호메로스의 입담이 실리기 이전, 지중해의 파도가 전해주는, 지금은 없어진 한 문명의 이야기로 들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