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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비대면의 가능성과 대면의 불가피성, 오진우 평론가의 <왕과 사는 남자> <군체> <와일드 씽>

1년 전, 2025년 상반기 한국영화를 조망하며 한국영화가 ‘부모찾기’ 중이라고 썼었다. 돌이켜보면 이는 한국 독립영화에 국한된 진단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겠지만, 부모가 없는 폐허 속에서 한국 독립영화는 자신만의 길을 나서며 각자도생하는 듯 보이지만, 그 길에서 만난 동료들과 서로 도우며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나가는 중이다. 그렇다면 2026년 상반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개봉작 위주로 쓰는 이 지면은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한국 독립영화와 해외의 아트하우스나 작가주의 감독에게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이것이 평론가의 생존 혹은 기생에 유리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비평을 쓴다는 것은 이 한정된 파이를 두고 빠르게 선점하려는 싸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놓치게 되는 것은 한국 상업영화다. 고백하자면 놓쳤다기보다는 외면하는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영화를 안 본 것은 아니다. 왠지 한국 상업영화와 영화비평은 모두 서로의 개입과 수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평행선을 달리는 듯하다. 상반기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한 한국 상업영화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공존과 연대

<왕과 사는 남자>

2년 만에 천만 영화를 기록한 장항준의 <왕과 사는 남자>는 제목부터 그 특징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왕위에서 유배지로 쫓겨난 이홍위(박지훈)와 유배지를 관리하는 촌장 엄흥도(유해진)의 공존은 어긋난 욕망에서 출발한다. 우연히 죄인을 받은 옆 동네가 부촌으로 거듭난 것을 보고 엄흥도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마을을 살리고자 적극적으로 유배지 유치 경쟁에 뛰어든다. 결국 유배지로 결정됐지만, 옆 동네와 다르게 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죽음이다. 영화는 죽음을 유예하면서 둘의 공존을 잠시나마 지켜본다. 둘은 유사 부자 관계로 거듭난다. 하나 엄흥도 아들인 태산(김민)이 관아에 잡혀오자 공존은 깨진다. 엄흥도는 한명회(유지태) 앞에서 이홍위는 왕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아마도 유배지가 된 순간부터 엄흥도는 이중구속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이홍위를 살리고자 하면 엄흥도 자신을 포함한 마을 전체가 죽음을 면치 못한다. 또한 엄흥도는 이홍위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 그와 아무 관계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이홍위가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내린, 임금으로서의 마지막 부탁이지만 말이다. 결국 엄흥도는 자신의 손으로 죽인 이홍위의 시체를 몰래 수습한다. 생존의 이유로 시작된 공존에서 엄흥도는 이홍위의 유사 아버지였다가 배신한 백성으로, 다시 충신이었다가 배신한 신하가 된다. 엄흥도는 역할이 계속 바뀌면서 비루해질 대로 비루해진다. 그 모습은 영화 마지막에 이홍위의 시체를 끌어안은 엄흥도의 얼굴이기도 하다. 둘의 공존은 살아 있을 때 엇갈리며 부분적으로나 잠시 가능했던 유토피아라면, 이홍위의 죽음을 통해 공존은 비로소 가능해진다. 엄흥도는 왕과 함께 죽음을 택할 수는 없었다. 그에겐 지켜야 할 마을이란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의 생존을 위해 엄흥도와 이홍위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택한 것이다. 둘은 말이 엇갈리고, 공간도 공유할 수 없게 분리됐지만 심리적으로 이어진 사이였다. 엄흥도는 이홍위의 마지막을 홀로 배웅하며 숭고한 충신이자 아버지가 된다.

<군체>

공존은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사람 또는 사물이 어울려 살아가는 상태를 말한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이 시대 배경인 <왕과 사는 남자>에서의 위계는 공존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연상호의 <군체>는 모든 위계를 없애고 하나의 생각을 공유하는 세계를 상상한다. 소통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비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영철(구교환)은 한 빌딩 안에 바이러스를 퍼뜨려 다자간 연결망으로 통합된 의식이 가능한지를 실험한다. <군체>는 점점 하나가 되어가는 서영철 무리와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무리의 대결을 그린다. 영화 속에서 엄흥도와 이홍위처럼 짝을 이루는 캐릭터는 현희(김신록), 현석(지창욱) 남매다. 이 남매는 빌딩에 갇힌 여러 인간 군상 중 유일하게 피를 나눈 가족이다. 누나 현희는 하반신마비로 전동 휠체어를 탄다. 동생 현석은 문제의 감염 사태가 발생한 건물의 보안 요원이다. 상반된 운동성을 지닌 남매는 재난 상황에서 하나의 몸이 된다. 전동 휠체어를 버리고 누나는 동생에게 업힌다. 전략상 통제실에서 자신의 무리에게 길을 안내하는 자리로 누나가 이동하면서 남매는 물리적으로 분리된다. 무리가 서영철을 확보한 이후에 현희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피해자가 되어 버려진다. 현석은 누나를 구하겠다고 노력하지만, 누나는 동생에게 오는 길을 거짓말로 안내하여 살 길을 모색해준다. 누나는 절규하는 동생을 모니터로 바라본다. 이렇듯 어긋난 신호로 둘의 공존은 깨지고 동생의 목숨만 구제한다. 여기서 연상호의 독특한 작가성이 발휘된다. 죽은 누나를 살리는 것이다. 정확히는 감염된 누나를 동생 앞에 내보인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의 누나가 동생에게 걸어온다. 걷지 못했던 누나의 걷는 장면은 <군체>의 강렬한 순간 중 하나다. 하지만 누나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이미 텅 빈 신체로 전락됐다. 그녀는 서영철의 연장된 신체로서 그에게 복무하는 하나의 연결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현석은 기적처럼 다시 만난 누나의 손에 들린 칼에 찔려 죽고 만다. 이렇듯 연상호는 홀로 된다는 무서움만큼이나 달라진 형태로의 귀환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영화를 통해 풀어내는 감독이다.

폐쇄된 빌딩에서 서영철은 탈출하려는 무리를 해체하여 공존을 파괴한다. 그는 자신이 외롭게 된 원인 제공자인 세정(전지현)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빌딩에 홀로 남겨둔다. 백신으로서 서영철을 확보한 정부 역시 세정을 구하지 않고 해산하려고 한다. 전남편의 아내인 설희(신현빈)만이 세정을 구출하기 위해 나선다. 이들은 영화상에서 물리적으로 만나지 않고 스마트폰과 CCTV를 매개로 비대면의 연대를 이룬다. 오히려 감염을 통한 다수와의 물리적 공존을 추구했던 서영철의 유토피아는 이 두 여성의 연대를 통해 수포가 된다. 불타 죽은 서영철이 남긴 것은 허연 점액질이다. 감염된 자들은 이 점액질을 통해 소통하고 하나의 유기체로 진화한다. 빌딩 안을 뒤엎은 점액질은 서영철이 그토록 원하던 완전한 소통의 감각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편으론 그것은 처연하게도 다가온다. 서로 다른 형태의 공존을 추구했지만 오히려 비대면의 연대가 다수를 구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변화하는 공생의 형태

<와일드 씽>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남긴 시대의 감각을 <군체>가 반영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생각해볼 문제다. 그렇다고 이것이 공존의 답인 것은 아니다. 두 여자의 교집합인 규성(고수)은 앤트밀 현상 이후 여전히 감염된 채로 식물화돼 멈춰 있다. 영화 말미에 그가 움직이면서 파국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두 여자 역시 추후에 남겨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리적 대면을 암시하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따라서 <군체>는 비대면의 가능성과 대면의 불가피성이 공존한다.

대면의 불가피성을 전면화한 작품이 손재곤의 <와일드 씽>이다. 3인조 혼성 댄스 그룹 ‘트라이앵글’의 재결합 과정을 다룬 <와일드 씽>은 <무한도전-토토가>열풍을 다소 뒤늦게 소환하며 추억보다는 시대착오적인 감성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20년 전 해체한 그룹 트라이앵글의 멤버 현우(강동원), 상구(엄태구), 도미(박지현)는 공연장으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트라이앵글에 밀려 만년 2위 신세였던 성곤(오정세)이 합세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왜냐하면 트라이앵글이 새롭게 구성되기 때문이다. 도미가 트라이앵글의 대표가 되고, 빈자리를 성곤이 메운다. 셋은 같이 행사를 돌고 프로필 사진을 찍는다. 한때 원수였던 이들이 오랜 단절과 반목을 지나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공존은 하나가 되는 일은 아니다. 어쩌면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존재들이 충돌하며 한 프레임을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분열의 시대, 세분화된 취향으로 파편화된 동시대 관객들이 영화관이란 장소에 한데 모여 바라본 공존은 완성된 형태가 아닌 여러 형태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와일드 씽>의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